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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의 사랑과 믿음 | 이병수목사 | 2010-12-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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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5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창세기 23:2-9 제목:아브라함의 사랑과 믿음 아브라함에게 사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단순히 아내만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동반자였습니다. 인생 상담자였습니다. 늘 곁에서 도와주는 조력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이였습니다. 또 친구였습니다. 낯선 땅,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이기에 아브라함에게 사라는 전부인 사람이었습니다. 헌데 평생을 함께 했던 아내 사라가 임종을 맞아 싸늘한 시체가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사라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라는 대단한 삶을 산 것이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 남편의 아내로,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맡겨진 삶을 살다 간 여인이었습니다. 또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라의 순종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없었습니다. 사라가 생각이 없는 바보여서 남편에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 능력이 없어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 아브라함이 어리석고 말도 안되는 일을 저질렀을 때에도 믿고 따라주었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삶의 자리이기에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사라도 죽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걸어가는 길로 갔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다간 사라를 위해서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사랑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아름다운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1)첫째로 진심으로 울어주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2절입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애통하다가” 아브라함이 애통한 것은 더 사랑하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점 잡힌 남자입니다. 그런데도 사라는 주님께 하듯 남편을 섬겨 주었습니다. (예)사랑의 완성/ 성숙한 사랑은 진심으로 미안함을 갖는 것입니다. 장로님들을 보면 ‘나 만나서 정말 고생 많지요? 나 안 만났으면 편히 잘 살았을텐데...’라며 미안해 합니다. 철이 드신 것입니다. 헌데 젊은 커플들은 어떻습니까? 서로 자기 잘났다고 합니다. ‘데리고 사는 걸 고마운줄 알어! 나 만난 것을 복으로 알고 살어. 나 같은 사람 또 어디 있는 줄 알어!’ 아직 철이 안 들어서 그렇습니다. 정말 사랑하면 더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건강이 있을 때, 사랑할 수 있을 때, 정신이 온전할 때 더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은 ‘더 사랑하지 못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죽으면서 ‘그 때 그 땅을 사야했는데... 아깝다. / 10억은 모으고 죽어야 하는데...’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예)일본의 호스피스 전문가인 오츠 슈이치는 1000명이 넘는 말기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깨달았던 것을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라는 책으로 냈습니다. 그 내용들 중에 단연 처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이라고 했습니다. 고맙다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말을 왜 못했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과 인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조금만 더 진실했더라면, 조금만 더 친절했더라면... / 내 장례식을 미리 생각했더라면... 다시 말해서 죽음을 생각했더라면... / 마지막이 신의 가르침을 받았더라면... 신앙을 갖았더라면... 죽는 순간 좀 덜 두려울 텐데...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애통은 아무리 울어도 돌아오지 않는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죽음 앞에서 애통해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 죽음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로마서 6장 23절을 보면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근본적인 목적은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헌데 죄가 우리들의 행복을 앗아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버리신 적도 없습니다. 헌데 그렇게 느끼게 하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짙은 먹구름 같은 것이 죄입니다. 태양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헌데 죄의 먹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태양은 찬란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죄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불행은 환경이 아닙니다. 부자라서 행복하고, 가난해서 불행한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행불행은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의 행불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죄입니다. 이 죄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죽음, 병, 고통, 절망, 두려움, 외로움, 갈등의 원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타고난 죄인입니다. 죄짓는 것은 타고나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죄를 잘 짓습니다. 이 타고난 죄가 원죄입니다. 헌데 우리는 죄를 짓기는 잘하는데, 죄를 해결할 능력은 없습니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이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왜 예수님을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시느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니까라고 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해...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하기로 했어... 그래서 포기할 수 없어... 너는 내 자식이잖아 자식 포기하는 부모봤어!!!” 그러므로 우리는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면 하면 모든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죄가 가져온 죽음, 저주, 두려움, 고통, 미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서 고통하는 인간들... 죽음 앞에서 슬피 울고 있는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58절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벌이 쏘듯이)이 어디 있느냐 /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제 하나님께서 사망케 하는 모든 것들을 다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망 앞에서 울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사랑이 있습니다. 실패, 아픔, 고통, 죽음 앞에서 울지 말고 선포하십시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는 졌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김으로 우리도 이기었다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2)둘째로 사라를 향한 아브라함의 사랑은 막벨라 굴을 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시신 앞에서 통곡하다가 3절입니다.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브라함은 불현 듯 생각이 났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매장할 땅 한 평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헷 족속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합니다. 4절입니다. “ ” 그러자 헷 족속이 대답하기를 6절입니다. “ ” 헷 족속의 사람들은 흔쾌히 땅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땅을 거져 받을 수 있으나 굳이 값을 치루고 삽니다. 아브라함이 사기를 원한 땅은 막벨라 굴입니다. 헌데 에브론은 동굴 하나에 은 사백세겔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바가지입니다. 밭 귀퉁이에 있는 동굴입니다. 40세겔도 비싼 것입니다. 아니 4세겔만 줘도 되는 땅입니다. 헌데 400세겔을 부릅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무 말 없이 은 400세겔이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막벨라 굴을 삽니다. ①이것은 사라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얼마든지 공짜로 막벨라 굴을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묻힐 곳을 공짜로 얻어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은혜를 공짜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공짜와 은혜는 다릅니다. 공짜는 값을 지불하지 않고 받는 것입니다. 은혜도 값없이 받지만, 그 값은 하나님이 대신 치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있습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교회만이 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만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구원입니다. 죄 때문에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모든 죄 값을 대신 치러주셔서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셋째로 추악하고 연약한 우리를 의롭다 해 주신 것입니다. ⒟넷째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육신은 한번은 죽습니다. 그러나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다섯째로 천국을 유업으로 얻습니다. 이 땅에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다면 천국에서 모두 함께 드리는 예배는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 이 땅의 아름다운 곳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 좋다! 천국이 따로 없네! 합니다. 이 땅도 그렇게 아름다운데 새 하늘과 새 땅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 이 땅에 맛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땅의 것들도 맛있는데, 천국에서 먹는 음식은 얼마나 맛있겠습니까? / 이 땅에서도 즐거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물며 천국은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고 고통하는 것도 없는 곳이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지금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기다려주시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모든 것이 공평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을 주셔서 갈길을 인도하시고, 이 땅을 사는 동안 고아처럼 홀로두지 않으시고,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이 대신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불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은혜는 예수님께서 아주 값비싸게 대가를 지불하셔서 우리는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절대로 공짜가 아닙니다.
후에 막벨라 굴에는 아브라함도 묻힙니다. 아들 이삭과 리브가도 막벨라 굴에 묻힙니다. 손자인 야곱과 레아도 그곳에 묻힙니다. 보세요. 아브라함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한 막벨라 굴에 그의 후손들은 값없이 묻힙니다.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을 지불해 주셨기에 우리는 값없이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②그러면 우리는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은혜는 은혜로 갚아야 합니다. 앞의 은혜는 하나님의 주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는 우리는 자원하는 헌신으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습니다. 10억이라고 하겠습니다. 헌데 값을 능력이 없어서 왕이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헌데 그가 왕에게 큰 은혜를 받고 나가던 길에 자신에게 100만원 빌려간 사람을 만납니다. 왜 빚을 안 갚느냐고 호통을 치자 그도 갚을 능력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를 잡아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둬버립니다. 이것을 왕이 알게 된 것입니다. 왕은 신하들을 시켜서 그를 잡아 오게 합니다. 그리고 네가 사정하여 10억을 탕감해 주었거든 그렇게 큰 은혜를 받고서도 넌 100만원도 용서를 못하느냐? 이 악한 자를 옥에 가두어 슬피 울게 하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값을 지불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적용) 중요한 신앙원리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짜로 얻은 것은 소중함을 모릅니다. 요즘 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공짜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대형교회에서 부담 없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좋은 신앙성장 프로그램이 있고, 시설이 편리하게 구비되어 있고, 좋은 목사님의 설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위험한 함정이 하나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예)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이며 신약학자인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마지막 작품이 제자도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88세때 마지막으로 쓴 책입니다. 이 책에서 믿음의 후배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면 거룩한 것을 위해서 기꺼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한 사도바울이 있었기에 유럽으로 복음이 전해졌고, 값비싼 대가를 지불한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아시아에 복음이 전해졌고,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묻힌 사람들의 값비싼 대가가 있었기에 한국교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므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③또한 막벨라 굴을 샀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막벨라 굴은 무덤입니다. 무덤은 인간의 끝입니다. 오메가입니다. 허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입니다. 무덤은 모든 인간의 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새로운 시작에 불과합니다. (예1)예수님의 무덤가에서 여인들은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절망하던 사람들이 소망을 얻었습니다. 슬픔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기쁨을 얻었습니다. 두려움 속에 있던 사람들이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의심과 회의 속에 있는 사람들이 확신 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예2)또한 살아 가다보면 막벨라 굴에 갇히는 것과 같은 고난이 있습니다. 다윗에게 아둠람 동굴은 절망의 자리였습니다. 도망쳐서 숨어 들어온 곳이 아둠람 동굴입니다. 헌데 이곳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자 아둠람 동굴은 다윗의 왕조가 세워지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절망의 끝자리가 회복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예3)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손발을 묶고 있던 착고가 끊어지는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적용)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지금의 자리가 막벨라 굴입니까? 한계에 이르렀습니까? 다 포기하고 싶습니까? 절망적입니까? 너무 힘이 드십니까?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겸손히 무릎을 꿇으십시오. 경건의 대가를 지불하십시오. 죽을 각오를 하고 부르짖어 보십시오. 깨끗이 항복하십시오. 그리고 은혜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보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이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간섭해 주실 것입니다. 인간의 끝인 그곳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시작이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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