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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을 넘어서는 성도 이병수목사 200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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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7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사도행전 20:17-24

제목:바울을 넘어서는 성도

김수환 추기경의 애창곡이라고 해서 더 유명해진 애모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 중에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고백을 누가 가장 많이 하는지 아십니까? 오늘 날의 성도들입니다. “바울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많이 들어보셨지요? 지금도 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바울에 대한 태도가 세 가지인 것 같습니다. ① ‘바울하고 난 달라! 감히 바울을 어떻게 따라가’ ②‘바울 만큼만 됐으면 좋겠다.’ ③그러나 ‘그래 바울이 위대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바울 앞에서 기가 죽어야 되겠는가? 이왕 믿을 바에는 바울을 넘어서 보자!’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이유가 우리를 기죽이기 위함입니까? 바울보다 못한 사람들은 성도도 아니야?라고 정죄하기 위함입니까? 저는 감히 도전하고 싶습니다. 성경이 바울을 소개하는 것은 바울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넘어서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보다 더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멘도 안하시네요?) 원래 설교 제목을 지난 주일에는 ‘귀신들을 우습게 여기는 성도’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바울을 우습게 여기는 성도’라고 정했었습니다. 헌데 설명 없이 제목만 들으면 오해할 것 같아서 ‘바울을 넘어서는 성도’라고 수정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가운데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이 에베소 교회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에베소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①하나는 두란노 서원 선교전략이었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에 집중하므로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악한 귀신들이 쫓겨 가고, 질병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②또 하나 에베소 선교 사역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19-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3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들은 사도 바울의 사역의 특징과 태도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겸손, 눈물, 소망의 인내입니다.

 

한 가지씩 살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첫째로 겸손한 태도입니다.

본문에 보면 “모든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왜 겸손이면 겸손이지 모든 겸손이라고 했습니까? 모든 겸손이란 온전한 겸손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순간에만 겸손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가운데서 겸손 하라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겸손 하라는 것입니다. 18절에 보시면 바울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이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전도할 때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논쟁에는 지고 전도에는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논쟁에서 이기려고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논쟁에서 이기면 영혼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이런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자신의 지식을 갖고 논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영혼들은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에서의 사역은 지는 것입니다. 논쟁에서는 지고, 전도에서는 승리하는 전략입니다. 이것이 겸손함입니다.

어떻게 겸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이 일평생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종의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서신서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즐겨 사용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다”라는 말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종은 스스로 된 종입니다. 주인을 사랑해서 된 종입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에는 자유합니다. 오직 주인이신 예수님에게만 복종합니다. 종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종은 철저하게 주인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주님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헌데 왜 사람들이 교만해집니까?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종은 주인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예화)지난 화요일에 아침마당에서 의학전문기자인 홍혜걸씨의 건강 십계명이라는 강의가 있었습니다. 잘 들어보니 크리스챤임에 틀림없더라구요? 건강을 위해서 ①첫째가 좋은 공기를 많이 마시라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라는 것입니다. 등산이 좋다는 것입니다. ②또 물을 많이 마시라는 것입니다. ③-⑤그리고 칼슘(우유)과 단백질(육류와 콩, 계란흰자)과 오메가 3(등 푸른 생선, 견과류)를 많이 먹으라는 것입니다. 헌데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은혜로 받은 것들입니다. ⑩특히 10번째 건강수칙은 ‘영적 안정’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 가장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갖는 것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몰입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한 이유가 있습니다. 은혜로 살기 때문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 인도해 주시는 것, 모두가 은혜 아닙니까? 이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 걱정하고, 염려하면 되겠습니까?

바울이 끝까지 겸손의 자리에 머물러서 사역할 수 있었던 비밀은 그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철저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 주님이 주셨는데 뭘 자랑할게 있습니까? 주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사용하는데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종의 마음이 바울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2.둘째로 눈물의 사역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만 읽어 보아도 바울이 “눈물”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주님을 사랑하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얼마나 진실하게 사역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 31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 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들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한 사람 한 사람들을 가슴으로 품고 눈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20장 37절에서 사도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이 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모습을 보면 평소 이들이 어떤 관계였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것은 단순한 인간적인 관계 이상이었습니다. 이들은 돈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닙니다. 동료가 아니라 동지였습니다. 영원한 복음으로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예화)성령이 주시는 눈물에는 크나큰 능력이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깡패나 술주정뱅이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커늘 클라크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설교를 아주 잘하시기도 하지만 항상 눈물을 흘리며 설교하시는, 눈물이 많은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울보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한 번 설교하면 보통 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회심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클라크 목사님이 울보목사라는 별명이 부담되고 창피해서 하나님께 눈물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뒤 기도 응답으로 정말로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설교할 수 있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헌데 문제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에게 눈물이 사라짐과 동시에 죄인을 변화시키는 그의 능력까지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깡패와 술주정뱅이들이 변화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다시금 영혼에 대한 눈물을 주옵소서. 눈물과 함께 증언되는 말씀을 주옵소서.”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다시금 그에게 눈물을 주셨고, 능력도 회복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너무 사랑하니까 눈물이 납니다. 통곡이 없는 신학은 죽은 신학입니다. 눈물이 메마른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이 통곡의 벽이 이스라엘을 살린다고 합니다. 울 수 있는 민족이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가 소망이 있습니다. 영혼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 우리 목장 모임은 눈물이 있는 모임이 되기 바랍니다. 서로를 위해서 울어주는 목장이 되길 바랍니다. 힘겨워하는 성도들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함께 웃고 우는 미래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

예수님도 성경에 기록에 따르면 3번 우셨습니다. ①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우셨습니다. ②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어둠과 죽음이 점점 더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르고,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천년 만년 살 것처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셨습니다. ③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모진 고통 앞에서 우셨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위해서 나을 버리시고, 저들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울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죄짓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셨습니다.

바울도 서신서를 보면 3가지 경우에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십자가의 복음을 거역하고 있는 그 시대의 사람들 때문에 울었습니다(빌립보서 3:18). ②구원받지 못한 동족들과 친구, 친지들 때문에 울었습니다(로마서 9:1). 여러분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서 얼마나 우셨습니까? ③신앙인들이 마땅히 믿음의 자리를 지키고, 예수를 닮는데 까지 자라가야 하건만, 너무나 육신적이고, 이기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울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고후 2:4).

보십시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은 영혼들을 위해서 울었습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울었습니다. 사명 때문에 울었습니다. 너무 사랑해서 울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날마다 자라가야 할 성도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 죄악에 넘어지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 울었습니다. 참된 영성은 눈물의 영성입니다.(눈물의 영성이 엄마의 영성/하숙집 아주머니의 영성과는 다르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눈물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응답을 안 해주시더라구요? 그러다 오늘 새벽에 울었습니다. 내 자신 때문에 울었습니다. 부족해서 울었습니다. 감사해서 울었습니다. 일주일동안 준비한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제 밤 9시에 버렸습니다. 교회에서 밤을 새우며 다시 준비했습니다. ‘주님 저에게도 사도 바울과 같은 눈물을 주옵소서! 그래서 사도 바울을 넘어서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 울 수 있길 바랍니다. 이 시대에 믿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울 수 있길 바랍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여 잠 못 이루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안타까움에 울 수 있길 바랍니다. 교회를 위하여, 자녀들을 위하여 감사해서, 고마워서, 아파서 우는 눈물이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셋째로 바울은 소망으로 인내했습니다.

19절과 20절을 다시 한 번 보기 바랍니다. “ ”

 

바울의 일념은 오직 하나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지금 본문의 배경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과 에베소 성도들이 작별하는 내용입니다. 이들을 서로 끌어 안고 웁니다. 이제 다시는 바울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죽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려도 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24절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이렇게 말씀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였습니다. 말씀을 먼저 먹은 자였습니다. 말씀의 맛을 아는 사람이기에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영생케 하는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먹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말의 의미)

우리 나라처럼 먹는다는 것을 잘 사용하는 민족도 없습니다. 축구를 할 때 1-0으로 지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일대 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 골 먹었다고 합니다. 욕도 뭐라고 합니까? 욕 먹었다고 합니다. / 좋은 영화나 작품을 보면 감동 먹었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억울하게 당하면 뭐라고 합니까? 한 방 먹었다고 합니다.

헌데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할 때도 먹었다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3장에서 발견한 말씀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1절에는 “인자여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라고 합니다. 계시록 10:9에는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먹은 것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빼앗기지 않으려면 먹어버리면 됩니다. 먹으면 내 것이 됩니다.

말씀을 먹어야 가서 말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3:1은 “받아 먹으라 먹고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고 합니다. 내가 먹어야 다른 사람을 먹일 수 있습니다. 전하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내가 먹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어야 정복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0:9에는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먹었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신 분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떡을 찢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너희를 위하여 찢기는 내 몸이니라 받아 먹으라” 또 식사 후에 잔을 가지시고 포도주를 따라주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장 26-28절)” 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서)물 컵을 들고...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봅니다. 시각입니다. 허나 본다고 갈증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가까이 물 을 갖고 오면 출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청각입니다. 또 만질 수 있습니다. 촉각입니다. 그러나 보고 듣고 만진다고 해서 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원함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물을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됩니까? 예!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것이 됩니다. 마셔야 사는 것입니다. 말씀은 내가 먹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믿는다는 것은 하늘의 양식인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먹고 마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맛 본자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전하는데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인내했고, 한 사람이라도 더 이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의 승리는 말씀을 2년 동안 날마다 전하므로 그 말씀이 수 많은 사람들을 살게 했습니다. 모든 일에 겸손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훈계했습니다. 말씀을 맛보았기에 이 말씀을 위해서 생명도 내어주는 인내의 삶을 산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바울을 따라서 바울을 넘어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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