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복(3)-자녀의 영성 | 이병수목사 | 2009-03-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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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5일 주일낮 예배 설교 성경:에베소서 1:3-7 제목:가장 큰 복(3)-자녀의 영으로 살라 어제 아침식사 자리에서 큰 아이에게 식사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저와 교회를 위한 기도제목에서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빠가 설교를 잘해서 돈 하나도 안내고 TV에 많이 나올 수 있게 해주시고, 전 세계 사람들이 알아보는 목사님이 되게 해 주세요. 또 우리 미래교회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져서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이게 해 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난 뒤에 ‘아들 고맙다. 헌데 아빠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사람이 되는 거 바라지 않는다. 무조건 우리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아빠의 설교를 듣고 자살 할려고 했던 사람이 살아보겠다고 했으면 좋겠다. / 너무나 슬픈 사람이 설교듣고 위로를 받고 기뻐했으면 좋겠다. /미움과 비교의식과 상처로 얼룩진 사람이 설교를 듣고,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 넌 왜 그모양이냐?고 판단하고 욕하던 사람들이 설교 듣고 나도 그런걸. 나도 부족한 사람인데... 하며 자신을 돌아봤으면 좋겠다. / 아빠는 살리는 설교를 했으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잘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 진심이었습니다. 오늘까지 3주간에 걸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가장 큰 복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 하늘의 복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실제적으로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귀로만 듣지 마시고,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개념적으로 생각으로만 하나님을 이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실체를 경험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철저한 자기 결단, 자기 회개, 자기 낮춤, 자기 포기, 자기 순종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신령한 복 3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주일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세전에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예정하신 것입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겠다. 끝까지 책임지겠다.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구원해 내겠다.”는 것을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까지도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런 희생을 치루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를 창세전부터 예정하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5절의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누구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원래 지옥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어둠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라는 찬양의 3절의 가사가 “한 없는 사랑과 그 크신 은혜를 늘 의심하면서 안 믿는 자에게 내 작은 입으로(지옥의 자식들로) 곧 증언하리니 성령이 오셨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의역한 찬양입니다. 헌데 이 찬송가의 작사자인 프랭크 보톰은 원래 “한 없는 사랑과 그 크신 은혜를 늘 의심하면서 안 믿는 자에게 이 지옥의 자식이 증언하리니 성령이 오셨네”라고 했습니다. 보톰은 지옥의 자식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지옥의 자식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무엇입니까?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종으로 부릴려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녀 삼으시려고 우리를 창세전부터 예정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이중적인 영광) 하나님이 자녀들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1)하나는 법적인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으면 바로 호적에 올립니다. 입양을 하더라도 바로 호적에 올립니다. 길러보고 나서 하는 것 봐서 호적에 올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호적에 올린 이상 자녀입니다. 키우다 말 안 듣는다고 호적에서 지울 수 없습니다. 관계가 어떠하든지... 내 감정이 어떻하든지... 자녀입니다. /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다는 것은 호적에 올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호적에 올린 것은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녀 삼은 것을 후회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누릴 은혜와 복을 다 주겠다는 강력한 의지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2)또한 하나님의 자녀됨은 내적인 차원에서 ‘자녀의 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서 “너희는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헌데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하나님의 영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영이 누리는 것을 같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영원하시므로 나도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죄의 종 노릇하던 내가 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 16-17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니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호적에 올려 주셨습니다. 누구도 다른 말 못하도록 아예 호적에 올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안에 거룩한 성령님이 거하시므로 성령의 일에 나도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당당히 영광의 유업을 받을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고 해서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종의 영으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첫째로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당당함을 갖고 자신 있게 사는 것입니다. 왜 자신감을 잃어버립니까? 왜 열등감을 갖고 삽니까? ⓵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나의 길을 가면 됩니다. ⓶또 죄책감 때문에 자신감을 잃습니다. 자녀의 영으로 산다고 해서 이 땅에서 다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잘못해도 ‘자녀’이기에 얼마든지 아버지께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보십시오. 무엇 믿고 그렇게 당당합니까? 우리 아이들이 부모 앞에서 당당하게 살길 바라지 비교하고, 열등 의식 갖고 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기 바라겠습니까? (성서의 예) 탕자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의 불효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가출했다는 것보다 돌아와서 보인 태도였을 것입니다. 돌아와서 염치가 없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를 품군의 하나로 써 주소서” 종의 영성입니다. 종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짓을 생각하니 나는 아들 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잘못을 늬우치고 회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렇다해도 자녀됨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 아버지는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한 번 아들은 영원한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탕자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기 한 짓이 있으니 고개 숙이고, 자신감을 잃고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받은 자의 기쁨을 누리면서, 아들된 확신을 갖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빠, 아빠’하면서 더 즐겁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종은 행위 즉 Doing 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무엇을 해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있는 것 자체가 귀한 것입니다. Being 존재만으로도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좀 당당하십시오. 또한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놓치 않는 것입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 소망 사랑이십니다. 절대로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예)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이 실명한 것은 원숙한 시 세계에 접어든 50대였습니다. 이때 그는 그렇게 자신이 주장하던 공화제가 무산되고 왕정이 복고돼 정치적인 위기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비참한 시기에 밀턴은 <실낙원>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앞을 못 보게 되자 사람들이 동정하며 "이젠 밀턴의 인생도 막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 때 밀턴은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실명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실명을 이겨낼 수 없는 나약함이 비참한 것이다."
우리 사람들은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직장을 잃고 난 뒤에 ‘난 이제 끝장이야! 아무 소망이 없어!’ 직장만 없는 것이지, 왜 인생이 끝난 것입니까? 돈을 잃으면 ‘나는 망했어. 다 잃었어!’라고 합니다. 돈만 잃은 것입니다. 돈을 잃으므로 사랑도, 가정도, 꿈도, 믿음도 다 잃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은 너무 어리석은 것입니다. 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운 일보다 더 힘든 것은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두려움입니다. 낙심입니다. 가난, 어려운 상황, 질병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문제보다도 문제를 이겨내지 못하는 약한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무릇 지킬만 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좀 당당하게 담대하게 사십시오. 우리가 누구 자식입니까?
(2)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들이 누리는 복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로 복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바라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은 특권이 무엇입니까? ‘바라크’입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 꿇을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공을 했습니다. 헌데 그 성공 자체는 복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에서 성공을 해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시간이 없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시간이 없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복을 받은 자라면,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 아버지와 더 친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더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분께 무릎을 꿇는 시간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Out of eyes, Out of mind"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입니다. 성공해서 너무 바빠서 세상 일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시간이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이 내 눈에서 점점 멀어지고 마음에서 멀어진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잃고 세상의 것을 다 갖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 것을 다 잃더라도 하나님을 얻을 수 있다면 저는 그 길을 선택하겠습니다. 우리들이 평생 기도제목으로 삼아야 좋은 기도의 예가 있습니다. 너무 야베스의 기도만 좋아하지 마시고, 아굴의 기도도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잠언 30장 7-9절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정말 중요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다 허물이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해야 하지 않습니까? 거룩한 기도를 하면서도 뒤에는 더러움을 숨겨놓았다면 바리새인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욕심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내게 진실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내가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 앞에서는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우리는 이왕이면 내가 구한 것은 다 이루어주시고, 심은 것보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얻게 해 주세요 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자는 “내가 하나님을 모른다 할까 두렵사오니 필요한 것만 주십시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공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의 영성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이지, 하나님을 잃고 아무리 성공한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토저 목사님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다. 헌데 오늘 날에 사람들은 하나님은 잊어 버리고 천국만 가면 좋다. 복만 받으면 좋다. 성공만 하면 좋다. 구원만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천국, 하나님이 주시는 복,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라야 참된 것입니다. 헌데 우리는 하나님 없이도 내가 받고 싶은 것만 받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을 주십니다. 고난이 주는 가장 큰 유익은 ‘바라크’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성서의 예) 탕자의 죄는 아버지는 없어도 좋다. 유업만 달라. 재산만 많이 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 갖고 뭐했습니까? 타락했습니다. 범죄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탕자의 회개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어도 좋다. 돈 없어도 좋다. 아버지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틴 루터는 너무 바빠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고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하는 자가 복입니다. 억만금을 가지는 것보다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큰 복입니다. 세상이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돈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누가 말합니까?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주님이 주신 가시도 복임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 가시 때문에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힘주셔야 만 살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병자로 살았지만, 병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병에 걸려도 하나님의 자녀요 건강해도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히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환경의 노예로 살지 않았습니다. 환경 때문에 낙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감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부모님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 날 닮았나?하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아빠에게 가장 좋은 칭찬은 “네 자식은 너 복사판이다. 어떻게 그렇게 똑같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를 닮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내가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두 가지의 원칙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①점진적으로-많이 말씀드렸지요. 우리는 공사중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자라가야 합니다. 날마다 성숙해져야 합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면 됩니다.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 올라 가듯 자라가면 됩니다. 믿음 생활하는 것을 중단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또한 ②하나님은 우리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겐 성령님이 계십니다.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지켜주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의 영성을 갖고 살지 말고, 자녀의 영성을 갖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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