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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복(2)-하나님이 하셨다 이병수목사 200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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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8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에베소서 1:4

제목:가장 큰 복(2)-하나님이 하셨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만이 주시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복이 무엇입니까? ❶우리의 모든 죄를 씻음 받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안에 죄가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헌데 예수님의 피가 해골 같이 깡마르고 물기 없는 내 영혼에, 내 삶에, 내 가정에 흘러내려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❷또한 사망에서 건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내가 예수님을 믿어 영원히 살게 됩니다. ❸또 예수님을 믿어 받는 복은 하나님의 자식이 됩니다. 죄의 종이었는데 예수님이 대신 값을 다 지불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리는 유산을 우리도 같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❹또한 하나님과 예수님과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❺예수님을 믿으면 든든한 빽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 땅의 삶을 견디어 갈 수 있습니다. ❻이 모든 은혜와 복을 나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은혜와 복을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4절의 말씀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셔서 이런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은 역순입니다.)

(1)헌데 우리는 내가 믿어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출발을 내 자신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렇습니다. 내 결정, 내 의지가 중요하고, 내가 회개함으로 구원받고, 신령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태양 빛이 찬란히 비추어도 내가 빛을 향해서 돌아서지 않으면, 빛을 받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가 믿어서, 내가 결정해서, 내가 회개해서 라고 생각합니다.

(2)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내가 결정하고 내가 회개하기 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동굴 밖으로 나오기 전부터 이미 태양 빛은 비추고 있었습니다. / 회개할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가 알지도 못할 때, 우리를 살려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모든 죄와 죽음의 값을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출발을 나에게서 찾기보다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사랑에서 찾아야 합니다.

(3)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머물면 안 됩니다. 한 발 더 나가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내가 결정을 하기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작정하심, 하나님의 계획하심, 하나님의 열심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은 “창세전에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적용) 왜 이게 중요한지 아십니까? 구원의 출발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하냐면,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 할 때는 구원받은 것 같은데, 내가 못할 때는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느낍니다. 우리 사람은 약합니다. 내 결심, 내 의지, 내 열심, 내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약한지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하십니다.

 

(창세전이라는 말의 의미)

‘창세전에’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을 보면 창세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작정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은 서로 상의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만들까? 로봇처럼 만들까? 아니다. 우리처럼 만들자...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이 자유는 어디까지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도 불순종할 수 있는 데까지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따먹지 않을 수도 있는 데까지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은 자원함으로 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억지로 무서워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결정해서 흔쾌히 하길 바라십니다.)

가장 충성스러웠던 루시엘 천사장이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이 땅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가장 사랑을 받는 사람들을 시기하여 유혹해 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삼위 일체 하나님의 예정 속에는 예수님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창조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죄의 값은 사망인데 창세전에 선택한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제가 저들 대신 죄 값을 치루겠습니다.”라고 결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고 예수님은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거룩한 성령님은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생각나게 하고, 알게 하시고, 시인하는 데까지 이르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정하신 것입니까? 창세전부터입니다.

 

헌데 문제는 이 말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일 때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기기 전에 나를 아셨고, 나를 만드시기 전부터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우리들이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전능자이심을 믿는다면, 다 이해되지 않는다 해서 불신할 수는 없습니다.

(예화)요한복음 3장에 보면 니고데모가 와서 주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이 거듭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부자청년이 주님께 나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이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 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은 틀림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전제한다면 이것은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하나님이 ‘창세전에’ 나를 택하지 않으시고 마음에 들 때 선택하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나를 보시고, 내가 하는 행동을 보고 선택했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예)마치 아이를 입양하려는 사람이 여러 아이들을 모아 놓고 그 중에서 가장 예쁜 아이, 혹은 가장 불쌍해 보이는 아이, 혹은 가장 약한 아이를 선택했다면 그것은 기준을 갖고 뽑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있기도 전에 창세전에 이미 나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먼저 아시고 미리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어쩌다가 나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론)

헌데 어떤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격하기보다 비판하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셔서 창세전에 선택하셨습니다.”라고 하면 감사하고 기뻐하기 보다 불만을 말합니다. ‘그러면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뭡니까? 이미 다 구원받을 사람이 정해졌으면 전도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참으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참 난감합니다. 또 로마서 9장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면 스스로 결정하게 하시지 하나님이 다 정해 놓으셨나? 모세에게는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논쟁을 하길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궁금함에 대해서 세세하게 대답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선포의 말씀입니다. 듣고 이해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해도 좋은 책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가 언제부터인가? 대답하지 않습니다. ‘천지’의 한계는 어디인가? 말씀하지 않습니다.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다 엿새는 얼마의 기간인가?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는 정확히 어떤 것인가? 어떻게 성령으로 잉태되는가? 보십시오. 성경은 일일이 대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설명해주고, 답을 주는 책이 결코 아닙니다. 사실을 선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창세전에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영원히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널 포기하지 않겠다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은 에서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서는 신경쓰지 마세요. 야곱을 강조하는 표현법입니다. 바로 야곱이 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야곱은 자기 결정, 자기의 힘, 자기 지혜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고 은혜를 구합니다. 사람으로는 안되고 하나님으로만 된다는 것을 알기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셨듯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괜히 똑똑한 척하며, 알지도 못하는 질문을 쏟아놓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하는 것은 악한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기도 전에 야곱을 선택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결국은 승리자가 되게 하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기쁨과 감격에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예)따지고 논쟁하느라 정작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연구하고, 논쟁하느라고 정작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는 방언기도를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너무 큰 소리로 기도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질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비판하느니 기도하는게 낫습니다.

‘저렇게 할려면 난 전도 안한다.’ 그러면 이렇게라도 전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판단하느라고 정작 해야 할 일, 누려야 할 일을 누리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셨다면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데, 의심부터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세전에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내가 있기도 전에 나를 선택하시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시며, 어떤 대가도 지불하겠다는 사랑으로 이끄시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먼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은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두 가지의 태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나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동부터 달라질 것입니다. 당당하고 즐겁고 힘 있게 살 것입니다. (2)그러나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인생 뭐 있나?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동도 그렇고 그렇게 하며 살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

나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들의 평가는 보이는 것으로 합니다. 성공을 했다든지 또 명성을 얻었다든지 남다른 지위를 얻었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만을 판단하는 물질세계에 갇혀 있기에 눈에 드러나는 것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히 생각하면 이 땅의 것은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하는 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것으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자유와 안식과 구원을 가져 올 수 없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민감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것은 겉핥기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엇이라고 하는가를 들으십시오. 주눅 들지도 마십시오. 남들과 비교하지도 마십시오. 비교의식 속에서 살지 말고, 자녀의식을 갖고 살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찬양이 있습니다. (예화)특히 중국의 공사치하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지하교회, 가정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양 중에 하나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것이 성경의 평가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언제부터 우리가 이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라는 찬양입니다.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찬양을 수 십 수 백 번 반복해서 부르면서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현재의 고난을 이겨내는 것은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하나님은 나를 태초부터 사랑하셨다.’라는 확신 때문인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수 십 수 백 번이라도 이 찬양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성령께서 확신을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나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깨닫고 확신과 기쁨가운데 사시길 바랍니다.

 

(2)또한 절대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보다 우리의 입장보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열심이 훨씬 더 큽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되고 있는 한 우리는 승리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생에 태풍을 주실까요? 태풍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시지요. 태풍은 자연의 선순환을 줍니다. 바다 물을 밑바닥에서부터 둘러 엎어서 정화시킵니다. 태풍이 대기권을 정화시킵니다. 태풍을 통해서 동식물이 균형을 맞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고난을 주시는 이유도 내 삶에 선순환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인생의 광야를 경험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성서의 예-다윗과 솔로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인생의 광야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입니다. 솔로몬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누린 사람입니다. 은이 땅에 떨어져도 귀찮아서 줍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누린 인생입니다. 헌데 결국은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생각할 시간도 기회도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이 땅에서 고난의 터널을 지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생각할 광야에서 보내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광야가 있었습니다. 고독한 시간들, 힘겨운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이 땅에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고난이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을 진지하게 하는 것은 광야입니다. 광야에 있습니까? 성숙해지는 시간이 되십시오. 내 삶의 선순환을 가져오려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기 바랍니다.)

 

(3)또한 남은 인생을 영원히 남을 것을 위해서 투자하며 사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삶은 천국을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지금은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카이스트 교수였습니다. 이 분은 취미가 골프였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골프를 즐기는 것이 낙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소장가치가 있는 오디오를 수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생활이 넉넉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헌데 이 분이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다른 아닌 창세기 11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나오는데 ”데라는 나이가 이백 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는 말씀이 그날따라 이렇게 보이더랍니다. 가운데 말씀은 보이지 않고, ”데라는 죽었더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뒈졌더라”는 말로 보이더랍니다. 순간 야! 이렇게 살다가는 죽는 게 아니라 뒈지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지금까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왔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서 영원히 남을 것을 위해서 사는 인생이 되려고 중국 선교사로 떠난 것입니다. 이 땅에서 평생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다가 결국 끝은 뒈지는 것이라면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한번쯤은 이 땅이 전부가 아님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땅은 끝이 있고, 그 다음은 영원히 펼쳐질 영원한 하나님이 예비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믿고, 거기서의 삶을 준비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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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김삼옥 2009.3.23 21:06

    목사님 머잖아 설교집을 펴낼날이 오겠지요.
    원본 그대로 올려놓으셔도 됩니다. 길면 어떻습니까? 항상 은혜가 넘치는데요~~~~

  • 김삼옥 2009.3.14 13:14

    영감과 능력있는 말씀이 있기에 늘 기다려 집니다.
    목사님! 힘내시고 제3탄의 가장 큰 복이란 극 상품의 말씀이 기대됩니다. 아자아자

  • 운영자 2009.3.9 15:04

    조금 길죠?

  • 운영자 2009.3.9 15:03

    설교 원고를 그대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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