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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갈이 만난 하나님 | 이병수 목사 | 2010-09-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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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2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창세기 16:7-14 제목:하갈이 만난 하나님 “여호와는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하갈이 만난 하나님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갈이 누구입니까? 하갈은 애굽 사람으로 사라의 몸종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애굽으로 가면서 아브라함은 걱정입니다. 부인 사라를 얻으려고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까? 그래서 인간적인 꾀를 냅니다. 부인이라고 하지 말고, 누이동생이라고 하자! 아니나 다를까 애굽 왕 바로가 사라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기 위해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많은 예단을 보냅니다. 각종 진귀한 것들과, 짐승들 뿐 아니라, 남종들과 여종들도 주었습니다. 이 때 사라의 몸종으로 주었던 여인이 하갈입니다. 하갈은 애굽에서도 종이었습니다. 이제는 이방 여자인 사라의 몸종입니다. 어찌 보면 하갈의 운명도 불쌍한 삶입니다. 하갈의 불행한 삶은 아브라함과 사라로 인해서 계속됩니다. (문제는 사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두려워할 때마다 나타 나셔셔 약속을 주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핀 것처럼 여전히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에 분명한 증거도 주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헌데 이제 문제는 사라입니다. 사라가 증거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은혜받고 집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사라는 임신하지 못하는 현실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점점 더 늙어가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줄어갑니다. 사라는 속으로 두려워하길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는 것일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내하면 축복하신다고 하는데, 왜 나에게는 그런 일이 안 벌어지나? 신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다면 왜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면 도대체 내게 무슨 잘못이 있길래 아이가 없는 것일까?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결되는 것인가?’
인간적인 생각에 한 번 사로잡히면 헤쳐 나오기가 힘듭니다. 왜냐면 인간적인 생각은 마귀가 주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주는 육신의 생각은 그럴사 해 보입니다. 인간적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다고 확실하게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생각, 육신적인 생각은 결국 사망입니다. 사라의 인간적인 생각은 어디까지 가느냐?하면, ‘그래 남편인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는 아이면 되는 것 아닌가? 꼭 내가 낳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짜피 나는 아이 낳기는 틀렸고, 그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어, 내 자식처럼 키우면 되지 않나?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지! 이것처럼 현실적이고, 현명한 방법은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절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답답하기 때문에 만들어낸 인간적인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임신이 불가능하게 된 것은 결국 사라의 계획대로 하갈이 임신을 했습니다. 헌데 사라의 생각대로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갖고 했던 일은 생각지도 않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하갈은 임신을 하자 교만해졌습니다. 주인 사라를 멸시하길 시작합니다. 아마 하갈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아들만 낳으면 내가 낳은 아들이 모든 상속권을 갖게 된다. 그러면 나도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남자인 아브라함이 뭔가 약속을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갑자기 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사라가 가만히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하갈을 불러놓고 3자 대면을 합니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에게 주었더니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도대체 당신이 어떻게 처신한 거냐? 당신과 나 사이에 하나님이 판단하시길 원한다’고 화를 냅니다. (생각)보세요? 인간적인 생각대로 한 결과가 어떻습니까? 평화롭고 서로 사랑하던 부부관계가 깨지고, 부부싸움이 끊이질 않습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 후손(아랍의 후손들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사라가 낳은 이삭의 후손(이스라엘) 간에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분쟁과 전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다 사라가 인간적인 생각으로 행동한 결과들이었습니다.
이제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길 시작합니다. 결국 하갈이 사라를 피해서 도망을 칩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뛰쳐 나와 애굽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임신한 여인의 몸으로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광야 샘물 곁에서 기진맥진하여 쉬고 있을 바로 그 때 하나님이 하갈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 하갈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구체적으로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사라의 하나님인줄만 알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만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헌데 하갈에게도 찾아 오셨습니다. 하갈이 느낀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라의 하나님이신 줄만 알았는데... 나의 하나님도 되시는구나? 하나님은 지체 높은 주인님만의 하나님이신줄 알았는데, 미천한 종인 나의 하나님도 되시는구나! 얼마나 감격을 했겠습니까? (적용)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열등감을 갖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는 비교하기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잘나고, 똑똑하고, 성공한 사람만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못나고 부족하고 실패한 사람도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예화)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셨을 때는 대부분, 고개들 수 없고, 죄인이었을 때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백합니다. ‘나는 폭행자요 핍박자요 살인자였을 그 때에 주님은 나를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부자도 사랑하시고, 가난한 자도 사랑하십니다. 건강한 사람도 사랑하시고, 병든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큰 교회도 사랑하지만, 작은 교회도 사랑하십니다. 우리 교회도 사랑하시고, 옆에 있는 남부은샘 교회, 호산나교회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남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도 사랑하십니다.
8절입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묻지도 않았는데 다 알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께서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아십니다. 이 질문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성서의 예1)하나님은 아담에게도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원래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지 않느냐? 어떻게 된 것이냐? 진실로 회개하길 바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갈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갈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합니까? “나는 내 여주인 사라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동문서답하는 것을 봅니다. (질문의 의미) ①이 질문은 과거와 미래를 묻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느냐?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 왔느냐? 너가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과거를 뒤돌아 보면 부끄러움뿐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과 생각을 스크린으로 재생해서 본다면 고개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무엇을 위해서 살아갈 것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적용)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지금까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 오셨습니까? 아니 앞으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앞으로 무엇을 위해서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섬기시겠습니까? (예화)한 성도가 보낸 문자 :“목사님, 사는게 정말 힘드네요. 근데 제가 뭘 위해서 이렇게 지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걸까요? 가끔은 현실에, 현상 때문에 저 자신의 본질을 잊는 것 같아 너무 속상해요.” 하갈의 대답은 ‘난 지금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할 지는 모르겠다? 그런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②또한 이 질문은 본질적인 것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묻습니다. “너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서 살다가, 어디로 갈 것이냐?” 우리는 지금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딘론가 달려가긴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가고 있습니다. (예화)고대 로마의 한 대학 정문에 “그리고 그 다음에는-After that, What?”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 간판의 유래는 한 가난한 대학생이 많은 장학 사업을 하는 그리스도인 귀족 할머니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만일 장학금을 주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 할머니가 다시 묻습니다. ‘그 다음에는?’ 졸업을 하여 법률가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억울한 사람들을 변호하며 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장가들어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행복한 가정도 이루겠습니다. / ‘그 다음에는?’ 늙으면 대학도 세우고 좋은 인재를 양육하겠습니다. 할머니처럼요? /‘그 다음에는?’ 자꾸 묻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죽겠지요?’ / 그러자 할머니는 다시 ‘그 다음에는?’/ 그러자 학생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생각도 해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호통을 치며 말을 합니다. ‘나는 인생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투자하고 싶은 생각이 없네! 그 문제를 해결하고 오면 자네를 돕겠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학생은 묻습니다. ‘그러면 그 문제를 어디서 해결하고 와야 합니까?’ 할머니는 ‘성경을 읽어보게, 아니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청하면 될걸세’ (적용) 요즘은 워낙 심각한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정말 여러분들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지금 죽으신다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14절에서 하갈은 하나님을 만난 그곳을 브엘 라해 로이라고 했습니다. 두 글자씩 끊어서 읽으면 됩니다. 브엘=샘물, 라해=생존하시는 자/살아 있는 분, 로이=나를 보신다.라는 것입니다. “생존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라해 로이=여호와 로이라는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가?하면 시편 23편 1절입니다. 무엇이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여호와 로이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로이가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라는 말입니다.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과 하갈이 고백한 하나님이 같습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나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 그러면 선한 목자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①목자는 늘 양을 살핍니다. 양은 자기 보호능력이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목자가 필요합니다. 한시도 살피지 않으면 양은 살 수 없습니다. 또 목자는 양의 형편과 이름을 아십니다. ②또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십니다. ③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홀로 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십니다. ④해를 받지 않도록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보호하십니다. ⑤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고,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무엇을 살피십니까?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하갈의 고백입니다. 하갈의 고통은 무엇입니까?) 하갈은 결국 우리나라로 말하면 씨받이입니다. 이용만 당한 것입니다. 자신의 초라함을 절실히 느꼈을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면 자신의 인생에도 빛살이 비쳐질 줄 알았는데, 꿈이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버림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사라의 학대로 인한 아픔이 있습니다. 도망을 쳤으나 갈 곳이 없습니다. 도와주는 사람도 하나 없습니다. 완전히 혼자입니다. 태중에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몸은 천근 만근 피곤한 상태입니다. 바로 이 때에 하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갈을 만나 주셨습니다. 하갈의 고통과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은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네 씨를 번성하게 하겠다.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이 많게 하겠다.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살피시고, 진정으로 위로해 주시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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