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질문(2)-네가 낫고자 하느냐 | 이병수목사 | 2013-04-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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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 개가 있었습니다. 헌데 주님은 양문으로 가셨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미문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큰 문인데, 이곳에서 나면서부터 걸어보지 못한 앉은 뱅이가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으로 일어나 걸었던 문입니다. 이 외에도 분문, 어문, 골짜기 문등이 있었습니다. 헌데 주님은 여러 문들 중에서 양문으로 가셨습니다. 양문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드릴 제물인 양과 짐승들이 출입하는 문이었습니다. 양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두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베-트는 집이라는 말입니다. 벧엘이라는 말이 있지요. 벧은 집, 엘은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의 집이 벧엘입니다. ?그리고 헤세드라는 말입니다. 헤세드는 은혜, 자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헤-스다는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이 베데스다에는 5개의 행각이 있었습니다. 행각이란 지붕은 있고, 벽이 뚫린 오두막 같은 것입니다. 이 행각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이유는 베데스다 연못이 갖고 있는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물이 솟아 나는 간헐천이었습니다. 가끔 물이 솟아 나면서 물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헌데 사람들은 물이 움직이는 것은 천사들이 연못에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미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38년 동안 누워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셨습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왜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느냐?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병자에게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이 말이 됩니까? 말이 안됩니다. 당연이 병든 자가 낫고 싶지 낫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예수님이 모르실까요? 다 아십니다. 헌데 왜 주님은 38년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물으실까요? 일주일 동안 생각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을까?’ 헌데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물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이 병이 들어 누운지 38년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12살에 병이 들었다면 쉰 살입니다. 22살에 병들었다면 예순 살입니다. 병이 걸린지 한 두 달 되는 사람이라면 낫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겠지요? 일 이년 되었다면 낫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처음엔 병이 들어 백방으로 노력해 봐도 고쳐질 가능성은 없어요. 그러기를 38년이 되었다면 낫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을까요?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이 말씀에 누웠다는 것은 성경에서는 죽었다는 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셨을 때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신이 죽었습니다. 38년을 누워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산송장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목회할 때, 몸져 누운지 1년 되신 분을 심방했습니다. 등에는 보름달 만하게 욕창이 나 있었고, 몸은 뼈밖에 없는 앙상한 모습이었습니다. 허벅지가 한 손 안에 잡히더라구요. 헌데 38년을 누워 있습니다. ?마음도 죽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 무슨 기대가 있었겠습니까? 긴병이 효자 없다고,,, 가족들도 다 포기하였습니다. 누구하나 거들떠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소망, 사랑이 없었습니다. 계시록의 말씀처럼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자입니다. 38년 된 병자의 대답을 들어보세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정답이지요? “예! 제가 낫고자 합니다.”하고 자기 소원을 아뢰어야 합니다. 헌데 뭐라고 합니까? 7절입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것은 나를 도와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것입니다. 내가 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내려갑니다. 분노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 안됩니다. 절망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적용)여기 베데스다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 아닙니까? 사랑을 말하고, 자비를 말하고, 은혜를 말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고, 비열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 있습니다. 경쟁사회인 오늘 날! 누가 누굴 도와줍니까? 사랑을 말하지만, 참 사랑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은혜를 말하지만, 참 은혜는 없습니다. 베데스다라면 들어가는 사람마다 고침을 받든지 해야지...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만 고침을 받습니다. 얼마나 은혜가 없는 곳입니까? 38년 된 병자의 절규를 들어 보세요. 그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나를 도와 줄 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으로 보면 “I have no one to help me” “나를 도와 줄 한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보면 이 사람의 말이 맞습니다. 누가 누구를 도와 줄 수 있습니까? 도와주고 싶어도 능력이 안됩니다.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자비가 없습니다. “I have no one to help me” 수 많은 사람들속에 살아가는데 혼자라는 외로움에 빠져 살아갑니다. 헌데 나를 도와 줄 그 한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는 이 사람의 말이 정말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예! 틀린 말입니다. 왜요? 그 한 사람이 바로 곁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바로 그 한 사람!으로 와 계신 것입니다. 신음하고 절망하고 절규하는 38년 된 병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한 사람으로’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헌데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화)지난 주간에 중국 공산당 시절에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고난을 증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한 가정교회 지도자는 정부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는 삼자교회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20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을 거냐? 버릴 거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만들어낸 허구이냐?며 온갖 고문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고문이 힘들어 이러다가 배교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영광을 가리는 것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 전구를 빼고 감전되어 죽으려고 했는데, 전력이 약하여 죽지 않았습니다. 사실 알고 보니 손에 차고 있던 수갑이 전류를 분산시켜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두려워 자살하려는 못난 자신을 살려주셨구나! 싶어 회개를 했습니다. 20년을 견뎌왔는데, 내가 고난이 두려워 자살로 생을 마감하려고 했구나!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데... 또렷이 주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못난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주시고, 위로하시는 주님을 느끼고 견딜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동영상에 나온 증인들의 한결 같은 고백은 ‘자신들이 모진 고문도 다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의 주님! 사랑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현실적용)헌데 38년 된 병자의 대답 속에서 오늘 날 우리들의 상태를 봅니다. (1)우리들의 병중에 하나는 ‘어떤 기대와 소망도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패배의식은 기독교인들 중에도 있습니다. ‘기도해도 안 돼!’ 더 이상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절망이 우리 안에 가득합니다. 이 불신이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나오나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 가정 좋아질 희망이 없다. 해도 안된다. 남편! 바뀔 것 같지 않다. 어두운 현실이 좀처럼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깊은 절망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심각함은 믿음이 죽은 것입니다. 아무런 기대와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내가 이 일을 할 줄 믿느냐?”“나를 기대하느냐? 헌데 왜 절망하고 있느냐? 내가 죽었느냐?” 저는 우리 성도들이 오늘 이 시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모든 패배의식을 날려 버리시기 바랍니다. “예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2)또 아무런 기대가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헛된 소망으로 가득한 것도 문제입니다. 신앙이 아니라 신념에 사로 잡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도 많습니다. ‘나는 잘될 사람이다. 하루에 거울을 세 번씩 보면서 선포하면 됩니까? 할 수 있다. 하면된다. 외치기만 하면 됩니까? ’이것은 내 신념입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살아야지 신념으로 살면 안됩니다. 신앙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고생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허나 신념은? 하나님의 뜻은 상관하지 않고, 오직 내 뜻만 내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을 믿는 것은 신념이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을 믿어야 해요. 내 소원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소원대로 될 것을 믿고, 그것이 어떤 결과이든지 기쁘게 받아들이는거예요. 여러분이 정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꿈을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금식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안된다고요?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해 봐요. 죽고자 하세요. 죽고자 하면 살게 될 것예요. 어설프게 죽지 말고 완전히 죽으세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실 때, “예! 주님 제가 낫고자 합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면 좋아지고 싶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변화 받고 싶습니다. 저도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tu서 부흥하고 싶습니다.” (예화)지난 주간! 기도원에 다녀왔습니다. 5년 6개월 동안 달려오면서 많이 지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들을 갖기 위해서 다녀왔습니다. 조용히 기도하면서 제 마음 안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교회를 생각하면서 내가 목회를 잘 하고 있는가? 성도들은 변화되고 있는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왜 응답이 안될까? 혹 성도들이 믿음 잃고 넘어지면 어떻게 할까?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온다고 하는데, 나는 양들을 얼마나 알고 있나? 양들을 사랑하고 있나? 이것보다 더 사랑하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양들은 목회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온다고 하는데 주님의 음성을 듣고는 있나? 이런 문제들로 인해서 내 안에 확신이 아니라,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기대와 소망보다 염려를 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기쁨도 많이 잃어버리고, 제 마음 안에 불타는 소원과 거룩한 꿈도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도 38년 된 병자처럼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은 보지도 못하고, 현실을 힘들어 하고, 해도 안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구나! 깨달았습니다. 확신도 꿈도 어느 순간 희미해 졌구나! 생각했습니다. (현실적용)그러는 가운데 사무엘하 12장 22-23절의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무엘하는 새벽시간마다 묵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다윗 왕이 밧새바와 간음하였습니다. 밧새바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헌데 그 아이가 병이 들었습니다. 다윗은 그 아들을 위해서 7일째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고 기도합니다. 기도의 내용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뜻이라면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도 이제 우리 성도들을 섬기고 기도할 때 이렇게 해야 겠구나!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고침 받습니다. 어둠은 떠나갑니다.”선포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안되면 힘들어 합니다. 주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구했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 나를 불쌍혀 여겨 주옵소서. 우리 성도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면 능히 나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능히 해결될 줄 믿습니다. 살려주세요.”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헌데 그 다음이 더 은혜가 됩니다. ?결국 그 아이는 7일만에 죽습니다. 신하들이 왕이 상심할까봐 말을 못합니다. 그 때 다윗이 눈치를 채고 묻습니다. 죽었느냐? 예 죽었습니다. 그러자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고, 성전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와서 음식을 먹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신하들이 묻습니다.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 고백에 큰 은혜를 받았어요. 지금 다윗은 내가 할 일과 하나님이 할 일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고, 살리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결정하신 일에는 감사하게 순종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아 이렇게 목회해야 겠구나! 성도들을 섬길 때 안된다고 상처받지 말고, 하나님께 구하자. 금식하며 구하자. 사랑하며 구하자. 최선을 다해서 구하자. 그리고 주신 결과에 대해서는 순종하자. 하나님의 뜻을 존중해서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은 절망 속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 말씀하십니다. 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일어나라 절망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능력이라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시라면 일으킬 수 있습니다. 고치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문제만 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문제와만 싸우지 말고, 믿음의 문제를 갖고 싸우십시오. 문제가 커서가 아니라, 믿음이 작아서 문제입니다. “남편이 같이 안 바뀐다고.. 상황이 안바뀐다고...변화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나부터 걸어가십시오. 주님을 기대하십시오.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시면 다른 말씀마시고, 예! 낫고자 합니다. 주님이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확신을 갖고 꿈꾸길 바랍니다. (다 함께 찬양하자.) 나의 등 뒤에서... 일어나 걸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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