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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비딤의 갈림길에서 이병수목사 201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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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2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출애굽기 17:8-16

제목:르비딤이라는 갈림길

오늘 본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 르비딤에서 만났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신 목적은 단지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라는 과정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쉽고 빠른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마라를 지나 신광야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르비딤에 도착하게 됩니다.

 

1.르비딤이라는 삶의 자리를 생각하기 원합니다. 르비딤의 원래 이름의 뜻은‘쉬다, 진을 치다’라는 뜻입니다.

르비딤은 훗날에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됩니다. 지난 주에 살펴 본 바와 같이 므리바라고도 하고, 맛사라고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곳이 여호와 닛시로 불리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용)우리는 지금 르비딤에 있습니다. 훗날 르비딤을 어떤 자리로 만들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지나온 삶의 발걸음을 뒤돌아 볼 때에 므리바와 맛사와 같이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기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여호와 닛시와 같이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고 싶으십니까?

①므리바는 마실 물이 없음으로 ;서로 다투었다‘는 뜻입니다. 서로 책임을 미루고, 화를 내고, 원망하며 싸운 곳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므리바가 되기를 원치는 않으실 것입니다.

②맛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분의 능력을 믿지 못하여 두려워 했다는 것입니다.’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치면 불안해 하고 낙심하고, 조바심을 내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맛사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③반면에 르비딤은 훗날‘여호와 닛시’가 되었습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내가 승리했다.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하나님으로 인해 나는 승리자라는 고백을 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의 자리인 르비딤이 어떤 이름으로 기억되시길 바라십니까?

 

혹 지금까지 므리바와 맛사의 자리였다해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부어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 삶이 므리바였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에 므리바와 같은 모습이 있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여, 불안해 하고, 두려워 하고. 염려하는 삶을 살았다해도 괜찮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십시요.

(예)종종 모태신앙인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나는 바울처럼 한 특별한 경험, 초자연적인 체험이 없을까? 그러면 늘 따라가는 설명이 있습니다.

신앙의 유형은 3가지 있다고 합니다.

①바울 형 ②베드로 형 ③디모데 형이 있다고 합니다. 허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들이 거듭나는 체험은 다양합니다. 허나 거룩한 성도로 세워져 가는 성화의 과정은 같습니다. 바울처럼 부름 받았든지, 베드로처럼 부름 받았든지... 아니면 디모데처럼 부름을 받았던지 주님의 제자로 성숙케 되는 과정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평생 걸립니다.

바울을 보세요. 바울이 한 순간에 바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나는 왜 이렇게 성숙이 더딜까? 왜 이렇게 나를 통해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하지만 바울도 그랬습니다.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다소에서 14년이라는 시간동안 이 질문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이 과정의 시간을 지나서 바울은 성숙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도 연약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부름받아 3년을 동행했지만, 시험을 만났을 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들도 얼마나 자주 넘어집니까? 괜찮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기다려 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를 세워 가셨습니다.

 

디모데는 참 평범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루 하루 반복되는 신앙생활처럼 보였고, 특별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주님은 그를 날마다 성숙케 하셨고, 어느 순간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르비딤에 살고 있습니다. 이 르비딤을 어떤 땅이 되게 하시렵니까? 므리바가 되게 하시겠습니까? 맛사가 되게 하실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르비딤을 여호와 닛시가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여호와 닛시가 되게 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깃발을 흔들며 믿음으로 나가는 가정이 되셔야 합니다. 서로 다투고, 원망하고, 책임을 떠넘기며,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하는 자리에 서지 않기를 주님은 바라십니다.

여러분의 직장이, 학교생활이, 교회생활이 여호와 닛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2.그러면 어떻게 르비딤을 ‘여호와 닛시’가 되게 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르비딤에서의 삶은 영적 전쟁과 같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첫째로 영적 전쟁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아말렉은 누구입니까? 창세기 36장 12절에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낳았으니”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입니다. 후에 그는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는 족장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핏줄이라는 것입니다. 에서의 핏줄이면 이스라엘과 민족과는 한 혈통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이니 에서의 후손과는 피를 나눈 형제들입니다. 헌데 아말렉족속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공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명기에서 더 정확히 이들의 존재를 말합니다. 신명기 25:17-18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아말렉 족속의 삶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정욕대로 욕심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훗날에 아말렉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대적하는 악한 어둠의 세력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악한 마귀와 그의 종들인 귀신들의 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싸움의 대상은 악한 마귀의 어둠의 권세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2)둘째로 르비딤을 여호와 닛시가 되게 하려면, 아말렉의 공격 대상이 누구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앞서 읽어드린 신명기 말씀에 나타난 대로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틈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누굴 쳤다고 합니까? 아말렉 족속은 전면전을 시도한 것이 아닙니다. 열어 지어 가던 중에 피곤해서 뒤에 쳐진 약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을 뒤에서 공격한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특징입니다. 마귀의 밥이 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렬에서 뒤처지는 사람들입니다. 시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의 강철대오를 이루고 전진하는 성도들은 두려워 달려들지 못합니다. 허나 행령에서 뒤처지고, 영적으로 힘들어하고, 시험 들어 있는 성도들을 집중 공격하는 것입니다.

 

(예화)베드로가 시험에 들 때도 이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막 14:54)

중요한 말씀은 ‘예수를 멀찍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시험에 들기 시작한 전조가 예수님을 ‘멀찍이’에서 따랐다는 말입니다. 예배에서 멀어지시면 안 됩니다. 예배를 자주 드리시다가 여러 이유로 멀어지시면 시험에 듭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멀어지시면 안 됩니다. 방황을 하더라도 교회 안에서 하셔야 합니다. 목장모임이나 소그룹 모임에서 멀어지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 너무 열심이어서 주님보다 앞서 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주님을 가까이에서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큰 소리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에서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가까이 따를 때 마귀는 대장되신 주님을 보고 두려워 도망가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목자되시는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를 주신 목적)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너무 힘들고 어려우면 기도도 안됩니다. 찬송도 안 나옵니다. 어쩔 수 없이 뒤쳐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영적으로 피곤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모세가 기도하는데 피곤하여 손이 내려왔습니다. 인간인지라 손이 내려올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손이 내려올 수 있습니다. 남편의 손이 내려올 수 있습니다. 아내의 손이 내려올 수 있습니다. 장로님들의 손이 내려올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잡아 주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아론과 훌은 모세의 가족들이었다고 합니다. 아론은 모세의 친 형이었고, 훌은 모세의 여동생 미리암의 남편 즉 모세의 매제였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볼 때 가족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식구들이 아닙니까?

(적용)①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 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야 합니다. 피곤하고 뒤처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때에 혼자 거하시면 안 됩니다. 소리쳐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셔야 합니다. 심방 오셔서 예배를 드려달라고 하셔야 합니다.

②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은 뒤처지는 사람들을 보시면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왜 못 쫓아 오느냐고 나무라면 안됩니다. 오히려 진을 구축하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함께 머물러 경계근무를 서 주셔야 합니다. 혹 우리 성도들을 마귀가 시험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꾸 살펴보셔야 합니다. 전화도 해 주시고, 만나서 식사도 하시고, 격려를 해 주셔야 합니다. 교회성도들은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시되 너무 멀리서 따르지 마시고, 적극적으로 가까이에서 따르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섬기는 태도도 너무 거리를 두고 섬기지 마시고, 가까이에서 섬기시기 바랍니다.

 

(3)셋째로 르비딤이 여호와 닛시가 되게 하려면 악한 마귀가 언제 공격해 오는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시도 때도 없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고 했습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①먼저 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할 때입니다. 내가 불평하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있을 때에 마귀가 그 틈을 타고 들어옵니다.

②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함에도 하나님이 반석에서 물을터지게 하셔서 마시게 했습니다. 백성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와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 물을 마시고 얼마나 백성들이 기뻤겠습니까? 이처럼 시험은 기쁘고 감사할 때도 옵니다. 성공할 때도, 섰다고 방심할 때에도 옵니다.

보세요. 시험은 시도 때도 없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 말씀대로 늘 깨어 기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4)그러면 넷째로 어떻게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까?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떤 전략을 갖고 싸워야 합니까?

“균형 잡힌 행동”이 필요합니다.

①하나는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 ”

 

이것은 여호수아의 역할입니다.

(예화)신학대학원 입학을 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헌데 이분은 공부는 하지 않고 기도만 합니다. 금식하며 기도하고, 철야로 기도하고, 새벽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시험시간이 되었습니다. 시험지를 받으니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모르나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이러면 안 되겠지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그 시험지를 받아든 교수님은 이렇게 채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합격, 당신은 불합격!”

 

②또 하나는 초자연적인 준비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역할입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계획만으로는 안 됩니다. 플러스 알파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산꼭대기로 올라가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역할은 중보기도의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역할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이 두 역할을 균형있게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행동과 초자연적인 행동을 균형있게 해야 합니다. (예화)하루의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균형 있는 신앙생활은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과 하루를 마감하는 마지막 시간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손을 들어야 합니다. 또한 남은 시간에는 최선을 다해서 달려가는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화1)예전에 콕스 부부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콕스 부부는 큰 아이와 갓 태어난 아이를 두고 있는 평범한 가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헌데 콕스가 직장을 잃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지만 기도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로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남편 콕스에게 은혜를 달라고 부부는 날마다 기도를 드립니다. 헌데 이들이 기도만 드렸습니까? 아닙니다. 남편은 나가 하루 종일 입사 원서를 내며 직장을 알아 보았습니다. 200번이 넘도록 지원원서를 내고 결국 직장을 얻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우심도 구하지만, 동시에 원서를 작성해서 지원하는 상식적인 행동도 합니다.

(예화2)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산상수훈에서 신앙인을 피아노 연주자로 표현을 합니다. “유명한 교향곡을 연주할 때 악보대로 틀리지 않게 연주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하지만 연주자의 어떠한 영감도 없이 기계적인 연주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고, 그 곡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곡에 대한 영감은 넘치지만 기본적인 악보대로 연주하지 못하면 이 역시 그 곡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피아노를 잘 연주하려면 상식적으로 철저한 연습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영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과 신앙의 삶은 마치 악보와 영감처럼 떨어 질래야 떨어질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③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최종적으로 이 전쟁의 승부처는 어디에서 결정되는 것입니까? 보이지 않는 데서 결정되었습니다.

10-11절입니다. “ ”

전쟁의 승패가 어디에서 갈렸습니까? 산 꼭대기에서 갈렸습니다.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손을 드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항복하면, 하나님이 승리를 주십니다.

기도의 손을 내리지 말기 바랍니다. 12절 하반절에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입니다.“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결국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헌데 보세요. 15절입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무슨 말입니까? 이들이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잘 싸운 여호수아도, 기도 열심히 한 모세도 승리의 공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승리의 원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승리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얻은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르비딤은 불명예를 벗고, 결국 여호와 닛시가 된 것입니다.

지금 르비딤에 있습니다.

므리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맛사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도리어 하나님 앞에 손을 들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뛰십시오. 성실하십시오. 그러나 산으로 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열심히 뛰었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주님께 기도의 손을 들었느냐?입니다. 가정이라는 르비딤, 직장이라는 르비딤, 사업이라는 르비딤, 교회라는 르비딤에서 승리하시기 원하신다면 기도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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