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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2) 이병수목사 201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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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8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마태복음 5:4

제목: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2)

세상은 어떻습니까? 일반 서점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 책들을 둘러 보았습니다. 40대 중년을 다룬 책들이 눈에 많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행복에 대한 주제의 책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행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40-50대가 가장 행복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40-50대의 중년들이 가장 힘겨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한 답을 내 놓지만, 어디에도 정답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행복은 뭐죠? 세상은 웃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성공한 자가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 되시는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줄 아느냐? ‘애통하는 자란다.’ 누가복음에서는 “지금 우는 자가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메시지 성경의 저자 유진 피터슨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이렇게 풀어 해석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가 막힌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도에 따라서 슬픔을 표현하는 헬라어는 많습니다. 헌데 ‘애통’이라는 말은 슬픔 중에서 가장 큰 슬픔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펜데오’라는 말입니다. ‘펜데오’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말합니다.

(예)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야곱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르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창37:34-35)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에 어느 것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위로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적용)정말 힘들어 하는 성도!!! 사람이 뭐라고 위로하겠습니까? 그저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길 기도할 뿐이지요. 하나님은 야곱을 위로하셨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 살아 있는 요셉을 만났을 때에 그 동안 흘린 눈물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문제제기)

우리가 여기에서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구원,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가난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슬픔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는 자가 웃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자꾸 웃겨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애통한다는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애통은 끊임 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이 소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적용)한국교회의 역사가 130년이 되어 갑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한국교회는 참으로 아름다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름다은 자랑가운데 하나가 저는 ‘눈물의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한국교회를 어떻게 세워 왔습니까? 한국교회를 어떻게 섬겼습니까? 그것은 눈물이었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밤을 새워가면서 찬양하고 통곡하며 기도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때는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찬물 한 사발 마시고 교회 와서 기도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 시집와서 너무나 심한 고생을 했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쫓겨나고, 머리채를 뜯겨 가면서도 교회 와서 예배하고, 통곡하며 기도하고 찬송하며 이겨냈습니다. 그 때 많이 불렀던 찬양을 기억합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여 회개 할 맘 충만 하게 하소서 ”

이 찬송을 부르고 또 부르며 눈물 짓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한국교회는 눈물로 세워졌고, 눈물로 부흥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도 어떻게 세워야 할까요? 눈물의 영성으로 세워가길 바랍니다. “마른 눈을 가진 성도들이 모인 교회보다, 젖은 눈을 가진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더 깊은 은혜를 체험한다고 합니다.”

 

헌데 오늘 날 한국교회의 위기가 뭘까요? 교인들이 많아지고, 건물과 땅, 소유가 많아지면서 마음이 가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에게 눈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 날 교회는 통곡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과거의 성도들보다 지적이고 세련되었지만, 능력은 없습니다. 눈물이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애통해야 합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 강단의 이미지는 유머와 웃음이 점령한 것 같습니다. 유머 있고 재미 있는 목회자가 환영을 받습니다. 재미만을 주는 강단이 된 것 같아 씁쓸합니다. 물론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하지만, 주님의 말씀과 같이 가는 것일까?하는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하도 교회에서 우니까 선교사님이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울어요?’ ‘고난 주간이라서 그래요.’ 그러자 선교사님은 ‘그러면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믿지 않나요?’ 예! 맞습니다. 기독교는 승리의 종교요 기쁨의 종교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종교입니다. 주님도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허나 이 기쁨은 코메디가 아닙니다. 유머가 아닙니다. 애통하며 회개하고 난 뒤에 오는 기쁨입니다.

솔직히 인생을 살아 보시면 아시지만, 웃을 일이 더 많습니까? 울 일이 더 많습니까? 울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통곡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랍 격언에 “햇빛만 비치면 땅은 사막이 된다”고 했습니다. 비가 내려야 옥토가 됩니다. 울 일이 있어야 마음의 옥토가 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통곡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한 번도 통곡해 보지 않았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1.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통곡해야 할까요?

(1)첫째로 나의 죄를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죄 용서를 받습니다. 아멘??? 그러나 죄에 대한 통곡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가룟유다는 용서받지 못하고, 베드로는 용서받은 이유가 뭐예요? 둘 다 죄인이었습니다. 헌데 가룟 유다는 통곡이 없었습니다. 주님께 돌아와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베드로는 주님 앞에 돌아와 통곡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소리를 들으신 주님은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1-62)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자신이 너무나 밉고 실망스러워 통곡했습니다. 헌데 주님은 베드로의 눈물을 기억하셨습니다. 부활하시고 난 뒤에 베드로를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회개하는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찾아 가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제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지는 못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심인거 아시잖아요.” “그래 알지! 내 양을 돌봐다오!!” 주님은 베드로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문제가 뭐예요? 죄에 대해서 너무 무딥니다. 둔합니다. 심각함이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 두려움도 없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죄 때문에 통곡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 없는 자가 없습니다. 다만 용서받은 자가 있을 뿐입니다. 죄를 지어서 지옥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 갑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내 죄를 보게 하시고, 눈물로 회개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적용)애통이 뭐예요? 내 자신의 못남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노년의 바울은 “내가 죄인중에 괴수니라. 난 죄인중에 우두머니니라”며 울었습니다. 바울은 평생을 죄 때문에 애통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안에 불의, 추잡함, 간사함, 모순, 부조리에 대해서 얼마나 울어 보았습니까? 우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2)둘째로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통곡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이 말씀을 볼 때마다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할 때 삼년 머무는 시간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나는 어떤가? 지난 6년의 시간동안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섬겼나?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가장 고귀한 것이 뭘까요?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로 눈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할 줄 믿습니다.

 

또한 다음세대인 아이들을 어떻게 섬길까요? 눈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을 세상에 빼앗긴 시대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인터넷, TV, 연예인, 외모, 세상의 즐거움에 아이들의 마음이 채워져 있습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 아이들이 말씀에 반응하고, 기도에 반응하고, 찬송에 반응할 수 있을까요?

(예화)한 번은 우리 큰 아이와 대화를 하는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 믿어지니? 예수님이 믿어지니? 어느 때는 계신 것 같고, 어느 때는 안 계신 것 같아요? 왔다 갔다 해요. 가슴이 철렁하더라구요. 올 것이 왔구나! 지금까지는 부모의 믿음으로 교회를 다녔다면, 이제는 큰 아이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할 때가 되었구나! / 한 번은 부모님이 교회를 안 다시니시는 분들이라면 자기도 교회에 안 나갈 것 같다는 거예요. 마음이 두근 두근 하더라구요. 이것이 비단 우리 아이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런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예요?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며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아이들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난 포기하지 않았요!하며 일어설 수 있는 믿음의 아이가 되게 하는 길은 부모된 우리들의 눈물의 기도인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떠셨나요?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렇게 목회할 수 있다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소원을 올려 드릴 때 예수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왜 우리 인생가운데 역사가 없습니까? 변화가 없습니까? 혹시 통곡이 사라졌기 때문은 아닙니까? 가정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탄식만 하지 마시고, 주님 앞에 눈물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아파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함께 눈물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사랑이지요.

 

(3)셋째로 이 시대를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얼마나 어둡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명절이 되어서 예루살렘 성에 오셨습니다. 이미 유월절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 성에는 100만 명이 넘는 인파로 가득했습니다. 제자들은 구름떼 와 같은 사람들이 운집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그 광경에 감탄을 자아냅니다. 헌데 주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십니다.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화려함, 웅장함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의 깃든 평화와 영광을 보면서 감탄했습니다. 허나 이것은 거짓 평화였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평화였습니다. 주님은 보셨습니다. 불과 40년 뒤에 예루살렘 성은 짓밟히고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1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침략했습니다. 로마 군은 3일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토성을 쌓았습니다. 성안에 식량은 바닥이 나고, 그야 말로 성 안은 생지옥이 되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그 때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먹을 것이 없자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잡아 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임산부의 배를 갈라 죽였습니다. 개구리를 죽이듯이 사람을 바닥에 떨어뜨려 죽였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은 모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적용)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얼마 있지 않아서 불로서 심판 받을 이 땅만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땅에 화려함, 웅장함, 놀라움에 빠져서 감탄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짓 평화에 속아 이 땅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속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눈을 갖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짓 평화에 속지 말고,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주님처럼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울어야 합니다. 목자 없는 양 떼같이 이리 저리 방황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바라 보면서 울어야 합니다.

 

(4)또한 우리가 섬기는 미래교회를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자리에 눈물 자국을 만기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신다고 했습니다. 내가 몸담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뭔가 잘못된 것 아닐까요? 교회를 위해서 우십시다. 지금 새벽마다 밤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사명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지난 주간 새벽기도 시간에 바울의 고백을 보면서 참으로 많이 감동받고 회개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순교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디모데야! 너는 믿음의 대장부가 되어라. 내가 어떻게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는지 알지 않느냐? 나는 지금까지 전제와 같이 내 인생을 하나님께 부어 드렸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전제란 액체를 쏟아 부어 드리는 제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사람이 쏟을 수 있는 모든 액체를 쏟아 드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쏟을 수 있는 가 세 가지 액체가 있습니다.

❶땀입니다. ❷눈물입니다. ❸피입니다.

(예화)터키 선교사로 나가 있는 대학동기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터키 선교 중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풍토병으로 인해서 손 써 볼 겨를 도 없이 고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들을 묻으며 얼마나 애통했겠습니까? 얼마나 그 아이에게 미안했을까요? 그럼에도 지금 다시 터키 선교사로 나가 있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6개월 쉬고 난 뒤에, 다시 떠났습니다. 자신들도 아들과 같이 터키 땅에서 죽겠다고,,, 그 땅에 땀과 눈물과 피를 쏟아 주님께 드리겠다고...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도 땀과 눈물과 피를 다 쏟아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살려 주셨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교회를 위해서 땀과 눈물과 피를 쏟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되 땀과 눈물과 피를 전제로 부어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2.거룩한 것을 위해서 애통하는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란 무엇입니까?

'위로'라는 헬라 말은 '파라칼레오'입니다. '파라'는 곁에서, '칼레오' Calling하신다는 것입니다. 곁으로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힘들지! 아프지! 이리와!!! 그리고 안아 주십니다. 꼭 안아 주십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지요? 유진 피터슨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정말 슬플 때는 사람의 위로는 힘이 되지 않습니다. 허나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기회입니다. 아들을 잃은 터키 선교사가 다시 터키로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파라칼레오’라는 말에서 ‘파라클레토스’라는 명사형이 왔습니다. ‘파라클레토스’는 뭐예요? 보혜사입니다. 곁으로 오셔서 함께 걸어가 주시는 분입니다. 누구죠? 성령님이십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뭐예요? 성령의 터치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 성령 하나님이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성령님은 위로자이십니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있을 때, 주님 앞에 애통하며 기도하면 성령님은 상한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신기하게도 새 힘이 솟고, 용기가 생기고, 기쁨이 회복됩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슬프던 마음 위로하시고,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게 하시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십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이 하나님의 위로를 날마다 받으며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거룩한 것을 위해서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위로 하실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이 시간 기도하겠습니다.

-먼저 회개기도를 드리겠습니다. 통곡을 잃어버린 삶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또한 교회를 위해서 울지 못한 것,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위해서 울지 못한 것,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울지 못한 것, 이 시대를 보면서 세상에 빼앗긴 젊은이들과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울지 못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다시 한 번 눈물을 회복시켜 달라고... 애통하므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거룩한 종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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