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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교회는 이랬으면 좋겠습니다(2) 이병수목사 2009-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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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26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로마서 15:1-13

제목:미래교회는 이랬으면 좋겠습니다(2).

어떤 신학자는 교회를 가르켜 ‘가장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임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학교가 같든지, 고향이나 취미가 같든지, 하는 일의 직종이 같든지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어울릴 수 있습니다. 헌데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집단입니다. 학교도 다르고, 나이도 다릅니다. 배움의 정도도 다릅니다. 경제적인 생활도, 성격과 성품도, 고향이나 취미도 다릅니다. 신앙의 분위기도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 강력한 힘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 4-6절에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인간적인 조건들이 다르다 해도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주인이 하나요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하나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도 하나요 섬기는 하나님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문제제기)그런데 왜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갈라집니까? 왜 행복해야 할 교회생활이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고, 힘들어 합니까? 개인적으로 보면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본문에서 이 문제에 해답을 찾기 바랍니다.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교회면 다 같은 교회지. 똑같은 하나님 믿는 거 아닌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섬기지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믿고, 섬기는 사람은 다릅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성도가 많은 곳입니다. ‘사람보지 말고, 하나님만 보고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도 엄밀하게 말하면 틀린 말입니다. 사람도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와 교제하느냐?입니다. 교제권이 우리의 신앙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성도와 교제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적용)저는 우리 미래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제가 좋은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좋은 목사가 되면 성도들은 행복한 것입니다. 동의하시지요?’

‘교회는 좋은데 목사는 별로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교회가 왜 좋은 교회냐? 좋은 장로님들, 좋은 성도님들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미래교회는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첫째로 서로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품어주라는 것입니다.

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받아주라는 것입니까? 1절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를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받아주어야 합니까?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왜 우리가 서로 받아주어야 합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조건 우리를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서로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 받아주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셨을 때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는 연약할 때였습니다.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사이였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용서받을 만해서, 사랑받을 만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사랑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들은 하나같이 조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주셨는가를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자가 한 일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쾌락에 빠져 살던 여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정죄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죄책감에 빠져 있는 이 여인을 주님은 어떻게 다루십니까? 주님의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정죄가 아니었습니다. 은혜였습니다. 사랑이였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이제는 가서 다시는 죄 짓지 마라’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회개가 먼저 아닙니다. 회개했기에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 주었기에 그 사랑에 감동하여 회개한 것입니다.

(적용)교회는 어떤 죄인도 받아 주어야 합니다. 죄를 인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누군가 허물이 발견될 때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주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정죄하지 않고 사랑해 주신 것을 기억하고, 연약한 자를 품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예2)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짱돌같은 베드로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데 반석으로 삼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살겠다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더 이상 주님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베드로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이해해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마음은 원인데 육신이 약해서 그렇구나! / 또 진실한 베드로의 마음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약해서 실수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맞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진심을 받아 주셨습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회개부터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랑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베드로가 실패를 딛고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베드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기다려주고, 믿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불같은 성격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별명이 천둥과 번개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보고 흥분해서 ‘저들에게 불을 내려 다 없애달라’고 간청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성격이 불 같은지 모릅니다. 헌데 그들이 어떤 사도가 되었습니까? 야고보는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드린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동생 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일평생을 주님께 드려진 순교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생명을 드려 순교자가 되었고, 한 사람은 일생을 드려 순교자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시고,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용)우리 교회 안에도 미숙하고, 연약하고, 실수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듯이 기다려주고, 기도해주고, 가르쳐 주고, 믿어줄 때 변화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조건과 자격을 먼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는 거 봐서 용서하시겠습니까?’ ‘저 사람이 먼저 고개 숙이기 전에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회개를 먼저 요구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주님을 본받아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우리를 품어주셨듯이 우리도 서로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연약한 자를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담당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담당한다’는 것은 ‘대신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 보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했습니다.

(좋은 예-구약의 모세 /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하나님을 바꿔치기한 사건이다. 이런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려고 한다. 그때 모세의 태도를 보십시오. 출애굽기 32장 31-32절에서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나를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를 저들과 다릅니다. 라고 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담당해 주는 아름다운 모습니다. 이 모세의 모습이 참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과는 다른 곳입니다. 비교하고 경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같이 가는 것입니다. 더디 가더라도 같이 가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같이 인정받는 곳입니다. 교회는 팀플레이를 하는 곳입니다. 11명의 축구선수들이 뛰지만, 우승을 하면 벤치에 있는 선수들까지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입니다. 영광을 함께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남들이 없는 것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강한 자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대신 짊어져야 하기에 더 갖은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사명일뿐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내게 있는 좋은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배웠습니까? 남들보다 돈을 더 벌었습니까? 남들보다 더 높은 지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준 그것으로 무엇을 했느냐? 얼마나 섬겼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유익되게 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 ‘나는 그렇지 않으니 괜찮다. 나는너와 다르다. 나는 괜찮다.’고 구별하는 것은 참 교회가 아닙니다. 참 성도가 아닙니다. 참된 교회는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담당해 주는 것입니다. 서로 짐을 져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하나가 되어 온전해 져 가는 곳입니다.

 

2. 둘째로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의 기쁨을 구하지 말고, 남을 더 기쁘게 해야 합니다. 2절의 말씀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교회는 한 운명공동체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각 지체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한 몸의 원리입니다. (예)오른 손이 부러지면 왼손에 주사바늘을 꽂습니다. 부러진 팔을 기부스 해서 목에 겁니다. 헌데 목이 내가 부러졌습니까? 왜 내가 고생해야 하느냐고 할 수 없습니다.

(예화)70년대에 유행하던 노래 중에 양희은 씨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깊은 산 오솔 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 어느 맑은 여름 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 그 놈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 깊은 산 오솔 길 자그마한 연못엔 /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붕어 두 마리가 서로 살겠다고 싸워 한 마리가 죽자 물은 썩고 결국 남은 한 마리이 붕어도 죽은 것입니다.

교회는 작은 연못과 같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 은 두 마리 붕어와 같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함께 살지 않으면 결국은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서 헌신해 주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이웃의 기쁨을 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적용측면에서)

자기 편한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모님의 고백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작지만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헌데 교인 중에 심각한 가정의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늘 기도해주고, 염려해 주지만 늘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자주 찾아오고, 심지어는 한 밤중에 전화도 자주 걸려오곤 했습니다. 어늘 날도 곤하게 자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순간 짜증이 나서 남편에게 잘 이야기해서 밤에는 전화하지 않도록 말하세요. 잠을 잘 수가 없잖아요? 예의도 없데요? / 그 순간 성령님께서 물으시더랍니다.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느냐?” “네 주님 난 이들을 사랑합니다.” 그 때 성령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네가 편한대로만 사랑하려고 하느냐? 사랑은 너 편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란다.”라는 깨달음을 주시더랍니다.

우리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내 스케줄이나 잠, 휴식을 방해하지 않을 때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내가 방해를 받거나 손해를 보거나 하면 귀찮게 생각하고, 싫어한 것은 내 편한대로 사랑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우리가 먼저였습니다. 이웃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이웃이 먼저인 것입니다.

 

우리 미래교회에는 거룩한 왕따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왕따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되게 하고, 기쁨이 되게 하는 일에는 생명을 걸어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익이 되고 나의 기쁨이 되는 일에는 ‘손해’ 보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거룩한 왕따들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적용)저는 부족하지만 목회 원칙으로 삼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5-17절입니다.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 내 젊은 양들을 치라 / 내 늙은 양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게 맡겨 주신 양들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저를 믿고 맡겨주신 양들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을 먹는 목자가 아니라, 양들을 먹이는 목자가 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적용)때로는 성도들을 향해서 판단하는 마음, 야속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올만한 사람인데... 믿음으로 순종할 만한 사람인데... 하는 아쉬움을 갖습니다. 내 마음속에 성도들의 약점을 담당해 주려고 하기 보다 판단하려는 마음이 앞설 때면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참된 목자, 마음이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성도들의 약점을 담당해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중보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서 이해하고, 도와주고, 배려해주고, 기도해 주는 것이 좋은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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