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세계는 은혜의 세계 | 이병수목사 | 2013-06-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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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마태복음 강해(2) 성경:마태복음 1:1-6 제목:은혜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들어 가시는 세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들어 가시는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1.첫째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영원한 생명 갖은 자로서 이 땅을 사는 예수의 사람이라면 죽음을 바라보는 눈! 천국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죽음을 생각하셨습니까? 천국을 생각하셨습니까? 우리는 땅에 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돼지는 목 뼈가 아래쪽으로 굽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고개를 들어도 수평 이상을 올릴 수 없습니다. 돼지는 평생 땅바닥만을 바라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돼지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헌데 돼지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평생 땅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돼지가 하늘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뒤집히는 경험을 할 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뒤집히는 변화가 있을 바랍니다. 땅만 보고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 무얼 입을까? 살아 오셨다면, 영원한 생명을 갖은 자답게,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어떤 성도들은 천국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합니다. 천국에서도 예배하고 찬송한다고 큰일 났습니다. 여기에서 한 시간도 힘든데, 어떻게 영원히 예배할 수 있습니까? 천국도 지루할 것 같습니다. 또 지옥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차츰 적응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뜨거워 놀래지만, 일년, 이년, 한 10년 가면 따뜻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사람들은 불가마를 워낙 좋아해서요. 지옥에서도 적응할 것 같아요.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땅과 천국에서의 시간개념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요? 이 땅에서는 현재가 없습니다. 현재가 없다고 한 때도 벌써 과거가 되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과거와 미래만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래를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왕이면 과거에 매여 아파하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며 살기 바랍니다. 헌데 천국에서는 과거가 없습니다. 미래도 없습니다. 지금은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지루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은 죽을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니까 적응하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은 “아!!! 좋 - 으 - 으 - 다”이게 영원한 것입니다. 지옥은 “앗 뜨거워! 못살겠네!”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현재만 있는 것입니다. 알아서들 결정을 하세요. 예수님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땅에서도 행복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둘째로 예수님이 만들어 가시는 세계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서 가장 두드러운 특징 중에 하나는 다섯 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히브리 족보에는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는 여인들의 이름이 오르지 못했습니다. 헌데 2000년 전에 마태는 여인들의 이름을 족보에 올리고 있습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밧새바, 마리아입니다. 헌데 성경을 조금 아시는 분들은 마리아를 제외하고 4명의 여인들이 어떤 여인들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절대로 족보에 오를 수 없는 올라서도 안 되는 수치스러운 여인들이었습니다. 율법으로 보면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사람이요. 돌에 맞아 죽을 여자들입니다. 헌데 이들의 이름이 당당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인류의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 여인들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세계는 은혜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저히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아무 대가없이 받는 것입니다. 값 없이 거져 받는 것입니다. 생명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들은 다 은혜로 주셨습니다. 공기, 물, 땅, 하늘, 생명, 나라, 가족 모두 은혜로 받은 것들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으면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나의 모든 죄가 사함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신분의 변화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천국을 주셨습니다. 보세요. 은혜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세계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은혜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1)다말을 보세요. 다말은 야곱의 12아들 중에 넷째 아들로 태어난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헌데 시아버지를 성적으로 유혹해서 자식을 낳은 여자입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보통 같으면 감추고 싶은 과거 아니겠습니까? 헌데 예수님의 족보에 버젓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둘째는 기생 라합입니다. 라합은 이방여인입니다. 그것도 직업이 기생입니다. 기생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포르네’라는 말입니다. 영어로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포르노’라는 말이 왔습니다. 라합은 한 마디로 매춘부라는 말입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는 여인입니다. 어떤 사연으로 몸을 파는 기구한 인생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감추고 싶은 깊은 아픔과 상처를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헌데 이 모든 수치스러운 과거와 아픔과 상처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극복한 여인입니다. 아시지요. 히브리서 11장에 당당히 올라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3)다음은 룻입니다. 룻은 결정적인 약점은 모압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모압 사람들은 영원히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율법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고생할 때 떡과 물로 도와 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발람선지자를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보세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환난중에 돌아보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세요. 또한 축복하는 인생이 되어야지 저주하는 인생이 되면 절대로 안됩니다. 헌데 놀라운 것은 모압 여인인 룻이 당당히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것도 룻의 믿음입니다. 룻은 효부이면서 동시에 신실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었습니다. 룻은 열등감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4)그리고 밧새바입니다. 밧새바는 밧스 = Bath 목욕하다는 말과 바=날 봐, 밧새 - 바는‘목욕하는 날 봐!’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해석일 뿐입니다. 솔직히 다윗도 잘못했지만, 밧새바도 잘 한 게 없습니다. 뻔히 보이는 곳에서 목욕을 할 것이 무엇입니까? 남편이 죽자 다윗이 부른다고 아내로 옵니다.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성경은 다윗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항상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라고 합니다. 정숙한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여인들은 하나같이 수치스러운 과거를 갖고 있는 여인들입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출생의 아픔을 갖고 있는 이방여인입니다. 음란한 여인들입니다. 헌데 이들이 당당히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오늘 날 우리 주변에서 이런 여인들을 만난다면 현대인들도 손가락질을 하고, 벌레 보듯 했을 것입니다. 헌데 이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립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혜로 거듭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믿음으로 남은 인생을 아름답게 살았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왜 마태는 이 여인들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기록했을까요? (1)자신도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본명이 레위입니다. 직업은 당시 세리였습니다. 세리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지요. 몸을 파는 매춘부와 같은 동급의 죄인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에 앞잡이가 되어 백성들의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 매국노, 쓰레기가 세리였습니다. 헌데 자신을 예수님을 불러 주셨습니다. 제자 삼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때 주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며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마태는 주님께 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니 마태는 평생 내가 뭔데?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 주시나?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살았을 것입니다. 새 인생을 살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마태복음을 쓰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이 용서 받은 자요 자신이 은혜를 받은 자이기에 이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 사함 받는다고... 나를 보라고.. 아니 예수님의 조상들을 보라고... 외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2)또한 마태는 우리에게 외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묻고 싶은 것입니다. 기생 라합 같은 사람들이 있냐고? 부끄러운 과거 때문에 힘겨워 하는 사람들이 있냐고... 아픈 과거와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있냐고...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무시를 받는 사람들이 있냐고... 출생의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냐고... 밧새바와 같이 다말과 같이 정결하지 못한 행실이 있냐고... 씻어야 할 아픔이 있냐고... 거듭나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품지 못할 사람들이 없다고... 하나님이 치유하지 못할 아픔은 없다고... 찬송가 287장 “예수 앞에 나오면 죄사함 받으며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얻겠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로마서 8장 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주님이 품지 못할 자! 구원받지 못할 자! 용서받지 못할 자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죄가 아무리 깊고,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의 인생의 짐이 아무리 무겁다 해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적용)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➀나는 죄인입니다. 철저히 고백하십시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는 깊이 만큼 용서의 감격도 누리게 됩니다. ➁누구도 정죄하지 마십시오. 기독교는 정죄의 종교가 아닙니다. 과거를 묻는 종교도 아닙니다. 저는 왜 예수님이 좋으시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 중에 하나는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너무나 좋습니다. 마치 나를 그렇게 대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가정 있는 남자와 음란한 짓을 하다가 짐승처럼 끌려온 여인입니다. 사람들은 돌을 들어 쳐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에 주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주님은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이 여인도 나쁜 사람이었지만,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정죄만 하는 사람들도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을 바라보자 한 명 두명 떠나가게 됩니다. 주님 앞에서 한 번이라도 남들을 정죄하기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 진실하게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용서해 주시고, 기회를 주시고, 기대해 주시는 주님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자신의 부끄러움이 다 드러난 여인이 내 모습과 같습니다. 헌데 주님은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기회를 주십니다. 이 주님이 너무나 좋습니다. 이 은혜로 우리가 사는 것 아닙니까? ➂솔직히 우리 안에 다말, 라합, 룻, 밧새바의 모습이 없습니까? 솔직히 나도 그 위치, 그 형편 속에 있다면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내 안에도 죄성이 있습니다. 나도 지옥갈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헌데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도 은혜를 베풀며 사십시오. (3)또한 마태는 바로 당신이 예수님의 세계를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통로가 되라는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통로였던 사람들은 많습니다. 헌데 대표로 두 사람을 1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왜 아브라함과 다윗일까? ➀아브라함하면? 뭐가 생각나세요. 아브라함의 인생 가운데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구나! 깨달을 수 있었던 사건은 독자 이삭을 바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돈을 바치라면 바치지 않았을까요? 바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라면 안 드렸을까요? 드렸을 것입니다. 헌데 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헌데 기꺼이 합니다. ➁또한 다윗하면? 뭐가 생각납니까? 하나님은 다윗에게는 자식을 바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다윗은 바쳤으면 좋겠을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압살롬, 암논, 잡놈, 이놈 등 다윗은 자식이 많았기에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식을 내 놓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물질을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성전건축을 위해서 물질을 바친 사람입니다. 헌데 성경에 보니까 다윗이 성전건축을 위하여 자원하여 드린 금은 102톤이며 현 시세로 환산하면 5조 8천 344억 원입니다. 은 238톤이며 2284억 8천만 원으로 합계가 무려 6조 628억 8천만 원입니다. 놀래지도 않으시네요. 이처럼 다윗이 기꺼이 주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하심, 권능, 영광, 승리, 위엄, 부귀, 권세와 능력,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모두 주님의 손에 있다.” 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라. 사람이 가장 아끼는 것이 두 가지 인 것 같습니다. 자식이고 돈입니다. 헌데 예수님의 세계를 세우는데 통로로 쓰임 받은 아브라함과 다윗은 자식과 물질을 드렸습니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내 놓았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생명처럼 더 중요하게 여기고 붙들고 있는 그것을 주님께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세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헌데 이들이 기꺼이 내 놓을 수 있었던 힘은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백처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시는 이도 여호와이시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은혜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세계를 이루는 데 어떤 것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까? 결론 호랑이는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 - 하! 반대이지요. 사랑하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 무엇을 남기고 가시렵니까? 땅에 살지만 이 땅이 전부가 아닌 것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무엇을 남기고 가시렵니까? 어떤 이름을 남기고 가시겠습니까? 마태! 흡혈귀 같은 세리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등골을 빼 먹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말! 음란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여인이었습니다. 라합! 이방여인이요 몸을 파는 밑바닥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몸을 팔고 살 수 밖에 없던 상처가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룻! 남편을 잃은 과부였고, 이방여인으로 태어난 출생의 아픔을 갖은 여인이었습니다. 거지로 고향에 돌아온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과거였습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거듭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쓴 사람들이었습니다. 영광의 이름을 남기고 떠난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계에 통로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은 어떤 이름을 남기고 가시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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