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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하나님의 설교 이병수목사 2012-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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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0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출애굽기 8:8-13

제목:계속되는 하나님의 설교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 무엇인지 기억 하십니까? 한 번 해 볼까요? ‘피개이파 온독 우메암장’입니다.

7-11장까지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하루 빨리 깨지는 것이 은혜라”라는 것입니다. 내가 혹시 바로는 아닌지? 내 안에 바로와 같은 굳은 마음은 없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루 빨리 하나님 앞에서 깨지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깨진 마음에 은혜와 평강과 회복을 주십니다.

2.둘째로 내가 만약 모세라면...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은 ‘나는 너희가 심판자의 삶이 아니라, 구원자의 삶을 살기 바란다. 나는 너희가 살리는 인생이 되길 바란다’고 하시는 것이예요. 오늘 본문을 보세요. 누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바로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 바로는 높은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그 앞에 서 있습니다. / 바로는 화려하고 값비싼 황제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땀 범벅이 된 허름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 바로는 황제의 홀을 들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양 떼를 치는 지팡이 하나 들고 있습니다. / 지금 바로가 거하는 왕궁에 있습니다. 바로의 부하들에 싸여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바로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앞에 선 모세와 아론은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적용)이 모습이 마치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신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어리 석어 보입니다. 미련해 보입니다.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 합니다. 신자의 삶이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식, 세상 논리, 세상 가치관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저들이 볼 때는 바보처럼 보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 본다고 그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창피하게 생각하지 말고, 도리어 영광스럽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신자들이 어리석고, 연약해 보일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페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바로 앞에 선 모세와 아론이 초라해 보이고, 연약해 보여도 실상은 모세와 아론이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나와 내 백성에게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라” 누가 누구에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까? 바로가 모세에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는 모든 것을 다 갖고 모든 능력이 다 있는 것 같아도 실상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예화)우리 성도들 가운데 고난을 만나면 그 분야 전문가를 찾아가기 전에 저에게 찾아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프면 의사 찾아가고, 법적인 문제 있으면 변호사 찾아가야 하지만, 먼저 목사님을 찾아와 기도를 받습니다.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에도 찾아와 도움을 구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목사가 전문가들 보다 더 전문적이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목사님을 찾는 이유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저희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르나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승리할 수 있음을 믿기에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요. 이것은 신자들이 갖는 권세인 것입니다.

 

바로는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을 때, 모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이 재앙이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 때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를 괴롭게 하더니 벌 받아도 싸다! 이 기회에 망해 버려라!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애굽은 원수 같은 사람입니다. 이 기회에 망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이런 마음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성서의 예)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셔야 했습니다. 헌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반대합니다. 하는 수 없이 먼 길을 돌아 가야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주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다 멸하소서” 부드럽게 표현해서 이렇지, 얼마나 과격한 표현인지 모릅니다. 성질이 불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그들을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서 다른 길로 가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마음이 야고보와 요한 같아서는 안됩니다. 물론 나중에 이들은 사랑의 사도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만은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은 심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때는 이 때다! 맛좀 봐라!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살리는 인생돕는 삶을 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12-13절을 보겠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떠나 나가서 바로에게 내리신 개구리에 대하여 모세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애굽에 재앙을 내리는 근본 목적은 애굽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헌데 바로가 끝까지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화를 자초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신 목적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애굽인들도 회개하길 바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품어야 태도입니다.

(예화)금이 간 항아리라는 인도 우화를 혹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 어깨에 지게를 지고 물을 날랐습니다.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하나 씩의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왼쪽 항아리는 금이 간 항아리였어요. 물을 가득 채워서 출발했지만, 집에 오면 왼쪽 항아리의 물은 반쯤 비어 있었어요. 금이 갔기 때문이예요.

반면에 오른쪽 항아리는 가득찬 모습 그대로였어요. 늘 왼쪽 항아리는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나 때문에 항상 일을 두 번씩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금이 간 나 같은 항아리는 버리고 새 것으로 쓰세요." 그때 주인이 금이 간 항아리를 데리고 늘 물을 길어 오는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나도 네가 금이 간 항아리라는 것을 알고 있단다. 네가 금이 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바꾸지 않는 것은 우리가 지나온 양쪽 길을 바라보아라. 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오른쪽 길에는 아무 생명도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이지. 헌데 네가 지나온 왼쪽에는 아름다운 꽃과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지 않니? 너는 금이 갔지만, 너로 인해서 많은 생명이 자라나게 되었단다. 얼마나 아름다우냐? 나는 그 생명을 보며 즐긴단다."

 

많은 사람들은 완벽함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포장합니다. 금이 간 것을 숨깁니다. 약점을 보이면 이용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금이 간 자신의 모습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금이 간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 낙심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금이 가면 어떠냐? 금이 간 대로 살리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돕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상처가 있으면 어떻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상처를 치유 받고, 내가 상처 받은 경험을 남들을 위로하는데, 사용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상처 입은 치유자의 삶을 살기 원하세요. 세상이 왜 자꾸 삭막하게 됩니까? 너무 완벽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숨이 막히고, 점점 더 강퍅해져 가는 것입니다.

(예화)영국 의회에 어떤 초선 의원이 있었습니다. 의회에서 연설을 하는데, 청산유수로 너무나도 완벽한 연설을 했습니다. 연설을 마치고 난 다음에 연설의 대가인 윈스턴 처칠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연설에 대해서 평가를 해 달라고 했어요. 물론 처칠로부터 ‘탁월한 연설이었다’라는 평가와 칭찬을 기대하고 한 질문이었어요. 헌데 윈스턴 처칠의 대답은 의외였어요. “다음부터는 말을 좀 더듬거리게!! 너무 완벽하면 사람이 정 떨어진다네”

 

금이 간 아내입니까?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상처를 감싸주고, 부족한 것은 채워주고, 있는 그래도 사랑하며 사는 것 아닙니까? 허물 많고 실수 많은 남편입니까? 가정 안에서만큼은 허물도 용납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정에서 마저 위로받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금이 간 항아리들이지만, 서로 돕고 사랑하라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 있으시지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자랑하는데 사용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믿었더니 내가 이렇게 복을 받았다’라고... 자랑하는데만 쓰지 말고, 그것을 갖고 돕는데 사용하십시오. 돕는 것이 축복입니다. 돕는 것이 능력입니다. (예화)가끔 저희 아이 주영이가 아빠를 돕겠다고 합니다. 말은 고맙죠. 허나 뭘 얼마나 돕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아이들을 돕겠지요. 왜요? 저는 아이를 도울 만한 힘과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내가 도울 능력이 있다는 것이니까 복된 것입니다. 주님도 그러셨잖아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줄 수 있다는 것이 복이지요.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영광이지요.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끊임 없이 우리를 돕는 자이십니다. 사무엘하 22장 1-3절에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높은 망대시오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이시오 나의 구원자이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공한 요셉이 성공을 간증하러 다녔나요? 성공을 자랑하러 다녔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공을 많은 사람들을 돕는데, 살리는데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살리는 인생이 되십시오. 구원자의 삶을 사십시오. 주님이 주신 것으로 돕는 자의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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