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 이병수목사 | 2009-04-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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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2일 부활주일 낮 설교 성경:마가복음 16:1-11 제목: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 (서로 인사) 부활절을 맞는 이 아침에 부활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며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첫째로는 부활의 확실한 증거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둘째는 적용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이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서 주님의 수난 받으심과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받으심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까? (1)왜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으셨습니까? 특새 중에 청년들이 찬양을 했습니다. “잊을 수 없네 하나님의 사랑”-정말 잊을 수 없는 찬양이었습니다. 왜 잊을 수 없었는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찬양의 가사에 보면 “우리 때문에 생명 주셨고, 우리 때문에 고통 당하셨네 우리 때문에 갈보리 오르셨네 무지한 우리 때문에 / 우리 때문에 십자가 지셨고, 우리 때문에 물과 피를 쏟으셨네” 예수님이 수난 받으신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 때문입니다. (2)또한 하나님은 예수님의 수난 받으심을 통해서 ‘내가 너희를 이처럼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보여주신 모든 말씀과 모습들,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도 예수님의 역사성 즉 이 땅에 존재하셨다는 것은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많은 증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인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에서 “증거들 없이 믿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습니다. 허나 대부분 무신론자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존재하셨다는 것과 수난 받으신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인정하지를 못합니다.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말대로 정말 부활의 증거가 없습니까? 부활에 대한 증거는 성서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에서 부활에 대한 말씀은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⓵먼저 무덤의 돌문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인들이 예수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유을 가지고 무덤으로 갑니다. 틀림없이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덤에 커다란 돌문으로 굳게 닫고, 누구도 손을 못대도록 인을 쳤습니다. 군인들이 철통 같이 무덤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확률은 제로입니다. 헌데 하나님이 돌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⓶둘째는 빈무덤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었습니다. 공자는 중국 창평에 석가는 인도 살수에 그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덤이 없습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⓷세번째는 수의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쌓던 수의가 한 곳에 차곡 차곡 접혀 있었다고 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 말대로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가 가져갔다면 수의 채 들고 가지 않겠습니까? 수의를 벗기고 가지도 않을뿐더러 수의를 개고 가겠습니까? ⓸모든 것이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우연히 일어난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⓹무엇보다 부활의 목격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11명의 제자들, 의심 많았던 도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베드로, 사도 바울 등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⓺더 확실한 것은 500여 사람들에게 동시에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부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⓻무엇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는 지금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부활의 소망을 갖고 사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이 땅에 부활의 주님으로 인해서 변화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면 2000년 동안 수십억의 사람들을 어떻게 속일 수 있습니까? 기독교의 대폭발의 힘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은 약자들이었습니다. 사회에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시골출신에 미숙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한 귀퉁이에서 벌어진 일이 어떻게 전 세계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사실 Fact’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사본이 현재 약 24,000개 정도입니다. 어느 고문서 중 이렇게 많은 것은 없습니다. 헌데 24,000개의 사본을 비교, 대조, 연구한 결과 (이것을 연구한 사람들이 있나 봅니다.) 예수님에 대한 5대 기독론의 교리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5대 교리가 무엇입니까? ⓵인간으로 오셨다는 성육신 ⓶십자가 사건 ⓷부활사건 ⓸하늘로 올라 가셨다. 승천사건 ⓹반드시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는 재림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이 거짓말이라면 우리처럼 불쌍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2.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진정 이 땅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들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1)첫째는 부활의 삶이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오늘 본문 2-3절입니다. “안식 후 첫 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앞서 말씀을 드렸지만 이 여인들의 힘으로는 절대로 무덤 문을 열수 없습니다. 아니 무덤 가까이 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무덤에 간들 군인들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무덤을 가며” - 무덤으로 갔습니다. 가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했습니다. 이 여인들은 걱정하면서도 갔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적용)우리들의 믿음이 100%순결한 믿음이라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우리에게 큰 믿음을 주십시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더러 명령하면 바다에 빠져지리라’고 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 아주 작은 믿음입니다. 이 여인들의 믿음은 걱정하면서도 가는 것입니다. 손해가 되더라도 가는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어떻게 될거야!’ 하는 마음으로 간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도 믿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지금 분위기는 살벌합니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있는 곳에 문을 이중 삼중으로 걸어 잠그고 숨어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이 여인들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무덤으로 갑니다. -사랑하기에 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가만히 있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행동하게 합니다. (적용)주님을 사랑하면 걱정되도 가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손해가 되도 가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길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면 두려워하고만 있으면 안됩니다. 사랑한다면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이 여인들이 걱정하면서도 무덤으로 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무덤 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흰 옷을 입은 천사에게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라진 주님 때문에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는 결국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믿는 대로 사는 믿음) (예)아침마당에 영어의 달인 개그맨 김영철이라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가 영어를 잘하는 법을 설명했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이 사람의 지론은 “뻔뻔하게 떠 뻔뻔하게 당장 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헌데 오늘 날에는 영어를 하지는 않고, 영어공부 어떻게 할 것인가? 영어 100일만에 정복하는 길, 어휘를 따라잡는 법, 영어를 잘하려면 어떤 마음자세를 갖어야 하나? 그냥 하면 되는데, 겉돌기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라는 것입니다. 당장 하라는 것입니다. 부딪혀서 하다보면 무엇이 부족한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텐데 하지는 않고 생각만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이론적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전도에 대해서, 예배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배우기만 하지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잘 몰라도 하면 됩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 됩니다. 예배에 참석하면 됩니다. 하면 됩니다. 걱정만 하지 말고 하십시오. 당장 하십시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시간이요 내일은 마귀의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깨달았으면 오늘 당장 해야 합니다. 항상 악한 마귀는 좋다 해라. 다 해라. 그러나 내일부터 하라/나중에 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교리로 가득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부활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둘째로 부활의 삶이란 나는 죽고 예수가 살아 나야 합니다. 부활은 죽음 없이는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죽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온전한 부활의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죽기 위해서입니다. 나 자신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는 부활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적용)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힘듭니까? 왜 갈등이 있습니까? 내가 살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서 예수가 부활할 것이 아닙니까?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주님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예화)제가 배우고 싶은 목사님가운데 한 분은 한신교회를 담임하셨던 이중표목사님입니다. 이 목사님은 별세신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신 분입니다. 한 번은 자신이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취주사를 맞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의사가 왔습니다. 마취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의사는 핀으로 찌르더랍니다. 헌데 고통을 그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야!’했더니 ‘아직 안 죽었네!하더랍니다. 이 말이 주님의 음성으로 들린 것입니다. 문제나 내가 안 죽어서 그렇구나! 내가 죽어야 내 안에서 예수님이 사시는데 여전히 내가 살아 있구나! 철저히 회개하고 별세신앙을 강조하는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실예)목회를 하면서 뼈저리게 느낍니다. 왜 사랑해야 할 성도들과 갈등하고, 힘들어 할까? 내가 아직도 안 죽어서 그렇습니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모든 관계속에서 내가 죽어야 합니다. 부활을 맞는 이 아침에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 사십니다. 헌데 죽어야 한다는 것 다 아는데 안 됩니다. 내가 먼저 죽는다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어느 순간 죽은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살아서 나를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 주었습니다. 부활하신 첫 날 저녁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찾아왔습니다. (1)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2)평강이 있을지어다-주님이 정말 주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3)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기쁨이 회복되었습니다. (4)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새로운 엔진을 다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탄력을 받아야 합니다. (5)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래도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는 부활의 삶의 확실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네! 용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만큼 내가 죽어야 하는 일이 없습니다. 내가 죽어야 상대방을 살릴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공동체가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화해와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용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함께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을 믿은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 여인들을 포함해서 마가의 다락방에는 몇 명이 모였습니까? 120명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최소한 513명입니다. 500명이 넘는데 약속을 믿고 기다린 사람들은 120명입니다. 393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왜 그들은 기도하지 않고 있습니까? (기도는 연줄과 같다. 신앙생활은 연날리기이다. 연은 혼자서 나는 것이 아니다. 연줄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연줄이 적당히 당겨 주어야 한다. 그래야 연은 더 잘 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더 신앙생활을 강력하게 하려면 기도의 줄이 끊어지면 안된다. 기도의 줄이 내 삶을 붙잡아 주어야 힘있게 날아 오를 수 있다. 줄 끊어진 연처럼 세상 바람에 이리 저리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치지 않기 위해서 기도의 줄을 잡아야 한다.-우리 교회:매일 새벽, 매일 저녁 기도의 불을 밝히려고 한다. 매일 새벽기도회 / 화요일 중보기도 모임/수요예배, 목요 제자반, 금요기도회/주일 준비 기도회/주일 예배 일주일 내내 기도의 줄을 잡고 사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의 교리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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