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 이병수목사 | 2011-07-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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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4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창세기 41:14-16 제목:13년!! 시대가 갈수록 무신론이 팽배해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이 있으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분위기입니다. 2009년도 영국의 무신론협회에서 대중 버스에 이런 광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There i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주된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세상이 이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디에는 가난과 가뭄으로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어디는 너무 배가 불러서 다이어트를 할 수 있느냐? 세상에 테러와 전쟁과 살인, 천재지변등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의인들이 악인들에게 고난을 받는데도 가만히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면 이해가 잘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면서 겪는 그리스도인의 고통은 대략 세 가지입니다. ①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할만큼 고통이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②왜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응답을 하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③내가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조롱할 것 아닙니까? 이 고통이 요셉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13년 동안 겪었습니다. 17살에 형들에게 버림받아서 30살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13년의 시간동안 수 없이 이런 질문들을 던졌을 것입니다. 허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 결국 요셉은 인내했고, 고난속에서도 불평,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13년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결국 모든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시는 것을 지켜보면서 고난 받았음을 오히려 감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13년 동안 요셉이 한결같은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하는 회의와 의심과 두려움이 몰려오는 상황속에서도 믿음의 길을 지킨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이 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13년의 시간을 실패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요셉을 붙들어 준 힘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첫째로 요셉의 시선입니다. 요셉은 오직 하나님께만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이었습니다. 바로가 꿈을 꿉니다. (꿈의 내용)강가에 살지고 튼튼한 소 일곱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헌데 조금 있다가 깡마르고 흉측하게 생긴 일곱 마리 소가 나타나 기름지고 살진 소들을 삼켜 버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놀라서 일어났다가 다시 잠이 들어 두 번째 꿈을 꿉니다. 한 곡식줄기에서 무성하고 튼실한 일곱 이삭이 나왔습니다. 헌데 그 후에 가늘고 깡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가는 일곱 이삭이 좋은 이삭을 삼켜버렸습니다. 바로는 꿈에서 깨어나 ‘도대체 이것이 무슨 꿈인가?’ 답답하여 모든 점술가들과 지혜자들을 불러 꿈을 설명했습니다. 헌데 누구도 해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 때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왕에게 고백합니다. 9-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즉시 바로 왕은 요셉을 감옥에서 불러옵니다. 수염을 깍고 옷을 깨끗하게 갈아 입고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적용)보세요. 하나님의 때가 되니 순식간에 감옥에서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조급해하고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어야 문제는 풀려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보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허나 역사의 중심은 바로왕이 아닙니다. 술 맡은 관원장도 아닙니다. 보디발도 아닙니다. 형들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한 사람 요셉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부르신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역사의 변두리가 아니라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왕은 마음이 급합니다. 요셉을 보자 마자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해석할 자가 없도다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요셉이 대답을 합니다. 헌데 이 대답속에서 요셉이 13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가?를 알수 있는 단서가 나옵니다. 16절은 요셉이 감옥에서 바로 왕 앞에서 쏟아놓는 제일성입니다. 16절을 다함께 읽습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감옥에서 나온 요셉의 첫 고백은 “하나님이”입니다. “하나님이 ---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어가 하나님이었습다. 이것은 요셉으 시선이 오직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16절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I can not do it. - - - but(이것이 중요합니다.) God will give the answer" 25절에서도 “하나님이” 28절에서도 “하나님이” 32절에서도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속히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화)코리 텐 붐 여사가 있습니다. 독일 나치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어려움을 이기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코리 텐 붐 여사는 “어떻게 이기셨습니까?”라고 묻지 말고, 누구로 인하여 고난을 이기셨습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 고난을 이기셨느냐?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3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내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이 나를 높이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바라보고 두려워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사실 16절의 고백을 한다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일입니다. 애굽 바로왕은 신적인 존재이다. 바로보다 더 높은 자는 없다. 신도 없다. 헌데 요셉은 바로 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앞에서 당당하게 “일을 이루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시는 이도 오직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요셉 자신은 바로가 하나님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예화)세계 제2차 대전 때 연합군이 점령한 포로수용소 벽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 글은 아마도 독일 나치군에게 잡혀 있었던 포로 중의 한 성도가 쓴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의 해가 가려져 햇빛이 안 보인다 해도 나는 해가 있음을 믿습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사랑이 안 보인다 할지라도 나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시고 아무 말씀을 안해 주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이 포로가 생존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포로는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마지막까지 주를 바라보는 것이 참 믿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적용)저는 우리 성도들에게 절망의 깊은 수렁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길 바랍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을 볼 수 있게되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하나님께만 시선을 고정시키게 된 계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을 보았고, 평생을 하나님을 주어로 삼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눈을 열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상황속에서도 믿음의 눈을 열어주셔서/ 기도할 때 열려지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눈을 열어 주를 보게 하옵소서. 나를 둘러싼 문제와 상황만 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보게 하옵소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보게 하실 것입니다. 요셉의 영성? 요셉은 시작부터 하나님이고, 마지막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으로 해석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으로 인내했다. 하나님으로만 해석했다. 요셉은 순간 순간 마다 하나님을 높인다. 하나님에게만 시선을 고정하는 요셉이기에 감옥이란 고난도 넉넉히 이겨냈다. (우리는 어떤가?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무엇으로 해석하는가? / 사람인가? 그 사람 때문이다...라고 해석하는가? 이 사람이 도와주기만 하면... 이 사람을 만나지만 않았다면...인가? 아니면 돈인가? 돈만 더 있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어려움을 해석하십니까? 오직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지? 하나님의 계획이 있지? 믿으시길 바랍니다. 2.둘째로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요셉에게 하나님은 어떤 위로를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어떻게 보상해 주셨습니까? (1)물질적인 풍부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요셉은 바로왕의 꿈 이야기를 듣고 해석을 합니다. 그 꿈은 하나님이 앞으로 행하실 일을 예언한 것이라고 합니다. 29-32절입니다. “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그리고 꿈만 해석한 것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합니다. 33-36절입니다.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바로와 신하들은 정확한 해석과 대안을 듣고 수긍합니다. 그리고 바로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하고 요셉을 총리로 세웁니다. 그리고 ①인장반지를 끼워주었습니다. ②그리고 총리의 격에 맞는 좋은 옷을 입혀 주었다. ③금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④두 번째 마차를 타게 했다. (2)그리고 하나님은 가정을 이룰 수 있게 하셔서 요셉을 위로하십니다. 명문가정의 딸과 가정을 이루고 두 아들을 낳습니다. (아니 목사님!! 바로가 물질을 채워주고, 결혼도 시켜주고 한 것 아닙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허나 당사자인 요셉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두 아들들을 얻었습니다. 헌데 두 아들들을 이름을 지을 때 요셉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큰 아들을 낳고 이름을 므낫세로 지었습니다. 므낫세는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안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잊어 버렸다’ 이것이 므낫세입니다. 무엇을 잊어 버린 것입니까? 자신에게 닥친 모든 고난과 아버지의 일들, 형들이 자기를 팔아먹고 핍박한 일들을 다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 억울함을 다 잊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청산하게 해 주셨습니다. (예화)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늘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매여서 도무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노의 짐, 억울함의 짐, 상처의 짐을 지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므낫세 해야 합니다. 다 잊어 버리고 가야 합니다. 회피하듯이 덮어 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해결하고 가는 것입니다. 또한 둘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에브라임은 “번성하게 하셨다”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2배로 풍성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내 인생 가운데 풍성케 하시는 은혜로 갚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어려움 속에 있다 해도 앞으로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실 것이라는 믿음인 것입니다. 영성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비움, 둘째는 채움의 단계, 그리고 셋째가 나눔의 단계입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채워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나누는 삶을 살도록 비우게 하시고, 채워주셨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적용)여러분도 이런 믿음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사명은 나눔입니다. 나누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은 비워주시고, 채워주실 것입니다. 므낫세로 끝내시고, 에브라임하시길 축복합니다. (3)무엇보다 요셉은 물질과 가정으로부터 위로함을 받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영적 위로를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보게 됩니다. 요셉은 어떤 자입니까? 가장 비참하고 낮고 천한 노예인 요셉을 들어 하나님은 현재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바로와 고관대작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작은 겨자씨 한 알이 자라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누룩 한 덩어리가 많은 가루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한 능력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을 갖고 하나님은 인류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들어 높은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요셉을 들어서 높은 바로왕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길 축복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신비한 기적을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셉처럼 하나님께만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요셉은 13년의 고난의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지 않았습니다. 억울하게 보내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현실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때를 믿고 인내한 것입니다. 지금 13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감옥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할 것입니다. 물질적인 위로뿐만 아니라, 가정이 주는 위로를 넘어서 하나님의 위로가 임할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만천하에 나타내시는 도구로 써 주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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