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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들더라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 이병수목사 | 2012-08-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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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5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출애굽기 17:1-7 제목:힘들다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글 중에 <집 지은 사람의 잘못일까?>라는 것이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어렸을 때, 그의 집에는 매우 좋은 도자기들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도자기들을 아끼며 소중히 여겼습니다. 톨스토이의 여동생은 그 도자기들 중에서도 가장 예쁜 것을 달라고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졸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것을 선뜻 딸에게 내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톨스토이의 여동생은 또 다시 아버지에게 그 도자기를 달라고 강력히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쯤 되자 아버지는 딸에게 "그래,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니 그것을 가지렴." 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동생은 그 도자기를 손에 꼭 움켜쥐었습니다. 오빠에게 보여주고 자랑도 하며 또 약을 올려주려고 오빠 방으로 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빠 방을 향해서 뛰던 여동생은 그만 문턱에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순간, 손에 들고 있던 그 도자기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났습니다! 여동생은 깨져 조각난 도자기를 바라보면서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을 지은 사람이 누구예요? 누가 우리 집을 이렇게 지어서 저를 넘어지게 했단 말이예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기 잘못, 자기 실수는 탓하지 않고, 그렇게 좋은 집을 지은 건축자를 탓하고 원망하는 이 여동생의 모습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잘 합니다.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서 우리가 먹게 했느냐? 아예 안 만드셨으면 될거 아니냐?’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불평이 왜 나쁩니까? 자신의 태도와 잘못은 돌아보지 않고,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는 것입니다. 자동차 사고가 나면 운전을 부주의하게 한 내가 잘못한 것이지,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 잘못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헌데 우리가 하나님께 이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광야 르비딤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곳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원망한 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 우리들의 원망과 흡사합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셨습니다. 앞에는 홍해바다가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공격해 오는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또한 가나안 약속의 땅을 약속으로 받고 애굽을 떠났습니다. 헌데 과정은 광야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시작도 하나님의 은혜요 마지막도 가나안입니다. 헌데 과정은 광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스타일입니다. 헌데 우리들의 원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 왜 광야냐?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들의 구원도 똑같습니다. 처음과 나중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구원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또한 결국은 천국에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승리를 맛볼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로서 영원한 상급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습니다. 광야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보세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신광야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생각대로 구원하셨으면 성공과 번영의 길로 인도해 주시지 왜 광야로 인도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함께 찾아 보겠습니다. <광야로 인도하시는 목적? 구원하신 백성들을 광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의 목적?> ①신명기 6장입니다. 4-9절입니다. “ ”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광야를 주신 목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서 어떤 복을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자신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주님의 기대입니다. ②신명기 7장 6-11절입니다. “ ”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③신명기 8장 1-3절입니다. “ ” 더 직접적으로 광야를 지나게 하신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야를 주신 목적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자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가장 중요한 것은 너희는 떡을 위해서만 사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이 되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현실과 상황에 매여서 넘어지는 인생이 아니라, 환경을 뛰어넘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떡만을 위해서 혈안이 되어 사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백성들 답게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들이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한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복을 받았느냐?를 자랑하는 인생이 아니라,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자랑하고, 그것 때문에 감사하고, 그 것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자들이 되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대는 우리들이 조건에 만족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조건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나님을 드러내 보라는 것입니다. (성서의 예화) 마태복음 25장에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그러면서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의인들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언데 주님에게 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자 주님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또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하시면서 “저주받을 자들이여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신자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신자다운 삶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환경이 어렵다고 신자다운 삶을 사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좋지 않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양과 같이 성도의 본분을 다할 때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헌데 조건이 나쁘다고 책임도 다하지 않고, 불평과 원망을 하며, 게으르게 살아간다면 그는 악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광야를 주신 목적을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목적은 성공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성숙함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광야와 같은 길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과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믿는 자다운 삶을 사는 것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떡으로 만족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족해 하는 자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적용)이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거룩함에 대한 싸움입니다. 내가 아끼는 도자기가 깨졌다고 집을 왜 이렇게 지었느냐고 원망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힘든 것 충분히 이해합니다. 불평할 수 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먹을 것이 없다고 했을 때, 마실 물이 없을 때,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심판하시지 않았습니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들의 고통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백성이기에 광야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힘들다고 왜 나를 구원하셨냐고? 괜히 하나님을 믿어서 이렇게 손해 보면서 살게 되었다고는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광야에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입니까? 므리바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맛사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2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그들은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므리바요 맛사입니다. 므리바는 ‘서로 심히 다투었다. 들이대었다’는 말입니다. 맛사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1)절대로 사람과 다투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므리바 인생이 되지 않게 하라. 르비딤을 후에 사람들은 므리바라고 불렀습니다. 이유는 이곳에서 마실 물이 없다고 모세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들이대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심하게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 마실 물이 없으면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인도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면 조금 참고 인내하면 틀림없이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가운데도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그곳을 므리바가 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이 므리바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①자녀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녀와 다툼으로 해결하시렵니까? 부부는 ‘서로 당신 때문이다. 당신이 책임을 다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이다’라며 서로 원망할 것입니까? 부부싸움을 하는 그곳이 바로 므리바입니다. ②경제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③질병으로 고생할 수 있습니다. ④신앙 좋고 기도 많이 하는 성도의 자녀라도 다 잘되는 것 아닙니다. 신앙 좋고 기도 많이 한다고 술술 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 때마다 폭발할 것입니까? 원망하고, 다른 사람들 탓하고, 다투고, 들이댈 것입니까?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서로 다툼으로 인해서 영광을 가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므리바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여러분은 다투는 자리에 서지 말기 바랍니다. (2)또한 절대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맛사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어렵고 힘들다는 것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당신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지, 왜 이렇게 어려움을 주시나?하는 의심을 들 때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 순종했는데 왜 고난인가?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쉽게 원망하지 마십시오. 조금만 참고 인내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구원했으면 책임을지지 왜 이렇게 힘들게 하나? 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예화)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옛날에는 마차를 타고 다니던 때였는데 아버지가 멀리 출타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멀리 와서 만날 사람을 만나고 볼 일을 다 보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던 길에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한 사람을 더 만나고 올 테니 너는 여기에서 어디 가지 말고 아버지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만날 사람을 만나고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아들과 함께 오는 것을 잊어버리고 혼자만 집에 온 것입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아들이 달려 나와 아버지를 맞이하는데 아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때 생각하니 아들을 길에 내려놓고 자기만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룻밤을 꼬박 달려가서 아들을 찾게 되었습니다. 가면서 후회도 하였고,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길에 서있는 것을 본 동네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집에 들어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다면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온 밤을 꼬박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아버지가 정신 없이 달려와 보니 있으라는 자리에 아들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다리면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 자리에서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헌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불안해 합니다. 의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합니다. 조금만 조건이 안 좋아지만 여기저기 사람을 찾아 헤맵니다. 믿음의 자리에서 꼼짝 않고 기다리면 아버지가 오실텐 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성서의 예)성경에 보면 응답이 지연될 때가 있습니다. (예1)75세에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네게 아들을 주어 그 아들로 하늘에 별과 같이 네 후손이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헌데 일 년이 되어도... 5년이 되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불안해 지기 시작합니다. 아내의 경수가 끊어졌습니다. 결국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하갈을 취해 인간적으로 아이를 낳는 실수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응답은 25년이라는 시간이 걸려서 응답되었습니다. (예2)예수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중병이 들었습니다. 주님을 급히 모시러 사람을 보냈습니다. 헌데 주님은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나흘이 지난 뒤에 오십니다. 이미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헌데 완전히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시면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아이처럼 아버지의 사랑과 약속을 굳게 믿고, 아무리 어려운 현실이 벌어져도 절망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입니다.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사랑만큼은 의심하지 마십시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능력만큼은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 시간 함께 찬양을 드리기 원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결코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쉬운 길 아닙니다. 넓은 길도 아닙니다. 영광 받는 길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믿기에 가는 것입니다.) “나의 가는 이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주님을 믿고 가지만 현실은 두려움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잘 가고 있는 것인가?하는 염려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절대로 시험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라”(어떤 조건을 주셨던지 달려가야 합니다. 일어나 노래해야 합니다.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결국은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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