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 이병수목사 | 2013-10-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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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7일 주일 낮 2부 예배 설교 성경:마태복음 5:20 제목: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오늘은 본문 한 절의 말씀입니다. 한 절의 말씀이지만,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래도 주님이 주신 말씀이기에, 20절의 말씀을 한 주간 동안 묵상했습니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지요. 우리 귀가 번쩍 뜨이는 것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천국에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마치 천국 가는 티켓을 예매해 놓고, 남은 시간은 세상에서 내 힘으로 살다가 죽으면, 천국열차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미 천국에 가는 열차에 올라 탄 것과 같습니다. 남은 인생은 주님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 이 땅에서도 천국 같이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여행하기에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너희 의가 서기관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첫째로 의가 뭘까요? ‘의’라고 하면 어렵습니다. ‘의’라는 말씀을 현대어로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찾았습니다. ‘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구원받으려고 추구하는 길이 있습니다. 헌데 이들이 걸어가는 길로 가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걸어가는 길보다는 나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이란? 천국 가는 길입니다. 구원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답게 사는 길입니다. 2.둘째로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길은 어떤 길인가?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보다는 나은 길을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1)먼저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나라에는 세 종파가 있었습니다. ➀하나는 사두개파입니다. 들어보셨지요? 사두개파는 유머로‘사두자는 계파’입니다. 썰렁한 개그를 해서 죄송합니다. 사두개파는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부활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현실주의자들입니다. 부활도 없고 내세도 없으니 이 땅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땅 사두자! 집 사두자! 금은 보석 사두자! 이 땅에서 즐겁게 놀고 성공하자!’는 사람들입니다. (적용)교인들 가운데도 사두개파들이 있겠지요?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부활도 천국도 믿지 못하니 오직 현실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사는 자들입니다. ➁둘째 종파는 에세네파입니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습니다. 천국도 믿습니다. 헌데 현실은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에 갈 사람들이 세상의 것을 갖겠다고 애 쓰지 말고 조용한 곳에서 우리끼리 모여 살자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현실을 떠나 금욕주의자로 살아갑니다. 마치 수도원처럼 깊은 곳에서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팔짱 끼고, 사두개파 사람들을 향해서 “애 쓰네!” 돈이 무슨 소용인가? 금은보화가 무슨 소용인가? 이 땅에 것을 하나라도 더 갖으려고 애쓰네! 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종파는 모두 극단적인 사람들입니다. ➂세번 째 종파가 바리새파입니다. 바리새파는 극단적인 사두개파와 에세네파의 단점들을 잘 보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파와 달리 부활도 인정하고 내세도 인정합니다. 또한 에세네파 사람들과 달리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종말론적으로 내세를 바라보면서도 현실 가운데서 율법을 철저히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건강한 종파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파 사람들이 가장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도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들이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만약 천국에 두 사람만 들어 갈 수 있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이들은 철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헌데 주님은 누가복음 20장 46절에서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삼가라’는 말은 ‘등을 돌리다’‘길을 달리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서기관들과 길을 달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는 길에서 돌아서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이 걸어간 길이 어떤 길이기에 주님은 이처럼 단호하게 말씀하실까요? (2)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걸어간 구원의 길은 어떤 길이었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➀이들은 말한 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저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이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고백과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은 많았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해박했습니다. 헌데 말뿐이었지 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들도 아는 것이 내 신앙인 것처럼 착각하지 마세요. (적용)우리 성도들 가운데도 배우는 데 열심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공부한다. 성서신학원 다닌다 하면서 식구들 밥은 굶기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러면 안되지요. 말씀을 점점 많이 알아 가는데, 삶은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이 바리새인입니다. 또 성도들 가운데는 유명한 교회 이야기, 유명한 목사님들 설교 많이 듣습니다. 교단소식에 밝은 분들도 있고, 정치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는 것이 많습니다. 그 동안 목회하면서 이런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헌데 이 분들에게 안타까운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➀그 많은 지식이 자기를 성찰하지는 못합니다. 남의 이야기는 참 많이 하는데, 자기 자신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내 자신을 살피지 못하는 지식이라면 ‘그래서 어쩌라는 것입니까?’ 그 많은 지식이 무슨 소용입니까?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남들 이야기 할 것이 없습니다. ➁또 하나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은 사랑하지 못하더라구요. 그렇다면 그 많은 지식이 무슨 소용입니까? 바리새인과 다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 많은 지식으로 남들 판단이나 하지, 정작 자신을 살피거나. 돌이키지는 않습니다. 더 배우려고 하기 보다 살아 보려고 하세요. 신앙은 생활입니다. 사는 것입니다. ➁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은 기도와 금식과 구제(봉사)에 열심이었습니다. 기도와 금식과 구제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헌데 이것을 하는 동기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었습니다. (적용)신앙생활을 하실 때 누구를 의식하며 하십니까? 마음의 동기를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자꾸 사람을 의식하지는 않으십니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헌신은 주님이 좋아서 하셔야 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도, 금식하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주님 때문에 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이기에 하는 것입니다. 왜 바리새인들이 사람을 의식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나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없으니까 사람들의 칭찬에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보이고, 사람이 보이는 것입니다. (적용)우리들 가운데도 성령님과 깊은 사귐을 갖지 못하면 외식하게 됩니다. 예배로 만족하지 못하니까 집에 가면 TV 앞에 있습니다. 아니면 스마트 폰이나 인터넷을 뒤적거립니다. 그것도 아니면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십니까? 주님께 기도하는 이 시간 이 때가 가장 귀하고 즐겁다고 하실 수 있습니까? 이게 안되니까 바리새인들은 사람 많은 곳으로 갑니다. 거기에서 선생님, 랍비여!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➂또 이들은 척하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주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이중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정말 좋아하시는 마음은 진정성입니다. 사람이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겉은 거룩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욕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주님은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겉도 깨끗해 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판단했습니다. 겉으로는 긍휼을 베푸는 것처럼 하면서도 속으로는 남을 무시하고, 깔 보았습니다. 주님은 겉은 회칠한 무덤처럼 근사하게 꾸며놓고,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한 사람들을 향해서 역겹다고 하셨습니다. 완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 대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하라는 것입니다. 3.그러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우리의 의는 무엇일까요? 저들보다 더 나은 우리들의 구원의 길은 무엇일까요? (1)첫째는 믿음의 길입니다. 저들에게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두 가지 구원의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➀아브라함의 후손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증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방인들이라도 반드시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➁또 율법을 갖은 자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늘 가까이 하기 위해서 옷 술에도 경문을 달고, 이마에도 말씀을 달고 살았습니다. 집 출입문 에도 말씀을 붙여 놓았습니다. 율법을 열심히 외웠습니다. 율법이 구원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약초들을 말한다. 아주 적은 양이라도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다. 헌데)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율법의 근본 정신은 버렸다. 자신을 의롭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지 정말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이웃을 사랑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로마서 3장 21-22절에서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믿지는 않았습니다. 율법을 완전케 하신 예수님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갖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헌데 안타깝게도 교회를 10년 20년 다녀도 구원의 감격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셨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날 구원해 주시며, 성령을 주셔서 일평생 동행해 주시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 놀라운 믿음의 신비를 알지 못하고 10년 20년 교회를 다닌다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기도해 합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으셔야 합니다. - 죄죽사십 영영성) (2)둘째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구원의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관한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였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가차 없이 정죄했습니다. 그들의 율법에 대한 지식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였습니다. 그들 안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만 있었지 정작 중요한 사랑은 없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나도 저들과 다르지 않다는 자비가 없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는 데만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허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사랑의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믿음이 가짜일 확률이 많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사랑은 구원의 열매입니다. 사랑은 못해도 믿음만 있으면 되지! 아닙니다. 성경을 보세요. 요한복음 13장 34-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다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정말 믿으면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요한일서 3장 14절에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분명하죠. 사랑이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증거라는 것을요?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강도만나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은 저와 여러분입니다. 강도만난 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보게 합니다. 들춰냅니다. 헌데 그뿐입니다. 헌데 사랑으로 오신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땅에서 사마리아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강도만난 자를 살려내셨습니다. 사랑은? (1)보는 것입니다. 누구도 거들 떠 보지 않던 죄악으로 죽어가는 우리들을 보셨습니다. 사랑은 시선입니다. 사랑은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보십니다. 따뜻하게 바라보세요. 부드러운 눈으로 보세요. (2)또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보기는 했으나, 불쌍히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허나 주님은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정죄하고 판단하시기 보다 회복되길 원하십니다. (3)가까이 오셨습니다. 주님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멀리하시지 않았습니다. 강도만난 자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찾아 오셨습니다. 다가와 주셨습니다. 죄로 인해서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셨듯이 우리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사랑은 먼저 찾아가는 것입니다. 혹 불편한 사람이 있습니까? 힘드시지만 먼저 찾아가세요. (4)고치시고 싸매어 주십니다. 주님은 상처에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소독하셨습니다. 강도만나 죽어가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보혈의 피를 뿌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치료자이십니다. 주님은 내 영을 치료하십니다. 주님은 내 마음을 치료하십니다. 주님은 내 몸을 치료하십니다. 주님은 내 가정을 치료하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5)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려가 밤새도록 간병을 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여행을 떠날 때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반드시 다시 돌아와 비용이 더 들면 주겠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책임지시는 사랑입니다. 보세요. 주님은 우리를 영원토록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고아처럼 두시지 않으십니다. 가시면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께 우리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힘들다고 피하지 않으십니다. 모른척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예화 - 도망치지 말고 주님이 주신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자. 로마에 핍박이 있자 베드로는 피한다. 그때 주님을 만났다. 베드로는 물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는 네가 두고 나온 어린 양들을 위해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간다”고 하였다. 베드로는 깨닫고 로마로 가서 주님을 위해서 양떼들을 살아하다가 순교한다.) 우리도 이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이 사랑의 길을 가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자입니다. 믿으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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