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얼마나 아세요? | 이병수목사 | 2013-06-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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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9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마태복음 1:18-25 제목:예수님을 얼마나 아세요? (예화)요한 웨슬레 - 3대째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 매일 매일 하루 두 시간씩 기도와 말씀 묵상, 매일 전도를 한 사람,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신학을 전공한 사람, 누구보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생각하였다. 헌데 그가 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올 때, 며칠 몇날을 풍랑을 만났다. 죽음의 공포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예수님을 아는 것과 자신이 느끼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헌데 독일 그리스도인들 25명은 풍랑중에 전혀 요동함이 없었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섬기며 도와 주었다. 불평이나 불만의 말이 전혀 없었다. 충격을 받았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데, 왜 나는 평안이 없을까? 왜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까? (적용)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사건을 만나면서 내가 이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구나!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을 정말 모르는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웨슬레는 그 중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요한 웨슬레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예수를 아는가?’ ‘예! 예수를 알지요? 너무 잘 알지요?’ / ‘당신은 예수가 인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가?’ ‘믿지요.’ / ‘그 예수가 바로 당신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가?’ ‘예! 믿지요?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요!’ 점점 목소리가 작아집니다. / 또 묻습니다. ‘당신은 예수가 지금 당신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가?’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안다고 생각했고, 믿는다고 생각했고, 나의 구원자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아니었습니다. 점점 자신의 믿음의 실상이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풍랑을 앞에서 내가 이렇게 무너져 내리는구나! 요한 웨슬레는 이 때의 경험을 일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절망으로부터 요한 웨슬레는 회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아십니까? 오늘 날 교인들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정말 모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 말고, 실제로 예수를 아십니까?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알 듯, 아내가 남편을 알 듯 예수님을 아십니까? 예수님으로 인해 기쁘십니까? 누가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천사들이 전하여 주었습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되셨습니다. 헌데 예수님 당시 헤롯왕은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의 소식입니까?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큰 기쁨이 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살면 되지 꼭 예수를 믿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이나 진실하게 믿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1.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왜 예수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까? (1)우리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모든 사람은 말 그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로마서 1장 28절에서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함당하지 못할 일을 하게 하셨으니” 사람들은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살인한 것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허나 이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이런 죄들을 범하는 것은 우리 안에 죄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뿌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죄가 있으니 하는 것마다 죄를 짓게 됩니다. 죄의 뿌리를 뽑아내지 않으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수 많은 죄의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2)헌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죄를 씻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3)예수!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예수! 온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믿으십시오. 오직 예수 만이 유일하고 완전한 구원자이십니다. 오직 예수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천하에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의 피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인들 중에서 선한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법없이도 살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허나 어린 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르지 않으면 죽음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착하냐? 의로우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가 애굽인이든 이스라엘 백성들이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어린 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른 사람들은 죽음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2.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1)성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오셨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세상 지식으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가면 예능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연예인들로 시작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 초창기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번은 마태복음 1장 성경공부를 하다가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것을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고 몇몇 연예인들이 이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니 마태복음을 공부할 수 없다고 불평하고 제동을 거니까, 가만히 앉아 있던 코메디언 구봉서 장로님이, 가만히 듣다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야! 지 서방도 가만히 있는데, 왜 너희가 떠들어!” 참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동정녀 탄생의 가장 분명한 증인인 요셉이 인정하는 사건을 가지고 누가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성육신 사건은 놀라운 신비이지만,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성육신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화가 있습니다. 덴마크의 유명한 철학자요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성육신의 의미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줄까 하다가 한 가지 동화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님이 한 번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여 평민의 복장으로 거리며 시장이며 골목길을 돌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장 모퉁이에 쭈그려 앉아 동냥하는 거지 소녀를 보고 그만 반하고 말았습니다. 사랑은 눈에 꽁깍지가 씌여지는 것 아닙니까? 임금은 뭐라 말도 못하고 궁중에 돌아와 시름시름 하다가 그만 중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궁중에 의사들이 검진을 해보지만 도무지 무슨 병인지 알지 못하다가, 노련한 의사가 진단을 내립니다. 임금님의 병은 마음의 병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셨습니까? 그때 임금님이 여차여차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의사가 아니, 당신은 이 나라의 제왕인데 그런 여인 하나 맞이하는 것이 뭐가 어렵다고 이렇게 가슴앓이를 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이 나라의 제왕입니다. 이때 임금님이 명언을 합니다. 내가 그 처녀의 몸은 데려올 수 있겠지만, 어찌 그 마음까지 데려올 수 있겠는가? 그러면 왕이 처녀를 데려오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➀왕의 권한으로 강제로 데려올 수 있습니다. 데려와서 살다보면 마음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➁아니면 처녀를 궁으로 불러와 마음을 얻기까지 계속 잘해 주는 것입니다. ➂또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왕이 친히 거지의 복장을 하고 그 처녀가 사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처녀의 동네에서 잠시동안 함께 살면서 마음을 얻는 방법입니다. 한결 같은 모습으로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 처녀의 마음이 열릴 때 청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임금은 세 번째 방법을 택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임금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가난한 처녀와 같습니다. 헌데 왕 되신 하나님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왕이신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억지로 제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친히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 오신 것입니다.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사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셨습니다. 함께 살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이 임마누엘이십니다. (2)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화)6분 15초 영상을 본다. 기독교 변증학자인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1권이 <사자와 마녀와 그리고 옷장>입니다. 동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죽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청-프리즘 미니스트리 사자와 마녀와 옷장 다음에서 검색) 아슬란이라는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왜 예수님이 사자로 표현되었냐면,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예수님의 조상인 유다를 축복할 때, ‘유다는 사자의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담당해야 할 죄와 사망의 저주를 짊어지시고 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분이 온 백성을 구원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니의 또 하나의 이름 임마누엘이십니다. ‘임’-함께입니다. 임과 함께, ‘마누’는 우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엘’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뭐가 필요합니까? 예수님이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임마누엘의 승리의 이름입니다. 게임 오버입니다. 주님이 함게 하시는 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합니까?
예수를 믿기 전에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죄의 그늘, 어둠속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둠은 사라졌습니다. 구원의 빛이 비치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에 드리운 저주와 두려움과 실패의 어둠은 예수님을 믿는 즉시 사라졌습니다. 마태복음의 구조를 보세요. 마태복음 1장은 온 백성을 구원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8장 마지막은 임마누엘로 끝이 납니다. 예수로 시작해서 임마누엘로 끝이 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무엇이 그리도 두렵습니까? 무엇이 그리도 괴롭습니까? 무엇이 그리도 힘이 드십니까? 왜 내 삶에 감사와 기쁨과 평안과 사랑과 용서와 소망과 믿음을 다 잃어버리고 살아가십니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셨는데, 왜 우리는 기쁘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 자, 예수로 시작한 사람들은 반드시 임마누엘로 끝이 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헌데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까? 본문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 7장 14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왜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의 연합군이 쳐들어 왔습니다. 헌데 전세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아람이 너무 강하여 도저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다고 했습니다. (적용)우리들도 인생을 살다보면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아하스 왕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두 가지 징조를 주십니다. ➀하나는 이사야에게 갈 때 아들을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아들의 이름이 스알야숩이었습니다. 이 자체가 메시지였습니다. 이사야의 이름은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알야숩의 이름은 남은자는 반드시 다시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직 구원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믿는 자는 반드시 죽지 않고 승리하리라”는 메시지였다는 것입니다. ➁그래도 여전히 두려워 하고 무서워 합니다. 두 번째 징조를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지금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리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적용)보세요. 사시 나무 떨 듯이 두려워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사야와 스알야숩, 임마누엘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예수” 우리의 구원자, 죄와 사망과 저주와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자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임마누엘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수와 임마누엘 이 두 이름을 붙들고 일평생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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