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3) | 이병수목사 | 2013-08-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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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5일 주일 낮 예배설교 마태복음 강해 성경:마태복음 5:5 제목: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3)-온유한 자 오늘은 세 번째 행복한 사람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시대정신과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로부터 자유함을 얻으려면 힘이 있어야 했습니다. 무장해서 무력으로 저들을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주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온유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시대와도 너무나 동떨어진 말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온유한 사람은 늘 이용만 당합니다. 놀림 받기 쉽습니다. 온유해서는 성공 못합니다. 땅을 얻으려면 거짓말도 하고, 악착 같아야 합니다. 강한 자가 땅을 얻지 온유한 자는 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무신론자 니이체는 ‘팔복은 나약해 빠진 인간의 변명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의 주인되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모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온유함이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심령의 상태를 정직하게 볼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오늘 삼복은 어떻게 해석을 했냐면? “더도 덜도 말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만족하는 너희는 복이 있다”고 했어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실패를 합리화하라는 말이 아니예요. 자신의 게으름과 욕심으로 벌어진 결과에 대해서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예요.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온유함의 모델!!! 온유함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보다 온유함으로 산 사람들의 삶을 보면 온유함이 무엇인지 제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세 분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예수님, 모세, 바울입니다. 1.첫째는 예수님의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의 최고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➀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주님이 우리들을 정의하시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하지요. 주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아세요. 내가 어떤 갈등 속에 있는지! 내 고민과 아픔을 주님은 다 아세요. ➁그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 주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 여기까지는 맞습니다. 주님께로 가면 주님은 쉼을 주십니다. 헌데 문제는 어떤 쉼을 주시느냐?는 것입니까? 우리들이 아무 생각 없이 쉽게 이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오면 모든 짐들을 해결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내 짐을 해결해 주심으로 쉼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헌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➂그 다음 말씀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주님은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이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때문에 힘들어 하는 너희 마음을 쉬게 해 주시겠다는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가 싹 다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때문에 힘들고 지친 너희 마음을 내가 쉬게 해 줄께!!!라는 것이라구요. 믿습니까?
어떻게 우리 마음의 쉼을 주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내게로 와서 배우라는 거예요. 내게로 와서 멍에 메는 법을 배우라는 거예요. 예수님 지신 멍에가 뭐예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것 저것 해보다가 할 수 없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아니예요.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실 때부터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이 멍에를 주님이 어떻게 지셨는지를 배우라는 거예요. 생각을 해 보세요.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세요. 창조자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이세요. 그 분이 가장 낮고 낮은 자리로 오셨어요. 사람으로 오셨어요. 사람들이 저지른 죄의 쓰레기를 치우시기 위해서 오셨어요. 자기를 낮추시고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리고 그 짐을 묵묵히 지고 가셨어요. 그것이 예수님의 온유함이예요. 하나님이 지고 가라는 짐을 기쁘게 지고 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죽으라는 자리에서 죽으시는 것이 예수님이 지고 가시는 멍에예요. 예수님이 어떻게 멍에를 메고 가셨는지 와서 배우라는 거예요. 그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때문에 힘들어하는 너희 마음이 쉼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적용)솔직히 짐이 무거운 것이 힘든 것이 아닙니다. 짐보다 마음이 힘든 것이 더 힘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어도 마음이 불편하면 지옥 같은 것입니다. 허나 지옥 같은 환경에 있어도 마음이 천국이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요 천국이 됩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세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님의 멍에가 어떻게 쉽습니까? 예수님이 지고 가는 짐이 어떻게 가볍습니까? 헌데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셔서 그 멍에와 짐이 쉽고 가벼운 거에요. (예화)내 안에 사랑의 마음이 넘치면 짐은 하나도 안 무거워요. 설교를 열편씩 준비하고 매일 기도를 해도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면 하나도 힘들지 않더라구요. 만약에 예수님이 ‘내가 지고 가는 짐이 너무 무겁다고 힘들고 고통스러워 난 못하겠다’는 마음이셨다면 멍에와 짐은 너무 무것웠을 것입니다. 헌데 주님은 마음속에 하나님을 살아하고, 마음이 온유하시기에 억울하지도 무겁지도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손가락질 하고, 침을 뱉고, 조롱하는 사람들, 가시관을 씌우고,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십자가에 달아 놓고 비웃는 사람들을 향해서 욕하지 않으셨어요. 도리어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자기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끌어 안으신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의 온유함이예요. 이것을 배우라는 거예요. (적용)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왜 억울합니까? 지고는 못살기 때문이예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태도는 세상식이예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 원수를 갚아 주세요. 이 환난으로부터 날 구원해 주세요. 난 죽겠습니다.’라고 기도는 하지만, 주님이 걸어가신 것처럼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온유함이란? 뭘까요?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마음의 쉼을 얻는 법을 배우세요. 그리고 주님이 세워 놓은 자리에서 견디세요.
2.둘째로 모세의 온유함입니다. 사람으로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모세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온유한 사람이 모세 만한 사람이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는 말이예요. 이 말을 하게 된 사건이 있어요. 그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구스 여인과 결혼을 한 것 때문에 모세의 친 누나 미리암과 친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일이 있었어요. 사실 겉으로만 보면 비난받아 마땅해요. 구스여인이 누구입니까? 구스 여인은 함의 후손으로 에디오피아 여인입니다. 흑인 여인입니다. 당시 출애굽한 유대인들 무리속에 구스 여인이 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따라 나선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애굽에 포로로 잡혀와 유대인의 종이 된 여인입니다. 보세요. 이방여자입니다. 포로로 잡혀온 여인입니다. 종살이하는 유대인들의 종이 된 비참한 흑인 여자입니다. 헌데 모세의 누나와 형 입장에서는 많고 많은 여자들 중에 그 여인과 결혼을 한다고 하니 당연히 비난을 할 수 밖에 없지요. “너만 선지자냐?? 하나님이 너와 만 말씀하시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신다는 거예요.”아마 이렇게 누나와 형이 말한 것은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헌데 중요한 것은 모세의 반응입니다. 모세는 맞대어 싸우지 않습니다. 모세가 가만히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서 주셨습니다. ‘너희는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느냐? 내 종 모세는 내가 들어서 쓰는 자다.’ 사실 영적으로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것은 정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넓이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200만이 넘는 사람들 중에 구스 여인은 가장 보잘 것 없고 천한 여자입니다. 헌데 그 여인을 모세가 아내로 삼고 존귀히 여긴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와 같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호세아에게 고멜과 결혼하게 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스 여자와 같은 자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존귀함을 얻는 자임을 만천하에 보이신 것입니다. 헌데 미리암과 아론은 이 사실은 전혀 몰랐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고 모세를 비방한 것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미리암과 아론을 치셨습니다. 그 때 모세는 그들을 치시려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것이 모세의 온유함입니다. 모세도 성질이 불같은 사람입니다.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잘못한 자들에게는 단호히 심판할 수 있는 권세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허나 모르고 하는 일이었기에 용서합니다. 아량을 베풉니다. 맞대어 싸우지 않습니다.
모세가 몇 세에 부름을 받았지요? 인생을 마감할 80세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시편 90편에서 모세가 시를 썼는데, “사람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다”라고 했습니다. 보세요. 80이면 인생을 정리해야 할 때입니다. 헌데 하나님은 80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노인을 40년간 거친 광야에 세워 놓습니다. 헌데 모세는 40년간 그 자리를 지킵니다. 장인 이드로가 와서 사위인 모세가 너무 고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200만 명의 백성들이 쏟아놓는 불평과 불만,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헌데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자리를 지킵니다.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모세는 힘들다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피하지도 않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 갑니다. 또 모세는 출애굽의 일등공신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들어갈 사람이 모세입니다. 헌데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토사구팽 당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사냥할 때 잘 부려 먹더니, 복날 잡아 먹는 꼴입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섭섭하고 배신감마저 들었겠습니까? 헌데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죽으라는 자리에서 죽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것이 모세의 온유함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예수님도 모세도 하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분의 결정과 뜻이 나의 결정과 뜻보다 크고도 깊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적용)사랑하는 성도들도 믿으세요.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자리를 지키세요. 견디세요. 하나님의 결정에 순종하세요. 지금의 자리가 내 마음에 안들어도 하나님을 믿고, 가세요.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 있으라고 한 자리에서 사명을 다하세요. 아량을 베푸세요. 그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천국을 얻습니다. 이 사람이 주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3.또 한 사람은 바울의 온유함입니다. (1)바울의 온유함이란 ‘사울’을 내려놓고, 스스로 ‘바울’로 산 것입니다.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란 지극히 높은 자, 큰 자입니다. 헌데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가장 먼저 이름을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바울은 지극히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뭘까요? 이름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울일 때, 그는 삶의 목적도 사울이었습니다. 성공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도 결국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함이었습니다. 헌데 바울은 더 이상 사울로 살기를 포기합니다. 사울은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가문 좋죠. 학벌 좋죠. 장래 유망하지요. 최고의 스펙을 갖은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까지 좋습니다. 외모가 조금 떨어지기는 해도 이름 값대로 사울 답습니다. 헌데 그는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주님이 가신 길을 돌아보며, 바울로 살기를 바랍니다. 평생을 바울로 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사울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스스로 바울이 되세요. 예수를 만났다면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울의 태도, 사울의 삶의 목적,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의 태도, 바울의 삶의 태도, 바울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내 권리를 내려 놓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예화)정말 즐거이 보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일일드라마 <못난이 주의보>입니다. 막장 드라마가 판을 치는 때에 따뜻한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는 힐링이 됩니다. 꼭 챙겨 보세요. 매일 30분을 투자하세요. 기도하는 시간대신 이 드라마를 보아도 용서가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드라마를 볼 때마다 생각했어요. 틀림없이 작가가 그리스도인일 것이라고... 드라마 내용 속에 복음이 너무 많이 묻어 있습니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와 출연배우들의 캐릭터속에 주님의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이런 거구나!를 공준수가 받는 사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 찾아 보았습니다. 작가가 정지우 여류작가입니다. 이 분은 어릴 적에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뚝거립니다. 가난하고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불교에도 심취되었던 분인데 주님을 만났습니다. 지금은 집사님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 분이 <내가 매일 기쁘게> 간증 프로그램에 나와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분이 예수를 믿고 난 뒤에 드라마를 쓰는 목적과 기도제목을 밝혔습니다. ➀자신이 쓴 작품을 보는 시청자들이 피식 세 번 웃게 해 달라! 이것이 기도제목입니다. ➁어떻게 하면 힘든 삶을 사는 현대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위로하고 싶은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담아 쓴다는 것입니다. ➂무엇보다 드라마로 안방극장을 전도하는 것이 자신의 비전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돈이 되는 글을 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사울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높아지고, 유명해지고, 성공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헌데 예수를 알고 난 뒤에는 자신의 재능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돈이 되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위로의 글을 쓰고, 주님을 녹여내는 글을 쓰는 바울이 된 것입니다. (2)또한 바울의 온유함은 자랑에 초점 맞추지 않고,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산 사람입니다. 바울은 한 번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쓰임 받는 내가 얼마나 큰 자냐?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내가 받은 능력을 봐라!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몇 개의 교회를 세웠느냐? 내가 전도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 은연 중에라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자랑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가 쓴 서신서에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일들을 이루었느냐?에 초점이 있지 않고, 나 같은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하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어요.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내가 뭔데? 나를 하나님이 쓰시나? 그분의 은혜만을 감사하면서 자신의 무능력함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겸손이요 온유함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님을 만났을 때 나이가 28살 쯤이라고 합니다. 그 이후 바울이 일차 이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삼차 전도 여행을 떠날 때의 나이가 50대 초반이었습니다. 이 때 고린도서 썼습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사도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50대 중반 55~56세 경에 2년간 로마에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때 옥중서신을 썼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했습니다. 헌데 에베소서 3:8에서 바울은 “나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50대 초반에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헌데 50대 중반에는 나는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60대가 되었을 때 드로아에서 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됩니다. 주후 66년 늦은 봄에 디모데서를 마지막으로 씁니다. 이 디모데서를 쓰고 그 다음 해 주후 67년 6월에 로마에서 순교를 당합니다. 순교하기 약 일년 전에 마지막으로 쓴 디모데 전서 1:15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눈치 채셨습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들수록 바울은 자신을 더 낮춥니다. 50대에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했다가 / 50대 중반에는 성도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순교를 앞둔 60대에는 나는 죄인이라고,,, 죄인 중에 내가 우두머리라고... 고백합니다. 왜 바울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들수록 자신을 낮추었을까요? 사실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사적으로 바울은 위대한 족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헌데 나이가 들수록 잘 익은 벼와 같이 자신을 낮출까요? 고백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 이었는가?를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들어 쓰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온유요 겸손함입니다. (적용)우리는 어떻습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바울로 살지 않고 사울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은혜보다 자랑하는 데 초점이 있지 않습니까? 신앙생활 30년이 넘으신 분들은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여기까지 가셔야 합니다. 죄인의 우두머리가 뭐 할 말이 있습니까? 항존 직분자들은 교회에서 아무 말도 못해야 합니다. 자랑하는 것은 수준이 낮은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개근상 타고, 봉사상 타 왔을 때 자랑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어른들은 훈장을 타도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훈장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었다고... 주님의 은혜로 살아왔다고... 나는 사울이 아니라, 바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주님의 인정을 받고, 주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함! 모세의 온유함! 바울의 온유함을 깊히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온유한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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