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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사라 이병수목사 201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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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8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창세기 23:1

제목:아름다운 사람 사라

사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인간관계의 가장 핵심은 부부관계일 것입니다. 이 부부관계는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 가정을 이루어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을 세워가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헌데 악한 마귀가 가장 먼저 부부관계를 공격했습니다. 부부관계를 깨뜨렸습니다. 우리 나라의 불명예 가운데 자살공화국, 고발공화국, 이혼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헌데 이 불명예의 가장 주된 원인은 부부관계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하나님의 나라와 아름다움, 가정, 질서를 깨뜨리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부부관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부부관계는 출발입니다. 부부관계를 포함해서 모든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악한 마귀의 역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두 부부의 유형이 나옵니다.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보여주는 커플로 구약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부부입니다. 신약에서는 단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들 수 있습니다.(서로 격려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함께 수고하는 아름다운 부부입니다.)

반대로 가장 아름답지 않은 부부로는 구약에 아합왕과 이세벨부부입니다. 신약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입니다.(서로 꾀하여 악을 행하는 악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었던 아브라함과 사라부부, 브리스길라과 아굴라부부에게는 위기가 없었겠습니까?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영화배우들에게 부부란? 결혼생활이란 뭐냐고 물었습니다. ‘희극과 비극이 수없이 교차하는 연극이라’고 했습니다. / 군인들에게 부부란? ‘30년 전쟁터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 일기예보통보관은 부부란? ‘맑았다 흐렸다, 비왔다 눈왔다 비바람쳤다 잔잔해졌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 사업가는 ‘아주 위험한 투자다. 아주 위험한 투자!’라고 할 만큼 부부관계, 결혼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꼭 부부관계만이겠습니까? 부모자식간의 관계, 친척들과의 관계, 시댁과 처가식구들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성도들과의 관계, 직장동료들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등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갈등과 위기는 있습니다. 헌데 갈등과 위기를 극복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그냥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누릴수 있을까?하는 것을 살펴 보기 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를 통해서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성경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헌데 어떤 여인도 얼마나 살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유일하게 사라만 몇해를 살다 죽었다고 기록된 유일한 여인이었습니다. 이유는 약속의 자녀를 낳은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성경에 보면 사라가 큰일을 했다거나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사라는 한 남자에게 시집가서 아이 낳고 키우다 죽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말은 아주 평범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전당인 히브리서 11장에서 사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사라는 불임으로 고생했는데, 결국 임신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불임으로 고통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았다는 경우는 사라말고도 많습니다. 사라의 삶이 결코 특별하거나 대단한 삶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사라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몫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사라의 일생은 남편과 자식만을 위해서 살다가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하게 산 것입니다. 헌데 지극히 평범하게 산 삶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었기에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들이 얼마나 큰 일을 했느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시기 보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았느냐?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부르신 자리는 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다니엘과 에스겔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바벨론 포로시대에 두 사람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었습니다. 헌데 다니엘은 왕국에서 총리로서 화려하고 편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에 에스겔은 강제 노역하는 그발강가에서 포로들과 함께 고생하면서 비참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들이 서로를 비난했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 이거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왜 나에게는 이런 고통스럽고 힘든 자리로 인도하십니까?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왕궁에서 바벨론의 고위직의 사람들과 교제를 하면서 삶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며 선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또한 에스겔은 고통받는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일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인내하도록 격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는 다니엘만 필요합니까? 아닙니다. 에스겔만 필요합니까? 아닙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꿋꿋히 살아내는 사람이 귀한 사람인 것입니다.

 

(성서의 예1)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된 삶을 산 사람이 마리아일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어떻게 살았길래 영광된 삶을 산 여인입니까? 마리아는 예수를 임신했고, 해산하여 키웠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까지 돌보고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오직 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뿐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삶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가장 영광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예2)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헌데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죽은 자도 살려내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많은 일들을 해 주시길 기대했습니다. 왕이 되시길 바랬습니다. 더 많은 기적들을 행하길 원했습니다. 더 큰 능력을 나타내 주시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가지에 집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하나님이 이루시길 원하는 일 곧 십자가를 지는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사라가 아름답고 현숙한 여인의 삶을 산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내조가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래도 이만큼 목회를 할 수 이Tt는 것은 사모의 내조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야 목회한다고 설교 준비한다고 목양실에 와 있으면 그만이지만, 집에서 세 아이들 뒷바라지 다 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얘들이 잘 먹는지... 매번 간식 챙겨야지요. 세끼 밥 챙겨야지요. 아직 한 아이도 학원엘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애들 다 공부 가르쳐야 합니다. 자기 자식을 가르치는 것처럼 힘든 것이 없다는 것 아시지요? 매일 청소하고, 빨래해야 합니다. 가사 일은 정말 끝이 없습니다. 또 며느리 노릇해야지요, 목회도 합니다. 같이 심방하고, 늘 같이 기도하고, 전도합니다.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내가 아내 없이 살 수 있을까? 못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내를 띄워주어야만 하는 제 입장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으로 보상할 수 없기에 이렇게 합니다.

고생많다고 하면 아내는 그렇니다. 두 번은 사모 안하겠 답니다. 절대로 저와 다시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것이랍니다. 이해합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저는 살아주는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아내가 대단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자리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2)둘째로 아름다운 관계를 위해서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라가 직접 말씀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남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남편을 믿고 따라주었습니다. 그림자처럼 함께 하면서 섬겨주었습니다.

리차드 스트라우스는 참 사랑의 이야기라는 책에서 사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사라는 연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결단력이 없는 여인도 아니었다. 의타심이 있거나 머리가 텅 빈 여자도 아니었다. 사라는 지적이며 격조높은 교육을 받았고, 미모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인격과 우아한 몸가짐까지 갖춘 훌륭한 여인이었다. 사라는 어느 날 남편 아브라함에게 떨어진 말씀에 순종했고, 남편과 한결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함께 했다. 남편을 늘 주라고 부르며 순종했다. 남편이 철없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할 때도 믿음으로 따라주었다.’고 했습니다.

 

①어느 날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내일 출발이다라고 했을 때 사라의 나이가 65세입니다. 이 때에 나는 못간다. 갈려면 혼자 가라!했다고 해 보십시오. 가정이 깨지는 주된 원인이 기러기 가족아닙니까? 우선순위가 바뀌어서 남편은 홀로 남아서 돈을 벌고, 아내와 자녀들은 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갑니다. 떠나려면 함께 떠나야 합니다. 서로 헤어져 사니 얼마나 틈이 많습니까? 자녀보다 남편과 아내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사라는 65세에 따라나서서 126세에 죽었으니 62년을 동행했습니다. 함께 했습니다. 아름답지요?

②또 여성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갑자기 손님들을 몰고 들어오는 남편 아닙니까? 어느날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손님들을 집안으로 모셔 들이고, 사라에게 고운 가루 20kg 한부대를 주면서 빵을 만들라고 합니다. 아니 말만하면 음식이 그냥 나옵니까? 찬거리도 하나 없는데 아랑곳 하지 않고 손님들을 몰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손님 치루는 것이 쉽습니까? 자기야 와서 선심 쓰면 되지만 뒷바라지 하는 아내는 고생입니다. 그래도 사라는 기쁘게 잘 대접을 합니다.

③사라는 조카도 키웠습니다. 롯의 아버지가 일찍 죽자 큰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롯을 맡아 키웁니다. 아들처럼 키웠습니다. 남의 자식을 뒷바라지 한다는 것이 쉽습니까? 아브라함이야 데려다 놓으면 되지만, 뒷바라지는 누가 합니까? 사라 몫입니다. 그렇게 뒷바라지를 해서 키웠줬으면 됐지!! 뭐??? 재산--- 재산---

롯도 양심이 있으면 재산은 양보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헌데 아브라함은 롯을 분가시키면서 원하는 대로 재산을 주고, 좋은 땅은 다 양보를 합니다. 사라 입장에서 보면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욕심도 없냐? 내가 이런 남편을 믿고 어떻게 사냐?했으면 가정이 온전하겠습니까?

거기다가 롯을 구하겠다고 전쟁에 나갑니다. 남편이 죽으면 사라는 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라는 남편의 결정에 따라줍니다. 사네 못사네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④정말 어처구니 없는 것은 남편이란 작자가 자기 살겠다고 애굽왕 앞에서, 아비멜렉 왕에게 첩으로 내줍니다. 정말 남편답지 못하지 않습니까? 이쯤 되면 무시할 수도 있는데 사라는 한결같이 남편을 부를 때 “주”라고 높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은 남편으로서는 빵점입니다. 그래도 사라는 남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⑤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에도 사라는 아무 표현이 없습니다. 남편이 이삭을 데리고 갈 때는 몰랐다고 해도 돌아와서 사실을 다알고 나면 남편을 가만둘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 일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사라는 철저하게 아브라함의 권위에 순종합니다. 믿고 따릅니다. 사라는 남편을 주를 섬기듯 섬겼습니다. 사라가 바보라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몸가짐을 바로 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6절에서는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적용)경제력도 없는 남편, 능력도 없는 남편, 인격적으로 부족한 남편이라도 절대로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기면 안됩니다. 왜냐면 그는 나를 단련하시기위해서 하나님이 붙여주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사람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부모님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담임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은 내 영혼을 수종들도록 하나님이 내게 붙여주신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대단한 인생을 산 여인이 아닙니다.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삶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한 것은 곧 남편이 믿는 하나님에게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시대에 사라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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