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신 남겠습니다. | 이병수목사 | 2011-08-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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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1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창세기 44:1-34(18-34) 제목:내가 대신 남겠습니다 시험과 유혹은 비슷한 말처럼 느껴지지만 전혀 다릅니다. 먼저 목적이 다릅니다. 시험의 목적은 어떤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유혹은 넘어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허나 마귀는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시험을 잘 통과하여 승리하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목적이 선합니다. 반면에 악한 마귀는 우리를 유혹해서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서의 예화) 가장 대표적인 시험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목적은 아브라함을 골탕먹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없기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음도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더 큰 믿음의 사람으로 끌어올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 이 시험을 통해서 주변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 자신도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시험을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시험을 통해서 자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시험을 통해서 내가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험은 학생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시험은 있습니다. 시험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지만, 통과하고 합격하기만 한다면 시험처럼 좋은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두 가지 시험을 합니다. 하나는 은잔 Test이고요, 또 하나는 베냐민 Test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는 목적은 형들을 넘어뜨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22년이 지난 지금 형들이 진정으로 변화되었을까? 형들의 본심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1.먼저 은잔 Test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살고 있는 곳에도 심한 가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들을 보내서 애굽에서 양식을 사오게 했습니다. 그곳에서 요셉이 드디어 곡식을 사러 온 형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신분을 속이고 엄하게 심문을 합니다. 너희들은 스파이다. 이 땅을 정탐하러 온 것이 맞다. 그렇지 않다면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 놓았습니다. 아들들이 돌아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자초지종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허나 야곱은 절대로 막내 베냐민만큼은 내줄 수 없다고 합니다. 시간은 흐르고 사온 곡식도 다 떨어졌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다시 자식들에게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허나 형들은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애굽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때 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왜 너희들은 쓸 데 없는 소리는 해가지고 나를 이렇게 곤란하게 하느냐?’ 지난 시간에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공식중에 하나 절대로 원망해서는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남을 탓하고, 서로 비난 하는 한 절대로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를 푼 사람은 누구입니까? 유다입니다. 유다는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베냐민의 담보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책임지는 사람이 있을 때 문제는 풀리기 시작합니다. 유다의 설득에 아버지 야곱은 마음을 정합니다. ‘그래 가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내가 아들을 잃으면 잃으리로다’ 결국 야곱이 믿음으로 집착을 내려놓았을 때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왔습니다. 요셉은 여전히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감옥에 갇힌 시므온을 불러내어 다른 형제들과 함께 잔치를 벌입니다. 형제들은 어리둥절 했을 것입니다. 그리도 애굽의 총리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곡식을 잔뜩 사서 다시 갑니다. 헌데 이 때에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환을 불러서 형제들의 곡식단에 돈들을 그대로 집어 넣고, 특히 베냐민의 곡식자루에 요셉의 은잔을 넣게 합니다. 그리고 뒤 쫒아가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떻게 선을 악으로 갚느냐? 내 주인이 늘 마시며 점치던 은잔을 어떻게 훔쳐 갈 수 있느냐? 너희가 이같이 악하냐?”고 합니다. 그러자 형들은 우리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큰 소리를 칩니다. 9절입니다.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유대인들은 명예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체면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도둑으로 오해받기에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형제들의 자루를 하나 하나 풀어서 조사를 했더니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옵니다. 그러자 형들의 반응입니다. 13절입니다.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이 은잔 시험을 통해서 알고 싶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예!! 형들이 변화되었는가? 진정으로 회개했는가? 형제애는 있는가? 이 시험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적용)은잔 시험은 우리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험의 목적은 나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알고 싶으신 것입니다. 은잔을 갖고 내가 어떻게 하는가? 성숙해졌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잔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한 주인이 타국에 갈 때에 종들을 불러 달란트를 맡깁니다. 5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깁니다. 한 달란트도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아주 큰 돈입니다. 주인이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길 때는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주인이 맡겨주신 것을 갖고 잘 쓰는가? 어떻게 하는가?를 보기 원한 것입니다. 단란트 비유의 결론은 주인이 돌아와 결산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수한 날수들을 은잔으로 주셨습니다. 달란트도 주셨습니다. ①하나님이 주신 시간, 많은 날들을 어떻게 쓰고 계십니까? 시간의 십일조인 주일성수를 잘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시간들을 허랑방탕하지 않고, 가치있게 잘 쓰고 있습니까? ②또 물질을 주셨습니다. 물질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물질을 대하는 태도, 물질을 사용하는 우선순위, 물질에 모으는 방법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잘 알수 있습니다. 물질의 은잔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③그 외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잔들이 많습니다. 자녀들 /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 이웃들 / 심지어는 고난들까지도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들의 마음에 가득한가? 하나님이 주신 그것으로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 앞으로 끌려 왔습니다. 요셉은 더 엄한 목소리로 책망을 합니다. 15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그 때 형들의 대답입니다. 16절을 함께 읽습니다.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유다가 대표로 말한 것이지만, 이 의견이 형들의 의견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라는 표현입니다. 4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주의 노예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변화되었지요? 2.그러자 요셉은 두 번째 베냐민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베냐민만 놓고 가라는 것입니다. 헌데 형들은 그럴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다 주인의 노예가 되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설명)형들이 많이 변화된 것이 보이십니까? 예전 같으면 이 정도 노력했으면 어쩔 수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라도 산 것을 좋아했을 것입니다. 헌데 지금은 형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아무 죄가 없는 요셉을 죽이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고도 죄책감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헌데 지금은 누가 봐도 베냐민이 죄를 지었습니다. 헌데 같이 옷을 찢으며 함께 성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베냐민과 같이 종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부터 34절까지 유다가 요셉에게 간청하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여섯 절에 걸쳐서 비교적 길게 유다가 요셉에게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열 여섯 절을 한 문장으로 축소하면 “내가 대신 남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배경을 이해하시면서 다시 한번 본문을 읽어 보세요. 유다의 고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의 변명이 없습니다. 억울해하지도 않습니다. 누구를 탓하지도 않습니다. 깨끗하게 인정합니다.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유다의 고백은 아름다운 회개였다. 아름다운 성숙의 모습이었다. 예수님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유다의 아름다운 고백을 봅니다. 하나는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오늘은 “내가 대신 남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32-33절입니다. 이 말씀이 44장의 핵심입니다. “ ” 완전히 변화된 유다와 형들의 모습을 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유다의 고백 속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를 보기 원합니다. 우리들도 많은 시험들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함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유다의 아름다운 고백과 변화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1)첫째는 아름다운 회개가 있습니다. 유다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자백했습니다. 그는 없어진 은잔이 베냐민에게서 나온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죄를 지었기에 당하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6절 중간 부분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라는 말씀입니다. 유다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았습니다. 억울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요셉을 팔아먹었던 우리들의 죄악을 찾아내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회개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도 괴로워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에게 시험이 끝이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회개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됨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회개하여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도 알아봅니다. 시험이 오면 깊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 욕심으로 하여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지? / 내가 청산해야 할 것이 없는지... / 내가 내려놔야 할 것은 없는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더러운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의로운 죄인이 많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겉으로는 의로와 보이지만 그는 의로운채 하는 죄인입니다. 허나 늘 하나님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긍휼함을 구하는 사람들은 죄인인듯하나 의로운 자입니다. 더러운 의인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철저한 회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2)둘째는 아름다운 인간관계회복이 있었습니다. 유다는 지금 누구를 걱정하고 있습니까? 먼저 아버지 야곱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베냐민을 데려가지 못하면 아버지는 죽을 것이라고... 아버지가 고통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고... 그러니 차라리 자신을 종으로 삼아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대신 남겠다는 것입니다. 또 형제들간의 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 베냐민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합니다. 예전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로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버지도 이해하게 되었고, 베냐민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아끼는 모습을 봅니다. (적용)바라기는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습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의인으로 날마다 자비와 긍휼을 구하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관계가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용서하게 되고, 이해하게되고, 사랑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이 그런 능력을 주시길 바랍니다. (3)셋째는 유다에게서 아름다운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33절에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며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내가 담보게 되겠습니다. 내가 대신 남겠습니다. 내가 되신 종이 되겠습니다. 내가 대신 죽겠습니다. 내가 다 책임을 지겠습니다. 이 고백이 주님의 고백 아닙니까?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의로움이란 추호되 없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지옥자식이었습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었습니다. 구원해달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자들을 지켜보시며 안타까워 하시던 주님이 하나님께 말씀드린 것입니다. “내가 저들을 대신해서 죽겠습니다. 내가 저들의 죄의 짐을 대신 지겠습니다. 내가 죄와 사망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당신이 철저히 버림받음으로 우리가 건져냄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변론해 주십니다. “아버지여! 내가 저들을 위해서 죽지 않았습니까?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내 피로 저들을 덮었습니다.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유다의 모습에서 예수님이 보입니다. 훗날 유다의 가문에서 다윗 왕이 나오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훗날 유다는 아버지 야곱에게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넷째 아들이지만, 유다가 이스라엘 12지파의 영적 장자가 됩니다. (적용)하나님은 유다와 같은 자에게 축복하여 주십니다. 유다와 같은 자에게 가문의 축복을 주십니다. (4)넷째는 유다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 시대, 아니 우리 미래교회에 유다와 같은 일군이 필요합니다.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내가 대신 남겠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이런 일군들이 필요합니다. 신실한 일군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저오 여러분이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유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신실한 유다와 같은 일군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유다와 형들은 시험에 모두 합격을 했습니다. 시험은 힘들지만, 합격하기만 한다면 그것처럼 영광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시험이 많지만, 시험문제를 내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아 제 2 유다와 같은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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