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반응 | 이병수목사 | 2011-04-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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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0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창세기 28:15-22 제목:야곱의 반응 1.야곱이 만난 하나님 야곱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현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살해 장소는 아무도 없는 빈들이었습니다. 가인은 그 빈들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생 아벨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가인의 눈을 멀게 해서 거기에 현존하고 계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던 다윗이 자신의 침실에서 남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그 순간 다윗은 성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침실 안에도 현존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현존하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동아리의 색깔이 어떠냐?를 판가름할 때 극과 극에 있는 두 동아리가 있었습니다. 극과 극에 있는 두 동아리가 기준이 되어서 이 동아리는 어디 색깔을 갖고 있느냐?가 확인했습니다. 하나는 시내산 기도회였습니다. 제목에서 풍기듯이 오직 기도파 동아리입니다. 매일 새벽, 저녁시간에 주기철목사 순교기념비 밑에 모여서 기도하고, 자주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심하게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험 당일에도 책상에 앉아 공부하기 보다, 기도실에 가서 한 시간, 두 시간씩 기도를 하고 시험을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동아리는 현대신학 연구회였습니다. 이들은 기도보다 신학서적을 읽고 논쟁하고 현실에 대해 비판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내산 기도회가 영성에 몰입을 한다면 현대신학 연구회는 지성에 몰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공격을 했습니다. 기도만 한다고 되느냐? 머리는 텅 비고, 가슴만 뜨겁다고 되느냐? 또 시내산 사람들은 머리만 키우는 자들... 성령의 능력 없이 어떻게 목회를 하느냐? 능력 없는 신학이 무슨 소용이냐?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약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도원이나 기도실에 가야만 만나는 하나님이라고 믿는 시내산 사람들/ 그래서 도서관이나 강의실에서의 삶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도 문제요,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구별된 삶을 살지 않고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현신 사람들 모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어느 쪽이었냐? 시내산이 0이고, 현신이 10이라면 저는 6에 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목회를 할 때는 시내산 쪽에 더 가까이 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학생 시절에는 현신 쪽에 더 가까이 가서 공부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울리기는 현신 사람들하고 더 어울렸습니다.
참 믿음이란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는 이 곳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집 안방 / 거실 / 침실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말 한 마디, 계획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마다 출근하여 일하는 일터에도 하나님은 현존하고 계십니다. 짙게 썬팅을 한 자동차 안에서 운전을 할 때도, 전화통화를 할 때도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멀리 출장을 가거나, 거래처 사람들을 만나는 거기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학원, 독서실, 교실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참된 경건인 것입니다. 고민되는 일들이 있어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무릎을 꿇으세요. 현존하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세요.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 그리하면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전 날에 한숨 변하여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곳은 성전이 되고, 하늘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야곱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바로 현존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16절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빈들에 있습니다. 광야 한 벌판에 있습니다. 형을 피해 도망쳐 이곳에 와 있습니다. 헌데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빈들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자신이 있는 빈들은 더 이상 광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었습니다. 내가 언제든 나갈 수 있는 하늘의 문이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문도 없었습니다. 강대상도 없었습니다. 산짐승이 울어대는 허허 벌판이었습니다. 헌데 그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을 때, 그곳은 벧엘 즉 아름다운 성전이 된 것입니다. (적용)충북대학교병원 집중치료실에서 암으로 고통 받으며 생사의 기로에 있는 분이 있습니다. 옆에 어머니가 계시고, 남편이 있고, 자녀들이 있지만, 그 누구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위로를 줄 수도 없습니다. 그분에게 찾아가 기도하며, 전하는 말씀은 ‘이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함께 기도합시다. 그러나 사람은 한 번은 죽습니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사는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 예수님이 또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고와처럼 홀로 두지 않겠다고... 예수님만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는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안절부절하고만 있지 않습니다. 현존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상황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또한 거짓된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현존자 하나님을 믿는다면 욕심으로 일을 계획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일을 이루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되고 더려운 말은 입밖에도 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자라면 내 이익만을 위해서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현존자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는 순간, 깨닫는 순간 여러분은 참된 믿음을 갖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1)먼저 내적인 반응입니다. 17절이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야곱의 반응은 하나님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일설교는 한 주간 동안 받은 말씀들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특히 날마다 은혜 받은 말씀은 새벽설교에서 선포됩니다. 항상 새벽설교를 소수인 몇 사람에게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새벽설교를 많이 인용합니다. 새벽설교는 원고가 없습니다. 요약본만 가지고 올라와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돌아서서 정리를 합니다. 어제 새벽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벨론을 향해서 하박국 선지자가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바벨론의 교만함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믿는 신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믿고 큰 소리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력을 자랑했습니다. 군사력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이들에 신이었습니다.” (비유) 꼭 일본이 그랬습니다. 그동안 일본이 얼마나 교만했습니까?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경제력, 군사력, 기술력을 신으로 삼고 자만했습니까? 자신들의 힘을 믿고, 중국과 한국과 러시아와 늘 외교적인 마찰을 빗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교만하면 역사를 왜곡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헌데 일본의 교만함은 뿌리가 있습니다. (예화)이토히로부미가 독일을 방문해서 비스마르크를 만났습니다. 독일군의 사열을 받으면서 비스마르크는 이토에게 “우리 독일군대는 하나님 외에는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토는 자신의 일본군이 더 용맹함을 자랑하기 위해서 “우리 일본군은 하나님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교만합니까? 하나님 무서운줄 모르는 것은 교만합니다. 이 때 비스마르크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 강한 것인줄 아십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진짜 강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두려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서의 예)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 하지 않는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골리앗 앞에서 사시나무 떨 듯이 합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 한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큰 소리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세요. 내 인생 앞에 놓인 골리앗을 두려워하는 것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능력과 힘과 위대하심을 안다면 골리앗을 두려워 할 수 없습니다. 누가 큰 자요? 누가 강한 자입니까? 누가 진정으로 승리자입니까? 자기 위에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교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큰 자요 강한 자요 승리자인 것입니다. (2)둘째는 야곱의 외적인 반응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의지적으로 결단한 것입니다. 신앙은 감동이 아닙니다.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예배시간에 감동만 받지 마시고, 의지적으로 결단을 하십시오. 감동하고 감격하는 것은 잘하는데, 생활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야곱이 의지를 갖고 결단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평생 예배자의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20-21절을 보겠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언뜻 보면 빅딜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주시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식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못되어서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인과론으로 봅니다. 내가 이렇게 했더니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해주시면 내가 하나님만을 섬길께요? 이런 식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잘할 때는 괜찮은데 실수할 때, 못난 짓을 할 때는 내가 벌을 받겠구나!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구원은 내 행위와 상관없이 먼저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복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복을 만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이기에 구원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약속한 것은 이미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 뒤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라면 나도 평생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적용)사람이 언제 변화됩니까? 채찍질로 사람이 바뀔까요? 자녀를 키워보면 알지만, 매도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깨지는 것입니다. 여기 계란이 있습니다.(계란 준비) 계란을 깨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망치로 깨면 후라이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가슴으로 품으면 병아리가 되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겁주고, 때려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영원한 사랑으로 품고 품어주므로 결국은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사랑해서 그 사랑 앞에 항복하고, 평생 예배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야곱이 의지적으로 결단한 것은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결단은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명) 오늘 날 교인들이 신앙에 있어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알레르기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로 해가 없는 외부물질(항원)에 대한 신체의 과민반응’이라고 정의합니다. 유독 그 부분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알레르기는 제가 생각할 때 전도와 십일조입니다. 두 가지 이야기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러지 마시고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이 돈 내라는구나! 그런 거 아닙니다. 앞서 하나님의 복과 은혜는 인과론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헌데 하나님이 전도와 십일조에 있어서만큼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전도와 십일조에 있어서는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많은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4/24일 새 생명 초청주일에 작심을 하고 전도하시길 바랍니다. 전도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한 사람은 하늘에 슈퍼스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현세에 복을 받는 것입니다. 전도가 미래적이라면 십일조는 이 땅에서 물질의 복을 받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일조 해도 물질의 복이 없던데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말라기서에서 너희가 왕에게 선물을 드릴 때, 눈먼 송아지... 병든 양을 선물로 드려봐라.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반드시 당대에 아니면 내 자녀들대에 반드시 물질에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야곱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것은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일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기에 우리도 쉽니다라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이 주일이기에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일조도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양식과 물질로 채우셔서 이렇게 살아갑니다. 하나님만이 내 필요를 충분히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나에게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지 않고,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고 저주를 받습니다라고 말하면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전도와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이 차이를 아시겠지요? 야곱이 자신이 가진 것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지키시고, 나의 필요를 채우셨다는 것을 증거로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증표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헌데 아직 믿음이 약하여 드릴 수 없다면 드리지 마십시오. 괜히 눈치보고, 율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시면 안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러나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라고 믿는다면서,,, 의지적인 결단이 없다면 그것은 고백이 있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현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십시오. 그 분 앞에 의지적으로 결단하여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십시오. 열매가 있는 신앙생활이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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