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질문(3)-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이병수목사 | 2013-04-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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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이 있습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나쁜 질문은 나쁜 것을 생각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예1)학교에서 돌아오는 자녀에게 ‘오늘은 말썽 안 피웠냐? 사고치지 않았어?’하면 말썽부린 것을 생각합니다. 사고친 것을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니 있습니다. 그러면서 대답은 ‘없어! 없다구! 내가 사고만 치는 사람이야!’하고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이왕이면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었니? 친구들과 재미었니?’하면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었나? 아 있었다. ‘오늘 점심이 맛있었어요. 오늘 종례가 일찍 끝났어요. 체육시간이 재밌었어요.’합니다. (예2)하루 종일 일하고 피곤하여 들어오는 남편에게도 “얼굴이 왜 그래! 기분 나쁜 일 있어?”이러면 빵점입니다. 그러면 기분 나쁜 일을 생각합니다. 오늘 기분 나쁜 일 있었나? 아! 그 사람 때문에 열 받았었지!’생각하면 다시 기분 나빠집니다. 이왕이면 좋은 질문을 하세요. 좋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질문을 하시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 자체의 마지막 장인 동시에 4복음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의 이야기는 요한복음의 결론인 동시에 4복음서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질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똑같은 질문을 세 번 반복하여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동일하게 세 번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세 번 물으신 이유는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 대제사장 집 뜰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묻고 싶은 질문이 많았을 것입니다. 할 말도 많았을 것입니다. 혼을 내실 수도 있습니다. 화를 내실 수도 있습니다. 헌데 다른 말씀은 일체 하지 않습니다. 다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첫째는 사랑하면 올 킬이다. 사랑하면 다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하면 희생합니다. 사랑하면 즐겁습니다. 행복합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지식이 많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을 현대적인 용어로 바꾸면 ‘아무리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차를 타고, 돈을 많이 벌어도 사랑받고,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1)사람들은 행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젊은 부부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꿈이 있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날을 위해서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서로 볼 시간도 없이 맞벌이를 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돈을 벌었습니다. 넓은 집도 장만했습니다. 좋은 차도 타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헌데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서로를 바라 보아도 애틋한 마음이 없습니다. 다 갖았다 해도 사랑을 잃으면 다 잃은 것입니다. 마음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어떻습니까? 사랑하고 있습니까? 가슴이 뛰고 있습니까? 사랑으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를 알고 싶으신 것입니다. 왜 신앙생활이 힘듭니까? 기도하는 게 힘들고, 예배드리는 것이 힘듭니까?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되 적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희생하는 것이 쉽습니다. 다 잃어도 사랑하는 마음은 잃어버리시면 안됩니다. 잠언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귀는 마음을 흔듭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확실하다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2.그러나 문제는 내 안에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똑같은 질문을 세 번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베드로도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헌데 헬라어 원어로 보면 똑같은 질문! 똑같은 대답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만 헬라어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4가지가 있습니다. ➀남녀간의 사랑? 에로스입니다. ➁가족들간에 사랑? 스토르게입니다. ➂친구간의 사랑? 필레오입니다. ➃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아가파오 메’라고 물었습니다. 아가페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필로쎄’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아가페로 주님을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허나 필레오로는 사랑합니다.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주님은 다시 한번 ‘아가파오 메’아가페로 사랑할 수 없단 말이냐? 베드로는 여전히 ‘필로쎄’‘주님 저를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지는 못하나, ‘필레오’로는 사랑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세 번째로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번에는 필로쎄 메’해석하자면, “그래! 네가 정녕 필레오의 사랑으로는 날 사랑하느냐? 필레오로는 사랑할 수 있겠느냐?”자신 있게 대답하던 베드로는 대답을 못합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왜 베드로가 근심한 걸까요? 근심하였다는 말은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다거나 비탄에 빠지다”는 뜻입니다. 왜 베드로는 자신감 있게 대답하다가 주님이 ‘그럼! 네가 필레오로는 날 사랑하느냐?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에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말 할 수 없는 비탄에 빠진 걸까요? 그건 자기 자신 안에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때가 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큰 소리를 쳤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 지라도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그럴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은 아닙니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는 진심이었습니다. 헌데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제사장들과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다른 제자들은 다 주를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멀찍이에서 따라갔습니다. 결국 대제사장의 집에서 일하는 여종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주님이 세 번째 ‘필로쎄!로는 날 사랑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실 때, 자신의 연약함이 오버랩 되면서 쿵!!하고 마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아!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헌데 내 안에는 주님을 사랑할 근거도 여지도 없구나! 주님을 사랑할 마음을 지킬 능력도 힘도 없구나! 난 너무나 연약한 존재구나! 상황에 따라서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사람이구나!’그래서 근심한 것입니다.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진심이나, 그 마음을 지킬 힘이 내게 없습니다. 주님이 사랑할 힘과 능력을 주셔야 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내 결단, 내 의지, 내 노력, 내 힘으로는 아가파오는 커녕, 필레오도 못합니다. 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길 원하는 것이 진심이지만, 그 마음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주님이 힘을 주셔야 합니다. 주님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적용)정말 그렇습니다. 제 안에는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해야지! 하면서도 은혜가 떠나가면 판단하고, 정죄하고, 섭섭해집니다. 3.그러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사랑받은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1)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배신한 사람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무엇을 하려고 찾아가신 것입니까? 비난하기 위해서요? 질책하기 위해서요? 복수하기 위해서요? 아닙니다. 걱정되어서입니다.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 세상은 힘 없는 사람이 힘 있는 자를 찾아갑니다. 허나 주님은 사랑의 힘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에게 등을 돌렸던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사랑을 회복하십니다. 사랑의 시작은 찾아 가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2)둘째로 먼저 말을 걸어 주셨습니다. 5절에 보면 주님은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은 사랑하는 딸을 부르는 자상한 아빠의 말입니다. “야!! 야!! 어이!!! 거기!!!”이런 말이 아닙니다. 잘못을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볼 면목이 없습니다. 그 때 사랑은 말을 걸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아홉 시간에 걸쳐서 하나님의 질문, 예수님의 질문을 살폈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질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시는 것입니다.” ❶선악과를 따먹고 면목이 없는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❷동생을 죽이고 분노와 두려움 가운데 있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❸잊혀진 자로 40년을 광야에서 보낸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❹추운 겨울, 깜깜한 밤에 절망가운데 있는 예레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살구나무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절망 중에 죄악 중에 신음하는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보여주시는 주님이십니다. ❺38년 동안 누워있는 산송장 같은 병자! 아무 기대와 소망 없이 살아가는 자에게 찾아 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치유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❻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찾아 오셔서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3)주님의 사랑은 상을 차려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와서 조반 먹으라!”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면 피곤함이 덜 했겠지만,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빈 그물입니다. 얼마나 배고프고, 피곤하겠습니까? 그 때 다른 말씀 안하시고, 밥 먹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코 끝이 열려야 마음이 열린다.” 수고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밥이나 한번 먹자! 맛 있는 거 사줄게! 나와라!”해보세요. (저도 요즘 힘들어요? 하하!!!) 왜 그랬냐? 또 그럴거냐? 한 번 더 그러면 재미없다! 아무 말하지 말고, 상을 차려 주는 것입니다. (4)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구원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무엇입니까? 다시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3년 전에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주님이 주셨던 사명이 무엇입니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헌데 지금 그 사명을 잃어버리고, 바닷가에 와 있습니다. 이 사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들을 사랑해라! 주님의 양들은 성도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도들을 잘 돌보고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❶주님은 처음에는 내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아르니온’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 양입니다. ❷둘째로 내 양을 치라할 때 양은 ‘프로바티온’입니다. 한참 자라는 양들, 청소년, 청년기의 양들입니다. ❸셋째로 내 양을 먹이라에서 양은 ‘프로바톤’입니다. 다 자란 양입니다. 성장이 멈춘 양입니다. 장년의 양들입니다. 보세요.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차별하지 말고, 하나님이 믿고 맡겨 주신 양들을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오순절 날 성령의 능력을 받고 어떻게 주님을 사랑했습니까? 필레오를 넘어 아가파오 했습니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주님을 위해서 양떼들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예화)다음 주일 저녁 예배 설교해 줄 목사님은 김용구목사입니다. 제가 아끼는 후배 목사입니다. 함께 축구도 하고, 건강했던 목사님이었습니다. 헌데 심장에 급성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응급조치로 생명을 건졌지만, 한동안 뇌에 산소가 공급 되지 않아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헌데 지금은 다른 데는 이상이 없고, 두 다리만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고 있습니다. 이 사건도 큰 사건 아닙니까? 얼마든지 낙심할 수 있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헌데 최근에 만나 식사를 했는데, 너무나 밝고 건강해요. 무엇보다 감사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거예요. 죽을 수 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은 살려 주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다리가 아니라, 뇌가 마비되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냐?는 거예요. 사랑하는 아내, 아들들도 보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도 전할 수 없었을 텐데... 다리이니 얼마나 감사하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자, 원망은커녕 감사하고 있더라구요. 주님을 더 사랑하고 있더라구요. 이렇게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자신에게 향하신 뜻이 있을 것을 믿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복지도 전공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구나! 깨닫는다면 고난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주님이 능력주시면, 우리들도 필레오를 넘어 아가페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그래서 뜨겁게 사랑하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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