가장 큰 복 | 이병수목사 | 2009-03-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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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에베소서 1:3-7(신 309면) 제목:가장 큰 복(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행복해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표정도 달라야 합니다.’ 헌데 이런 말을 들으면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었다고 해서 갑자기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고 난 뒤에도 형편과 건강과 처지는 똑같습니다. (예)믿는 우리들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좌절과 외로움을 느끼며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됩니다. 비오면 비 맞아야 하고, 바람 불면 바람을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비도 바람도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라고 특별 대우, 특별 보호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믿어서 너무나 행복하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볼품없는 외모와 강한 성격을 갖은 사람입니다. 한때는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헌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세상에 등을 돌리고, 복음만을 위해서 산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산 사람이지만, 늘 가난했고, 미움을 받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 저를 여기에서 구원해 주십시오. 저는 억울합니다. 기적을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로 석방되고,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 주옵소서”라고 했을 것입니다. 헌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찬송 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전 행복합니다. 전 기쁩니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이 바울이 이해가 되십니까? 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감격과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코드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과 우리가 받고 싶어 하는 것이 너무나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깨닫지 못합니다. 대신 내가 받고 싶은 복만을 날마다 구합니다. 매일 매일 구하고, 부르짖고, 바라보지만 얻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1)첫째로 ‘지금 여기서’와 ‘나중 거기서’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상을 받고 싶어 합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 서서 받을 복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온통 우리의 관심과 기도 내용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예)우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대부분 ‘주시옵소서’ ‘주실 줄 믿--(여기에 액센트)습니다.’입니다. 이 말은 뒤집으면 아직 하나님이 주신 것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신령한 복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떼를 씁니다. 밥을 굶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사는 여기는 우리들이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여기는 악한 마귀와 귀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적진입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간첩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한 사람이라도 살려 내려고 활동하는 간첩들입니다. 헌데 여기가 좋사오니 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예화)요즘 아이들도 그렇지만, 저희 어릴 때 친구들과의 싸움이 소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막 싸우다 불리하면 ‘너희 집에 텔레비전 있어? 없지. 우리 집에는 있다.’ 이러면 기선제압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집에 자동차 있어? 없지, 우리 집에는 두 대나 있어. 까불지마!” 이 쯤되면 완전히 케 오 패 당하는 것입니다. / 풀이 죽어서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에게 따지고 덥빕니다. ‘아빠 우리도 자동차 사요? 우리도 텔레비전 사요? 우리도 50평 아파트에 가서 살아요? 내 친구는 있는데 왜 우리는 없어요?’ 그래서 친구 코를 납잡하게 하고 싶어합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은 성도들을 향해서 약을 올립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도 잘 만 산다. 상사 비위맞추고, 적당히 타협하고 거짓말하면 살아도 잘만 삽니다.’ 이게 부러워서 교회에 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도 주시옵소서. 세상 사람들 코를 납작하게 하도록 날 성공시켜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만 마음이 온통 가 있습니다. 헌데 우리의 싸움은 지금 여기에서 누가 더 잘사느냐는 싸움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지금 여기가 끝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여기서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중에 갈 저기’가 있습니다. ‘나중에 갈 저기’가 있기에 ‘지금 여기에서는’ 얼마든지 양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또한 하나님이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은 완성된 열매가 아닙니다. 씨앗입니다. 헌데 우리는 완성품을 원합니다.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을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를 거듭났다고 합니다. 거듭났다고 할 때에 완성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났고, 이제부터 날마나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자식을 얻을 때 갓 난 핏덩어리로 받습니다. 다 자란 청년을 선물로 받는 게 아닙니다. 왜일까요? 날마다 키우라는 것입니다. 그 아이를 위해서 뒷바라지하고, 기도해 주고,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잘 키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생활도 과정이 필요합니다. 새신자가 단번에 어른 같은 믿음을 갖는 게 아닙니다. 숱한 과정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는 것입니다. (예화)‘난 이렇게 부탁했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미국 뉴욕의 지체장애인 회관에 적힌 글입니다.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신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로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신에게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삶을 선물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 받았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이 시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완성품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씨앗을 주셔셔 매일 자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씨앗을 잘 가꾸고 키워서 좋은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사도 바울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 보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찬양한 이유는 이 땅에 속한 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았기에 감옥 안에서도 소리 높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2.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가장 큰 복은 무엇입니까?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신령한 복은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신령한 복은 죄사함을 받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치심 즉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아멘도 안하시네요? (신령한 복을 주시지 말고,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나 달라는 얼굴들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헌데 이 모든 신령한 복을 가져오게 하신 이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에베소서에서 24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죄로 더러워져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실 때에는 아무 근거도 없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값을 치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적용)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이병수를 어떻게 구원해 낼 수 있을까? 어떻게 저들을 살려야 하나?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대신 값을 치루겠습니다. 그러니 구원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골고다 언덕의 의미)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디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 골고다 언덕입니다. 골고다는 갈보리라고도 합니다. 뜻은 ‘해골’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왜 골고다 언덕이 해골이란 이름을 갖고 있느냐?는 학자들마다 다릅니다. 언덕 모양이 해골 바가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거기는 공동묘지이다. 여기 저기 해골들이 널려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왜 골고다가 해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해골들이 즐비한 그곳 한 복판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높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해골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한 가운데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 십자가 밑으로 피가 흘러내립니다. 그 흘러내린 피가 해골에 닿자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납니다. 거룩한 성령께서 예수님의 피가 묻은 해골마다 영원한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해골같은 내게도 예수님의 피가 흘러내려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죄가 씻어진 것입니다. 분노와 미움과 거짓의 삶을 살던 내 영혼에 예수님의 피가 흘러와 치유된 것입니다. 깨지고, 증오의 감정만이 남아 싸늘한 시체처럼 죽어 있는 가정에 십자가가 세워지고, 그 십자가를 타고 흐르는 피가 가정을 살리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흘리신 피만이 우리들의 모든 죄를 씻기고,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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