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택자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 | 이병수모가 | 2011-02-13 | |||
|
|||||
|
2011년 2월 13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창세기 26:12-25 제목:택자가 살아야 할 마땅한 삶 창세기 26장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1)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한 땅에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내려가는 신앙은 안됩니다. (2)헌데 지금 이삭은 그랄에 있습니다. 그랄은 회색지대, 중간지대입니다. 헌데 하나님은 그랄에서도 복을 주셨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택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상 포기하지 않으시고, 후회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인도하셔서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기에 책임을 지신다는 것입니다. (3)그렇다고 계속 그랄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날마다 날마다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믿음이 자라가야 합니다. (4)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는 택함 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택한 받은 사람은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향은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①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②또 하나는 자기 유익을 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어떤 길을 걸어야 합니까?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화) 작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쥐식빵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작년 10월에 김씨는 뚜레쥬르 평택 송북점을 인수하고 리모델링해서 17일 문을 열었습니다. 김씨가 2008년부터 2년간 제빵기사로 일하던 빵집이었습니다. "직접 운영해 보라"는 주인의 권유로 가게를 인수했습니다. 월 150만원 임대료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장사가 괜찮았지만 경쟁 가게 장사를 못하게 하면 더 돈을 빨리 모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빵 배달을 갔다가 빵집 맞은편 주점 주차장에서 죽은 쥐를 발견하고 '쥐 식빵' 아이디어가 떠올라 보관했습니다" 제빵기사가 퇴근하고 나서 김씨는 옥수수 식빵을 만드는 틀에 밤 식빵 재료와 쥐 사체를 넣고 빵을 구웠습니다. 그리고 10살 난 아들에게 1만원을 주고 인근의 경쟁 빵집인 파리바게뜨에 가서 밤 식빵을 사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는 "파리바게뜨 빵이라고 밝히기 위해 영수증과 (파리바게뜨) 비닐봉투가 필요했습니다." 아들과 귀가했다가 새벽에 혼자 빵집에 가서 '쥐 식빵'을 갖고 집으로 가서 거실 바닥에 파리바게뜨 영수증과 봉투를 옆에 놓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인근 PC방에 가서 '쥐 식빵' 글과 사진을 올렸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식결과 김씨가 '쥐 식빵'을 직접 구운 것으로 나왔다. 12월 23일 빵에서 쥐가 나왔다는 글과 사진이 인터넷에 떠오르자 파리바게뜨 2600개 가맹점엔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한 가맹점엔 크리스마스 케이크 78개를 단체 주문했던 손님이 찾아와 예약 취소를 요구했습니다. 파리바게뜨는 "1년 중 매출액이 가장 높은 시즌이 통째로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또 김씨가 속한 뚜레쥬르도 큰 피해를 본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보세요. 장사가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헌데 욕심에 눈이 멀어서 자기 유익만을 구했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상대회사에도 큰 피해를 주고, 결국은 자신도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습니다. 세상은 남이 잘되면 싫어합니다. 남들이 앞서가면 질투합니다. 어떻게든지 끌어 내릴려고 합니다. 시기심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왜 이럴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죄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서 타락하므로 서로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고, 자기 이익만을 구하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화)낙시꾼들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월척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낚시를 갔습니다. 이틀을 잡아도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헌데 옆에 있던 낙시꾼이 큰 월척을 잡았습니다. 얼마나 물고기가 크고 힘이 좋은지 20여분을 싸웠습니다. 결국 큰 물고기를 잡아 끌어올리는데 그만 실수를 해서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이 사람은 “이---야”하면서 너무 너무 좋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콧노래를 부르며 집에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마음입니다. 내가 월척을 잡지 못하는 것보다 남이 월척을 잡지 못하는 것이 더 기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악 때문입니다. 헌데 오늘 본문에 이삭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택한 받은 신자의 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삭이 그랄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100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를 합니다. ①블레셋 왕인 아비멜렉이 찾아와서 네가 우리보다 더 크고 강해졌으니 우리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농사 잘되는 땅을 내놓고 다른 데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 곳을 떠납니다. ②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나왔습니다. 사막에서 물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중동지역은 기름 값 보다 물 값이 더 비싸다고 합니다. 그렇게 귀한 것이 물입니다. 헌데 그랄 사람들이 그 우물을 쓰지 못하도록 메워버렸습니다. ③그래서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팠습니다. 물을 얻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랄 목자들이 와서 이삭의 목자들과 다툽니다. 이 우물은 우리 땅에서 난 것이니 우리 것이라는 것입니다. ④이삭은 다시 다른 데로 갑니다. 다른 곳에 옮겨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투었습니다. ⑤그러자 이삭은 또 다른 곳으로 갑니다. 그랬더니 더 이상 다툼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삭은 다섯 번이나 양보를 합니다. 다섯 번이나 손해를 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정말 바보 같습니다. 어떻게 매번 당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택함 받은 자의 마땅한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적용) 어떻습니까? 이삭처럼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그렇게 못 살 것입니다. 미쳤다고, 매번 당하고만 있습니까? 세상에서 이삭처럼 하면 계속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습게 보고 매번 피해를 줄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합니까? /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습게 보이지 않도록 똑부러지게 살라는 것입니다. (예화)혹시 여러분 욕망의 불꽃이란 드라마를 보십니까? 저는 경건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보지는 않습니다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윤나영의 대사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언니에게 ‘가족! 자식! 다 필요 없어! 어짜피 혼자야! 내가 바보처럼 살라고 했어. 내가 희생해달라고 했어. 내가 갖지 못하면 다 뺏기는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빼았을거야.’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자들은 왜 이삭이 보여준 길을 가야 합니까? 이길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까? 왜 택함 받은 사람들은 양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까? (1)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미움과 다툼, 시기 질투, 증오, 욕심, 수 많은 죄악들을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선택하신 길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자입니다. 죄지은 사람들을 그냥 심판해 버리면 됩니다. 헌데 하나님은 사람들을 살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대신 죽였습니다. / 세상에 신자들을 위해서 신이 죽어주는 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기독교에만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식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희생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욕심대로 살지 말고, 남들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럽니다. ‘십자가의 길은 너무 어렵다.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 진부하다. 요즘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십자가, 사랑 대신에 말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예화)정의라는 말이 유명하게 된 이유는 최근에 베스트 셀러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권리, 공평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헌데 문제는 공평한 권리가 서로 충돌할 때입니다. 서로 주장하는 권리가 다 맞아요. 양쪽 주장이 다 맞아요. 서로의 권리가 서로 부딪힐 때 어떻게 해야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서로 주장하는 권리가 부딪힐 때 ①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의 판결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법적인 소송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실예)재산을 갖고 서로 다투는 형제가 있습니다. 결국 해결되지 않아서 법적인 싸움으로 갑니다. 생각해 보세요. 법으로 해결하고 나면 행복한 가정, 화목한 형제들이 될까요? 아닙니다. 법적으로 해결하고 나면 관계는 깨지는 것입니다. (예)바리새인들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판단하는 것입닏니다.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반드시 돌로 때려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법으로 하면 문제는 해결할지 모르지만, 많은 후유증이 남습니다. ②또 하나의 해결책이 있는데, ‘도덕’이라는 것입니다. 양심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도덕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입니다. 도덕적인 해결은 쉽게 말하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법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서로 상처만 남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군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법적으로 재산 갖고 싸운던 형제들이 부모님들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니면 어떤 계기가 있어서 깨닫고, 이렇게까지 하면 되나? 다투지 말자. 내가 조금 양보하자. 내가 조금 손해를 보자. 그러면 법으로 하지 않고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헌데 결국 이런 삶은 누가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택함 받은 사람들이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가 무엇입니까? 사랑이 무엇입니까? 이번 소말리아 해적들에 대한 보도기사를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슬람을 종교로 갖고 있습니다. 헌데 해경 관계자는 “중범죄를 저지른 해적들이지만 인도적, 인권적 차원에서 이슬람 종교 활동을 하도록 배려했다.” / 뿐만 아니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 교리에 따라 돼지고기를 주지 않고 쌀밥과 수프, 카레, 소고기 등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서 메카를 향해서 하루 5번씩 기도하고, 철저히 돼지고기는 먹지 않으면서 어떻게 해적질을 하고, 사람을 향해서 무차별 총을 난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들에게 믿음이란 무엇이고, 정의란 무엇이고, 사랑이란 무엇인지? / 헌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주일마다 교회엔 가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는 하면서도 삶은 양보할 줄도 모르고, 용서할 줄도 모르고, 희생할 줄도 모르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한다면 소말리아 해적들의 신앙과 다를게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믿는 자처럼 행동하면서 막상 집에서나 직장에서는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저들이 얼마나 웃겠습니까? 결국 이 책에서는 정확히 정의가 실현되는 길이 무엇인지? 밝히지 못했지만, 참된 정의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참된 정의는 사랑입니다. (예화)못된 자녀가 있습니다. 나쁜 자식입니다. 그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정죄하고 버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더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고 지고 져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어머니의 정의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정의는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살리는 것입니다. (2)그러면 지기의 유익보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산 아브라함과 이삭이 망했습니까? 가난하게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이들은 지고도 이겼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져주었지만,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삭이 바보였습니까? 이삭이 지혜가 없어서 이렇게 지고만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졌는데 이겼습니다. 그러면 시기, 질투, 욕심으로 살지 않고, 양보하며 남의 유익을 구한 이삭이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①르호봇의 복을 받았습니다. 르호봇이라는 말은 5번째로 쫓기고 쫓겨서 얻은 우물 이름입니다. 뜻은 ‘장소가 넓다’는 것입니다. 상황 상황은 손해 본 것 같고, 뺏긴 것 같았는데, 하나님은 결국 더 넓고 비옥한 땅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랄 사람들의 공격이 없었다면, 미움과 시기와 질투를 받지 않았다면 그랄에 계속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헌데 어려움 때문에 옮기고 옮겨서 결국 가나안 땅을 향해서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다보니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된 것입니다. ②또한 아비멜렉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비멜렉은 블레셋의 왕입니다. 불신자인 아비멜렉이 이삭을 가만히 보니까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결국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아비멜렉 왕의 일행)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We saw clearly that The LORD was with you.)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절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지금까지 우리가 못되게 군것이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것은 불신자가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택함을 받은 자 이삭을 가만히 보니까 손해보고, 양보하고, 늘 당하는 것만 같은데... 갈수록 잘되고, 도대체 무슨 빽이 있어서 저렇게 잘될까? 가만히 보니까?알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적용)우리도 이런 고백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③아울러 영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요? 우물을 파면 물이 나왔습니다. 보세요. 어디에 있느냐?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땅에서 쫓겨 났지만 불모지 같은 땅이라도 하나님을 모시고 함께 하니, 그곳이 좋은 땅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물이 솟아났습니다. 아!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함이 힘이구나! 깨달은 것입니다. -또 당장 손해를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갔을 때 결국은 승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프고 쓰지만, 결국은 약이 되고, 꿀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랄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옮기고 옮기다 보니 결국 그랄을 떠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까이 더 가까이 오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브엘세바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23-24절입니다. “이삭이 거기서부터(르호봇에서)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어떤 밤입니까? 르호봇은 넓은 땅입니다. 아주 좋은 땅입니다. 더 이상 공격도 없는 땅입니다. 헌데 이삭은 그 땅을 떠나 브엘세바로 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제 이삭은 알게 된 것입니다. “애굽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 좋은 곳이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되는거구나! 그래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 거기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거고, 그러면 절대로 안 죽을 것이다. 흉년이 문제가 아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브엘세바로 올라간 것입니다. 브엘세바에 이르렀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우물을 파놓았더니 빼앗기고, 손해보고, 시기를 받고, 다투기 싫어서 양보하고 옮기고 옮겨 왔더니 결국은 브엘세바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아들 이삭도 다시금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브엘세바라는 뜻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적용)하나님께서 결국은 우리들이 이렇게 고백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평생 살아온 길! 뒤를 돌아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라는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인생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택자들은 가야 할 길입니다. 한번 있는 자리에서 자기 유익보다 먼저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 보십시오.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 시기하고 경쟁하고, 질투하고, 다투는 삶을 살지 마십시오. 이런 삶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삶입니다.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믿음도 자라게 하시고, 르호봇과 브엘세바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