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교회는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 이병수목사 | 2009-04-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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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9일 주일 낮예배 설교 성경:로마서 14:1-8 제목:미래교회는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최대의 행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를 말 할 수 있지만, 가장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좋은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에 다니면 우선 기쁨이 넘칩니다. 좋은 교회에 다니면 신앙생활이 즐겁고 감격이 있습니다. 좋은 교회에 다니면 날마다 신앙이 성장합니다. 매일 매일 믿음이 자랍니다. 좋은 교회에 다니면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 열망과 기대감을 갖고 살게 됩니다. 헌데 좋은 교회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손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시스템도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이런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단연 좋은 교회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선포되어지고, 십자가의 보혈과 사망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능력이 선포되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유일하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다시 오실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교회는 구제도 해야 합니다. 문화교실도 해야 합니다. 서로 교제와 친교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을 외쳐야 구원받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좋은 교회는 복음을 사수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좋은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까? 1.첫째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교회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이 되는 로마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로마교회의 문제는 한 마디로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서로 반목하고 화합하지 못하는 두 부류가 있어 교회 안에서 갖가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로마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유대인이면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절대로 부정한 음식을 가려먹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버티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하는데도 끝까지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또 이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 유대인의 피가 강하게 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이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든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맛있는 돼지고기를 왜 안 먹어? 음식이 무슨 문제냐? 예수님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된다고 했는데...저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자유가 없어.’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 아닌가? 이제는 일요일을 안식일로, 주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적용)오늘 날 교회 내에서도 의견의 차이로 인해서 서로 비난하고 판단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집니까? 본질의 문제라면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은 것을 갖고 싸우는 경우를 봅니다. (예)통성기도문제-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 방언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 지성적인 그리스도인과 감성적인 그리스도인의 갈등-당신은 머리만 너무 커졌어! 가슴이 없잖아! / 당신은 가슴만 뜨거워. 지나친 열성주의야! 라고 싸웁니다. / 보수주의적인 신앙생활과 자유주의적인 신앙생활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차이 등등 이런 일들로 인해서 서로 다투고 분리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교회를 왜 주셨습니까? 행복하라고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주셨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을 주시고, 교회를 주셨습니다. 헌데 교회를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 갈등 어떻게 풀어가야 합니까? 어떻게 좋은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까? (1)먼저 열린 마음을 갖고 관대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Open Mind를 갖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좋게 보려는 마음입니다. (본문)로마교회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갈등도 전혀 다른 입장인 것 같지만, 보기에 따라서 하나인 것입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둘 다 옳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둘 다 믿음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정반대인 문제이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먹는 것입니다. “음식이 뭐가 문제가 되느냐? 우상제사에 사용했다고 그 음식에 귀신이라도 붙어있냐? 붙어 있다고 해도 내가 믿는 예수님이 강하신데 뭐가 문제냐?”는 것입니다. / 또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먹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구별된 삶을 살아야지! 믿는 우리가 우상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실족하면 어떻게 하나? 그러니 우리는 먹지 않겠다”고 결정을 한 것입니다. 결국 둘 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는 바울의 눈이 얼마나 좋습니까? 좋게 보려는 마음입니다. (예화)한 아이가 놀다가 잘못해서 땅바닥에 있던 유리컵을 깼습니다. 이를 본 아이의 엄마는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너는 눈도 없냐?” 그것을 본 아이의 아버지는 “당신, 여태 그것도 안치우고 뭐했어?”라며 아내에게 화를 냈습니다. 시어머니가 그런 광경을 보고 ‘시끄럽다’며 며느리의 게으름을 나무랬습니다. 깨진 유리조각 때문에 발이 찢긴 아이는 어른들이 화를 내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저녁 그 가정은 유리 컵 하나 때문에 심각한 불화가 생겼습니다. 한편 이웃집에서도 어린 아이 하나가 방바닥에 있던 접시를 깨뜨렸습니다. 이를 본 아이의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는 한꺼번에 놀래서 아이에게로 달려와 어디 다친 데가 없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구나! 이 늙은 것이 집에서 빈둥빈둥 놀면서도 방바닥에 돌아다니는 접시 하나 치우지 못했구나!” 이 말은 들은 며느리가 송구스러워하며 말합니다. “아니예요, 어머님, 제가 게을러서 그만...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제 잘못입니다. 제가 떡을 먹고 당연히 치웠워야 하는데,..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 가정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두 가정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문제의 원인을 누구에게서 찾느냐?입니다. ‘You’메시지가 아닙니다. ‘I’ 메시지입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미안하다.”라는 것입니다. / 또 사람을 크게 보느냐? 사건을 크게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사람을 먼저 보면 어디 다치지 않았나? 걱정합니다. 다치지 않은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헌데 사람보다 사건을 보면 조심성이 없는 것입니다. 왜 일을 만들어 귀찮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가정이나 좋은 교회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람을 살리는 곳입니다. 헌데 오늘 날 가정과 교회가 서로 다투고, 싸우고, 정죄하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정과 교회를 만드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엄히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4장 10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하셨습니다. (2)또한 좋게 보려는 눈은 이해하려는 마음입니다. 이해와 오해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해는 내 입장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심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적대적이거나, 무슨 숨은 의도를 갖고 대하지 않습니다. 헌데 오해는 내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어느 신학자는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연구해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해 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헌데 쉽게 오해하는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1-2가지만 보고 그럴 것이라고 쉽게 판단해 버립니다. 그래서 오해를 합니다. (그림을 띄워준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두고...) 이 그림은 푸에르토리코의 국립미술박물관에는 <노인과 여인> 이라는 이 작품이 걸려있습니다.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 마다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유스러운 애정행각을 그린 이 작품에 불쾌한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딸 같은 여자와 놀아나는 부도덕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헌데 이 그림의 설명을 읽어보면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죄수복을 입은 노인은 두 손과 발이 묶여 있습니다. 이 노인은 젊은 여자의 아버지입니다.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여인은 노인의 딸입니다. 이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투사였습니다. 독재정권은 이 노인을 채포해 감옥에 넣고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음식물 투입 금지`라는 벌이었습니다.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갔습니다. 딸은 해산한지 몇일 지나서 무거운 몸으로 감옥을 찾았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굶주림에 죽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습니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몰래 음식을 갖고 들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 때 딸은 사랑하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운가? 이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께 물렸습니다. 이 작품은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입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미술품으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그림을 두고 알지 못할 때는 `포르노` 수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을 알고 나자 `성화`라고 격찬을 합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본질을 아느냐? 모르느냐? 차이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눈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을 보면 이해하게 됩니다. 본질을 본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실생활의 적용) 교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오해하고, 정죄하는 것 가운데 술과 담배, 제사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 문제를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무엇입니까? 사람에 대한 소중함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전도하면 술, 담배 때문에 교회 못가겠다고 합니다. 나중에 끊으면 가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교인들은 술과 담배를 전혀 안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교인들 가운데 술과 담배로 갈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업상 피치 못해서 술 한 잔 했는데 죄가 됩니까?’‘성경에 담배 피우지 말라는 말씀은 없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 / 죄냐 아니냐? 라는 판단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비난하고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 주셔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대가도 지불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면서까지 사랑한 사람들을 우리가 뭔데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고 갈등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품으셨는데, 우리가 왜 품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술이 죄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담배를 끊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받으셨습니다. (예)제사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사 문제 때문에 교회에 못 나온다고 합니다. 장손인데 교회에 나가면 제사를 지낼 수 없기 때문에 꺼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에 나오려면 제사 문제를 먼저 해결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사랑으로 믿음이 자라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믿음이 자라면 제사자리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돌파를 합니다. 참석하면서도 믿음을 얼마든지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눈을 갖기 바랍니다. 2.둘째로 좋은 교회가 되려면 ‘자기를 위하여’가 아니라 ‘오직 주를 위하여’ 해야 합니다. 주를 위한다는 말은 동기와 수단과 목적이 다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의 말씀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이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 아니면 일주일 내내 다 중요한 것이냐?는 문제는 생각의 차이입니다. 2차적인 문제입니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도 생각의 차이입니다. / 생각이 다른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닙니다. 사탄의 계략에 말려들면 안됩니다. 사탄은 사소한 것에 매이게 합니다. 대수롭지 않은 것을 크게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다르면 잘못된 것이고 틀린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서로 비난하고, 다투고, 미워하고, 심지어 당을 지어 갈라서게 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매이지 말자)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면 힘들게 교회당 잘 지어놓고, 입당하기 전에 분열을 했습니다. 이유는 강단 카펫을 무슨 색깔로 할 것이냐?것 때문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갖고 더 큰 것을 잃는 일이 있습니다. (적용)우리는 안 그렇습니까? 아무 일도 아닌 시시한 것을 갖고 흥분하면서도 정말 흥분해야 할 것에는 흥분하지 않습니다. 본문 8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동기와 수단과 목적이 주를 위한 것이라면 다 주님은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성공하려고 합니까? 주를 위한 것이라면 귀한 것입니다. 모든 일에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누구를 위한 것이냐? 주를 위한 것이냐? 나를 위한 것이냐? 동기와 수단과 목적이 주를 위한 것이라면 잘 사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욕심 때문이라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결론을 내 것으로 내라) 미래교회는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부활의 능력인 복음을 사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양보해서도 뒤로 미루어서도 안 됩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명확한 답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하면 됩니다.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믿음대로 하십시오. 믿음의 분량은 제 각각 이기에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기 바랍니다. 미래교회는 서로 이해하고 품어주길 바랍니다. 판단하기 전에 본질을 알고 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번만 더 생각하고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를 위한 일인가? 나를 위한 일인가? 동기와 수단과 목적이 주를 위한 것인가?’ 항상 물으십시오. 좋은 교인이라면 "Only To the Lord!" 오직 주를 위해서 사는 자들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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