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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한 자의 삶 이병수목사 201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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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1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성경:사도행전 7:54-60

제목:성령충만한 자의 삶

학자들은 하나같이 말합니다. 3년간의 짧은 공생애 시간에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집중력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급한 일 보다 중요한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집중하신 중요한 일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도 사람을 세우시는 일에 집중하십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집중하십니다. 성 삼위 하나님은 천상에서 회의를 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회의하신 유일한 주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만큼 사람을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에 성도들도 서로 다툴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6장 1-2절입니다. “ ”

 

(설명)그리스 말을 쓰는 유대인들과 본토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도 인간 관계의 갈등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실수 할 수 있습니다. 다툴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문제를 풀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 간에 갈등이 생기니 결국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목회자들입니다. 당시 사도들에게 사람들이 찾아가 하소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들이 나서게 됩니다. 구제하는 일, 교회 안에서 식사하는 일, 서로 접대하는 일에 신경을 쓰고, 시간을 내다 보니 정작 기도와 말씀에 집중할 시간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결단을 한 것입니다. 3-4절입니다. “ ”

이것이 직분자들을 세운 이유입니다. 그래서 일곱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역을 분담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6장 7절입니다. “ ”

(적용)우리 교회에도 이런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항존 직분자들을 세우는 일을 놓고 기도하면서 집중하여 기도한 것 가운데 하나는 ‘초대교회에 일곱 항존 직분자들을 세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지고, 제자들의 수가 심히 많아진 것같이 우리교회에도 세워진 일군들을 통해서 이런 은혜와 부흥이 일어나게 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곱집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이런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진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특히 스데반 집사를 통해서 우리들이 어떤 성도가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첫째 하늘의 영광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①성령이 충만하고, 큰 영적인 능력을 경험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스데반집사입니다. ②또한 스데반 집사는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6장 15절입니다. “ ”

또 오늘 본문 55절에서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적용)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도 여러분의 시선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땅에 소망을 두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천국을 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쉐키나 인생이 있고, 이가봇 인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블레셋과 싸워 패하고 4000명 정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싸움에 패한 이스라엘은 실로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자 사기충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앞장세우며 싸웠는데 3만명이 죽임을 당하고 또다시 블레셋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가장 중요한 언약궤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충격으로 죽었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이름을 지어주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이가봇의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다’고 합니다(삼상 3:1). 성소도, 제사장도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증거 되지 않았으며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이가봇이 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쉐키나’입니다. 쉐키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쉐키나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쉐키나 영광은 모세가 광야 시절에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또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봉헌하였을 때 쉐키나가 구름 속에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쉐키나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자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가 살아있는 쉐키나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징조가 무엇입니까? 영적 감각이 떨어지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고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엘리 제사장과 대조를 이루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사무엘은 평생 두 가지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①기도의 쉬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 늘 기도했다. 평생기도했다. ②전국을 순회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쳤다. 말씀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한 사람에게는 말씀의 영광이 임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성도가 있을 뿐입니다. 이가봇 인생과 쉐키나 인생입니다. 같은 시대에 살고, 같은 교회에 다녀도 어떤 사람은 엘리 제사장처럼 이가봇 인생을, 어떤 사람은 사무엘처럼 쉐키나 인생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과 가정이 쉐키나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쉐키나의 가정인지.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쉐키나가 드러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2.둘째로 용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용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60절입니다. “ ”

스데반이 이렇게 자신들을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에게서 그래도 배운 것입니다.

(성서의 예)주님의 비유의 말씀? 빚을 진 사람들이 둘 있다. 한 사람은 10억을 빚졌고, 한 사람은 100만원을 빚졌다. 헌데 둘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누가 더 감사하고, 더 주인을 사랑할까? 대답했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스데반은 주님께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용서못 할 사람이 없게 된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주님께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화)이스라엘 지형구조

헐몬산에서 물이 흘러 내린다.

헐몬산의 물을 받아들이는 곳은 갈릴리 바다와 사해 바다이다. 갈릴리 바다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 주위에는 푸른 초장과 우거진 나무들이 있습니다. 생명들이 소생하는 곳이 갈릴리 바다입니다. 헌데 사해 바다는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똑같이 헐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들이는 곳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받아들이고 어느정도 채워지면 다시 흘려 보냅니다. 통로가 됩니다. 헌데 사해바다는 받아들이기는해도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가두어두기만 합니다.

헐몬산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만, 갈릴리 바다 같은 인생들은 받기만 하지 않습니다. 싸 놓기만 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채워지면 나눕니다. 물질도 나누고, 재능도 나누고, 시간도 나눕니다. 사랑도 나누고, 복음도 나눕니다. 허나 사해 같은 인생들은 쌓기만 합니다. 모으기만 합니다. 채우기만 합니다. 속으로는 썩어가고 있는데도 모릅니다.

스데반집사는 갈릴리 바다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저는 하루 빨리 우리교회가 채워져서 많이 흘러가게 하길 바랍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가 비난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 밖으로 세상속으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쌓아두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화려하고 부자가 되었는데... 전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 때문에 세상이 행복해져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다는 것입니다.

3.셋째는 성공의 길을 가기보다, 의의 길을 간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솔직하게 많은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서 믿습니다.

목사도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개척하면 하루 빨리 100명 교인되기를 바랍니다. 100명되면 300명되길 바랍니다. 300명되면 1000명 교인되기를 바랍니다. 1000명이 되면 만명 교인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결국 성공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을 즐기지 못합니다. 100명 교인이면 300명이 되기까지는 늘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300명이 되면 1000명이 되기까지 즐거워 하지를 못합니다.

성공하는 것이 목적이면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참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늘 비교하기에 행복하지를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만 그렇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어서 성공하려고 합니다.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오늘 스데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네가 성공하는 신자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난 너희가 거룩한 신자가 되길 바란다. / 나는 너의 교회가 성공하는 교회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의로운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데반 집사는 성공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자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감옥에서 기적같이 구출을 받습니다. 죽을 고비를 기적으로 넘깁니다. 헌데 스데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성공의 기준으로 보면 철저한 실패자입니다. 헌데 스데반이 순교할 때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십니다. 앉아계실 수가 없어서 서서 기다리십니다. 서서 스데반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스데반에게 원한 것은 성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의 길을 가길 원했습니다. 스데반이 죽음으로 주님의 의가 드러나길 바랬던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다하다가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길입니다.

 

시편 23편을 잘 아시지요? “그나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늘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지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어디로 우리를 인도하시길 원하신다고요? 의의 길입니다. 성공의 길이 아닙니다.

의의 길은 힘듭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사명의 길입니다. 죽어야 하는길입니다. 그러니 가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의의 길은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가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그러나 성공의 길은 넓은 문, 넓은 길입니다. 그래서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좁은 문, 좁은 길, 의의 길로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고생스럽고 힘들어도 의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입니다. 의의 길/ 좁은 길로 가야만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 넓은 길의 끝은 멸망입니다. 사망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가도 사망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 먹고, 잘살고, 좋은 집, 좋은 차타고 폼나게 살아도 결국은 사망이라면 그 길이 어찌 좋은 길입니까? 결국은 지옥이라면 어찌 그 길이 아름다운 길이겠습니까?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예수 믿는 것이 힘들어도 믿음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는 부활이 없다면, 사후세계인 천국이 없다면 스데반처럼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처럼 불쌍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천국은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아무리 달콤해도 좋아도 우리는 의의 길, 좁은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천국을 보았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살았습니다. 의의 길을 기꺼이 갔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길 원하십니까? ①쉐키나의 인생입니까? 이가봇의 인생입니까? ②갈릴리 바다같이 사시겠습니까? 사해바다같이 사시겠습니까? ③성공의 길을 가시렵니까? 의의 길을 가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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