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 이병수목사 | 2012-04-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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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8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요한복음 3:1-8 제목: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2011년 12월 17일자 중앙일보 제 1면에는 <고 이병철 회장이 듣고 싶어 했던 ‘종교와 신’에 답하다>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관련 내용을 자세하게 담고 있었습니다. 내용인즉 삼성의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기 한 달 전에 기독교를 향하여 던진 24가지의 종교적 질문과 답변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고 이병철 회장이 던진 질문들을 보면 죽음을 앞두고 있는 한 인간의 깊은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알게 합니다. 질문을 던진 고 이병철 회장의 죽음으로 이 질문들은 묻혀 있다가 24년 만에 공개가 된 것입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고 이병철 회장의 신과 인간과 종교에 대한 고뇌의 질문들이 세간의 관심을 갖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종교적 물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한 사람에게 국한된 질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을 수 있는 공통된 질문들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❶‘신은 있는가? 신이 있다면 왜 나타나지 않는가?’ 신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 눈에는 공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기는 있습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감지할 수 있는 소리는 제한적입니다. 인간은 너무 큰 소리, 너무 작은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듣지 못한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가 있는 인간이 신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계시종교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구원받기에 합당하도록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알려 주셨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❷‘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종말은 언제인가?’ 내가 죽는 날이 종말입니다. 또한 역사적 종말, 지구의 종말도 반드시 있습니다. 지구도 수명을 다할 때가 있습니다. ❸‘죄는 왜 있는가?’ 죄는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책임입니다. 책임을 하나님께 떠 넘기시면 안됩니다. ❹‘고통은 왜 존재하는가?’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고통은 자유의지를 엉뚱하게 썼을 때에 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고통을 하나님은 경고 사인으로 삼으셨습니다. 불속에 손을 집어 넣었을 때 뜨거움을 느끼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 고통은 오히려 축복입니다. 이 고통 때문에 화상을 막는 것처럼 하나님은 고통과 불행을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회개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❺‘사랑이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한가?’ 이것도 사람의 탐욕과 죄악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악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❻‘죽음은 무엇인가?’죄의 결과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자라서 결국 사망을 낳습니다. 죄 값으로 사람의 육신은 한 번은 죽어야 합니다. 영혼은 지옥에 가야 합니다. 헌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우리 때문에 달려 죽으시고, 죄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영원한 살고, 육신도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❼‘인간에게 종교는 왜 필요한가?’ 사람은 수 많은 벽을 만납니다. 그 벽을 사람의 힘으로 넘어설 수 없습니다. 신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을 한계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한계상황(Boundary Situation)은 5가지가 있습니다. ➀첫째는 ‘생노병사’ ➁둘째는‘고독’➂셋째는‘방황’➃넷째는 ‘투쟁’➄다섯 번째는 ‘죄’이다. 인간은 죄를 지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마음으로는 죄를 짓지 않고 살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 찌르고, 아파하며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헌데 죄를 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 이병철 회장과 같이 깊은 고뇌에 빠진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니고데모입니다. 1절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개역성경에 보면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관원이라는 단어는 ‘아르콘’즉 통치자, 우두머리란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산헤드린의회 의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의회는 7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유대인 최고의 통치기구입니다. 산헤드린의회에 속한 사람들은 당시 유대인 제 1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바리새파에 산헤드린의원인 니고데모는 지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권세를 갖고 있는 자였습니다. 헌데 이 사람이 주님을 찾아 옵니다. 2절입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 온 것은 밤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밤에 찾아 온 것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기에 남의 눈을 피해서 은밀하게 찾아 온 것입니다. 아직까지 니고데모는 주님보다 자신이 누리는 삶의 자리, 자기체면, 자신이 누리는 특권과 직책이 더 소중했습니다.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주를 따르지는 못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대한 소문을 들으면서 더욱 간절하게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눈을 피해 밤에 찾아 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것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지체 높으신 양반이 일개 떠돌이 청년 예수를 찾아 온다는 것도 대단하고, 무엇보다 영적인 것을 고뇌하고, 질문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귀합니다. 마치 고 이병철 회장이 죽음 앞에서 고뇌하여 기독교를 향하여 질문한 것처럼 니고데모도 주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헌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주님의 태도입니다. 주님은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아주 절제되고 예의 바르게 찾아와 주님께 묻고 있습니다.“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니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다면 어떻게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습니까?”아주 예의바르지요. 헌데 주님은 돌려 말씀하지 않으시고 단도직입적으로 본질을 말씀하십니다. 3절을 함께 받들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주님은 초면에 만난 니고데모에게 핵심을 찌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그러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이 말은 이렇게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 육신이 다시 모태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안되지 않습니까?라는 것입니다. 1.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거듭남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아노덴’이라는 말입니다. 헌데 이 단어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➀하나는 ‘다시, 새롭게’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보다 더 좋은 쪽으로 변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종교들이 추구하는 영성입니다. 세상 종교들은 갱신을 부르짖습니다. 니고데모도 거듭나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새롭게’된다는 말로 이해한 것입니다. ➁아노덴은 또 하나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하늘로부터”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2.그러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대답을 해 주십니다. 5-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주님은 어떻게 거듭날 수 있다고 하십니까?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만 거듭날 수 있다”고 하십니다. (1)물이란 무엇입니까? 물은 마시지 않으면 죽습니다. 먹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밥을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짐승들은 배부르면 만족합니다. 허나 사람은 배부른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사람은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➀영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밥이 필요하듯, 영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25절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➁또한 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물과 피입니다. 물과 피는 우리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고, 갈증을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사막 같은 이 세상을 사노라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모릅니다. 한계상황을 만납니다. 그 때에 오직 주님만이 참된 만족을 주시며,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흘리신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는 능력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의 죄 때문에 짐승을 대신 잡아 피를 쏟았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대신 짐승이 피를 흘렸습니다. 헌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사람마다 누구든지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2)또 우리들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다른 말로 바람입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바람을 예로 들어 주셨습니다. 8절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❶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이론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❷바람이 임의로 분다고 했습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불어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이 주도적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적용)간혹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구원을 받았느냐? 기독교인들로 인해서 욕도 많이 먹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사랑하시나? 전적인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감사할 뿐입니다. 3.그러면 거듭난 자의 증거, 거듭난 자의 변화된 삶은 무엇입니까? 변화입니다. (예화)지난 주일 제자훈련시간에 집사님들에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솔직하게 예수 믿어서 좋은 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➀어떤 집사님은 내 인생을 책임질 분이 있다는 것 때문에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상황은 걱정될 일도 많지만, 그래도 마음이 담대하고 평안한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른 집사님들도 정말 힘들 때 내 삶을 맡기고 의지할 분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화)주말드라마 중에 <넝쿨째 굴러 온 당신>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한 번 보았는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버지 방장수와 어머니 엄청해 씨는 30년 전에 아들을 잃었습니다. 30년 동안 아들 잃은 슬픔에 힘겨운 삶을 삽니다. 아들이 혹시 돌아올 까봐 다른 곳으로 이사도 가지 않고, 아들을 기다리며 삽니다. 헌데 30년 전에 잃었던 아들을 드디어 찾습니다. 알고 보니 그 아들 방귀남은 앞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아버지 방장수와 아들 방귀남이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아버지가 하던 말입니다. “네가 잃어버린 가족을 찾았다는 것이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다만 너를 무조건 지지해주고 편들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생겼다는 것으로 힘과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구나!!”라고 합니다. 아멘!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방귀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잃고 살았습니다. 헌데 거듭났다는 것은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은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어렵게 찾은 아들을 보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다만 네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너를 무조건 사랑하고, 너를 지지해주고, 편들어 줄 수 있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으로 힘과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구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어려움도 있지만 힘겨움도 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때문에 힘을 낼 수 있는 것이 거듭난 것입니다. ➁어떤 집사님들은 죄 사함 받은 것이 너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나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듭났다는 것은 관점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고난이 와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4가지의 눈을 갖고 있습니다. 육안입니다. -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심안입니다. -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보이는 것입니다. 지안입니다. - 지식, 실력이 있어서 보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헬라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그리고 영안이 있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보이는 물질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예화)예전에 유리겔라라는 마술사가 내한해서 TV로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TV앞에서 숟가락을 들고 그가 하라는 대로 하면 숟가락이 저절로 휘어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안되고 그랬습니다. 된 사람은 신기하다고 그 숟가락을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한 장로님이 사모님과 함께 숟가락이 휜 것이 너무나 신기해서 휘어진 숟가락을 가보로 보관한다고 하기에 목사님이 그러셨답니다. 케이스에 이렇게 쓰시라고... “쓸데 없는 짓-숟가락만 버렸네!!”우리는 이런 체험에 매이는 일이 많은데... 조심해야 합니다. 헌데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있습니다. 보통 숟가락이 휘어지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물력으로 된 것입니다. 헌데 물리적인 힘이 없이 휘어졌다면 무슨 힘이 작용한 것입니까? 영적인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리적인 힘이 작용하는 보이는 세계가 있고,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눈이 열리길 바랍니다. 예전에 신앙생활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가난하고, 시댁으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고, 특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얼마나 고난을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런데도 얼굴은 늘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도...늘 찬송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주님만 따라가리 / 내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이런 힘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거듭났기에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보고 있기에 어떤 상황속에서도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결국 니고데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의 눈을 의식하고, 자신이 누리는 것을 포기할 수 없어서 주님을 남몰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태도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자리, 산헤드린의원이라는 직책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기보다 주님을 위해서 쓰는 도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같은 산혜드린 의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주님의 시신을 장사지내 드렸습니다. 이 때는 주님의 제자들마저도 다 도망을 친 후였습니다. 헌데 니고데모는 향품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몸을 닦아 드리고, 자신을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수의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의 싸늘한 시신을 쌌던 수의는 사흘 만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고, 주님이 부활하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니고데모는 사람들의 눈치보다 오직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더 이상 구차하게 남의 눈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인정보다 주님에 대한 순종이 더 중요함을 깨닫고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니고데모가 완전히 거듭난 증거였습니다. (적용)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문제들로 인해서 바쁜 걸음을 재촉하시더라도 잠시 가던 길을 멈추시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저와 여러분이 니고데모가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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