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질문(1)-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이병수목사 | 2013-04-07 | |||
|
|||||
오늘부터는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질문 세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❶‘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우리의 믿음을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❷‘네가 낫고자 하느냐?’이것은 우리의 소망의 문제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❸‘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우리의 사랑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 주님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주님은 3년에 걸친 공생애가 마무리되는 마지막 시점에 물으셨습니다. 이제 주님에게 남겨진 일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떠나 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떠나고 나면 남겨질 제자들이 걱정되었습니다. 앞으로 상상할 수 없는 환난과 핍박과 시험이 올 것입니다. 불같은 시험 앞에서 제자들이 견딜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시기 위해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1.먼저 이 질문을 어디에서 하셨는가? 장소가 중요합니다. 13절에 보면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개정판 전에 성경에서는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왜 이름을 바꾸었나?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성경갖고 말꼬리를 잡는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곳에 개장수들이 많은가 보지? 영양탕 가게가 많았나 보네’하고 놀립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그래서 빌립보 가이사랴로 바꾸지 않았을까!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과는 정 반대인 가이사랴 빌립보로 향하셨습니다. (설명)쉽게 이해되도록 가이사랴 빌립보를 인체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➀아! 하고 벌린 입 - 갈릴리 호수입니다. ➁갈릴리 호수 위에는 헐몬산이 있습니다. 코입니다. 헐몬산에는 만년설이 있습니다. 이 눈이 녹아내려서 갈릴리 호수로 흘러갑니다. ➂(코를 가리키며)헐몬산에서 갈릴리 호수까지 흐르는 물을 상 요단강이라고 합니다. 이 인중부분이 요단강입니다. ➃갈릴리 호수(입을 가리키면서)의 물이 다시 식도(요단강)를 타고 흘러 위장 속으로 들어갑니다. 위가 깊은 사해 바다입니다. 그러면 가이사랴 빌립보는 어디에 있느냐? (인중을 가리키며)헐몬산 바로 밑에 있습니다. 가이사랴는 뒤로는 헐몬산이 병풍처럼 있고요, 앞으로는 요단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헌데 워낙 빼어난 전경으로 인해서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이 이곳에 로마 황제를 위한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의 이름를 따서 ‘가이사랴’라 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해서 가이사랴 빌립보가 되었습니다.
헌데 당시 로마 황제의 이름이나 칭호를 붙이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❶하나는 로마 황제의 위용에 걸맞는 규모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지중해 세계 제 1인자의 이름을 아무 곳에나 붙인다면 그것은 황제를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❷둘째는 그 도시의 중심이나 혹은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반드시 황제를 위한 거대한 신전이 세워져야 합니다. 로마 황제는 지상의 신이었습니다. 명목상 신이 아니라, 신전에서 인간의 경배를 받는 실질적인 신이었습니다. 실제로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대리석으로 된 거대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신전의 규모에 압도를 당할 만큼 그 위용이 대단했습니다. 또한 이 곳은 황제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황제의 도시답게 현대화되고, 경제적으로도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2.주님의 질문 이 황제의 도시에 예수님의 일행이 나타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황제의 도시 사람들에 비해 갈릴리 출신인 주님 일행의 행색은 유행이나 세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황제신전을 지키는 문지기가 주님보다 더 값비싼 옷을 입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주님일행은 거지떼처럼 초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초라하기 그지 없는 모습을 한 주님은 바로 이 곳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이곳에서 묻는 자체가 메시지가 있지 않습니까? (1)“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이곳에서 묻는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이 질문은 교회에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황제신전이 세워져 있는 곳, 세상의 논리, 황제의 논리가 판을 치는 도시 한 복판에서 물으신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추구하고 자랑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날 현대인들이 추구하고 자랑삼는 것과 일치합니다. ❶하나는 힘입니다. 사람들은 더 큰 힘을 얻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개인이나 국가간에 힘겨루기를 하며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갑니다.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을 과시하고 자랑하며 살아갑니다. ❷둘째는 지식입니다. 로마제국은 자신들의 학문의 위대성을 자랑하기 위해서 곳곳에 대형 도서관을 건립하였습니다. 가정마다 서재의 크기로 경쟁을 했습니다. 오늘 날에도 지식정보화 사회를 맞아 지식을 자랑합니다. 참된 진리는 모른 채 세상 지식만을 채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❸셋째는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의 시가지나 집안 구석구석에는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여인들의 나신상과 우람한 근육의 남성을 조각한 작품들이 즐비합니다. 오늘 날에도 성문화가 얼마나 발달했습니다. 음란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외모, 몸매, 라인입니다. 온갖 향락문화, 유흥, 게임, 도박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곳에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 날 사람들은 예수를 누구라고 합니까? ➀4대 성인의 하나라고 합니다. ➁존경할 만한 휴머니스트라고 합니다. 위대한 종교 지도자라고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은 ➂자신들의 문제를 풀어주고, 나를 도와 성공시켜 주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소원 해결해 주시는 분 정도로만 믿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것은 좋지만,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말씀은 부담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➃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면 좋은 말 듣고, 인격수양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적용)사랑하는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처음에 출발은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허나 여기에 머물면 안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데,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사실 주님이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믿음이 아니라,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의 대답을 듣고 싶으신 것입니다. 마음을 알고 싶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 할 것 없고, 이병수 목사! 너에게 나는 누구냐? 장로님들에게도 묻습니다. ‘너에게 나는 뭐냐? 너에게 내가 전부냐? 나면 충분하냐?’ 집사님들, 권사님들 한 분 한 분에게 묻습니다. ‘너에게 나는 누구냐? 너는 내가 전부냐? 나 하나로 만족하냐?’ 3.베드로는 대답합니다. 다 함께요?“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주는 Lord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당신은?’이란 말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란 구원자,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내 앞에 서 계신 초라하기 그지 없는 당신이 나의 구원자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로마 황제가 자신들의 구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마 황제 덕분에 이 만큼 안정되게 먹고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 황제가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베드로는 로마 황제가 구원자가 아니고,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구원받기 위함입니다. 예수가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선하게 살려면 다른 종교를 믿어도 됩니다. 자아실현을 위해서라면 타종교도 좋은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업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직’이라고 못박아 버렸습니다. 종교다원주의처럼 구원받는 길은 ‘여러 길’이 아니라, ‘오직 한 길’예수를 믿는 길뿐입니다.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스스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죄의 삯인 죽음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작금의 캐톨릭을 보면서 참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❶교황은 보이나, 예수는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주님에게 돌려 드려야 할 영광을 마리아, 교황에게 드리는 것 같습니다. 교황을 바라보고, 교황의 말에 주목하고 교황 보기를 갈망합니다. 어디에도 주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❷또한 토착화신학이라는 명분으로 구원의 문을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종교일치, 종교연합이라며 석탄일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합니다’라고 성당에 현수막을 겁니다. 스님을 초청해 성당에서 강연을 하고,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술 먹어도 좋다. 제사를 드려도 좋다.’인간적으로 보면 너무 멋있어 보입니다. 관대해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캐톨릭을 선호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부담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가치를 너무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 삶에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도지지 앟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구원의 절대성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보세요. 황제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❶사람들은 돈이 구원자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돈 있어야 한다. 돈 없으면 무시 받는다. 돈 있으면 못 할 것 없다.’돈을 믿고 살아갑니다. ❷힘을 자랑합니다. 힘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 한 둘은 알고 있어야 한다. 빽 없으면 안된다.’그래서 로마 황제를 찾아 다닙니다. ❸인간의 지식을 자랑하면서 절대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이야기처럼 듣습니다. 허나 인간의 지식이란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예)하늘을 보세요. 수 많은 새들이 떼를 지어 다니지만 충돌사고 일어났다는 말 들어보셨어요. 수 많은 물고기 떼들이 바다를 헤엄쳐 다니지만, 교통사고 일어나는 것 보셨어요. 허나 인간들이 만든 자동차, 비행기, 배들을 보세요.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지혜와는 비할바가 못되지요. 참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구원자이십니다.” (2)두번째 베드로의 대답은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개의 새끼를 뭐라고 부르지요? 개의 새끼는 언제나 개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❶주님은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죽으신 분이 아닙니다.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도 아닙니다.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화)집안 안방에 들어가면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사진을 걸어놓은 집이 있습니다. 종종 ‘아버님, 어머님! 저 보고 계시지요. 잘 되게 도와주세요. 그곳에 우리 위해 빌어주세요.’합니다. 헌데 우리 성도들 가운데도 예수님을 벽에 걸린 부모님들의 사진정도로 여기지 않나? 싶습니다. 예수님의 성화를 벽에 걸어놓고, 볼 때마다 도와달라고 하는 정도의 주님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❷그리고 하나님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뒷방 어르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은 달면 삼키다가도 쓰면 뱉어 버립니다. 허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토록 책임져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4.결론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 힘으로는 이 고백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질문 앞에 우리는 선뜻 대답 못합니다. 그래서 구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힘을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믿음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구해야 합니다. 사모해야 합니다. 핑계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믿음 주셔야 하는 것이라면 아직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은 주님이 안 주셔서 그런 거라고... 우리는 갈망해야 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멋진 고백을 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도망칩니다. 그런데 나중에 베드로는 그 약속을 결국 지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할 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에게 ‘내 어찌 내 주인과 같이 똑바로 십자가에 달리겠소. 널 거꾸로 달아주시오.’이 용기와 믿음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성령님이 권능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성령님께 구해야 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한 복판에서, 세상 한 복판에서, 직장 한 가운데에서, 학교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한 복판에서 주님은 물으십니다. “너는 나는 누구라 하느냐?”힘들지만, 어렵지만, 때로는 의심스럽고 답답하지만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며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문제가 너무 복잡하고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예수가 답이다. 예수님께 나아가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중 삼중으로 시련이 나를 둘러 있을 때에 주님은 물으십니다. 나에게 너는 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힘들지만 대답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대학교, 직장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때로는 유혹이 있지만, 넘어지기도 하지만, 대답해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이 믿음으로 견뎌 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떠나는 이 때에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십시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5.동영상 시청 함께 동영상을 보겠습니다. 김용의 선교사의 고백입니다. 이 동영상을 보고 부족한 저 자신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4분) 6.함께 기도한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