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양식은? | 이병수목사 | 2013-12-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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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요한복음 4:27-38 제목:나의 양식은? 오늘 본문은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의 인생을 한 마디로 말하면 기구한 인생이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이 여인은 다섯 번 결혼을 했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이 여인을 바라보는 입장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➀하나는 이 여인을 나쁜 여자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여인이 다섯 번 결혼하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사는 것은 쾌락을 좇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허나 이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➁또 하나는 이 여인은 불쌍한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즐거움을 좇아서 여러 번 결혼 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가족들도 없습니다.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만 합니다. 헌데 의지했던 남자들이 죽었든지, 아니면 소박을 맞았든지 이유가 분명하지 않지만, 결혼이 파경을 맞을 때마다 이 여인의 가슴은 찢어지도록 아팠을 것입니다. 이 여인도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좋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헌데 현실은 너무나 냉혹했습니다. 매번 마다 결혼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상실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상처를 품고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고독한 여인이었습니다. 헌데 이 여인이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28-29절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오늘 날에도 결혼을 다섯 번이나 실패한 여인이라고 하면 따가운 시선으로 볼 것입니다. 헌데 2000년 전에는 어땠겠습니까? 여인의 순결과 정절을 중요시 하던 당시 사람들은 이 여인을 벌레 보듯 했을 것입니다. 얼굴을 마주대하는 것 자체를 꺼리고 상종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연히 이 여인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증거가 요한복음 4장 6절입니다. 이 여인이 물을 길러 우물에 간 시간이 제 육시입니다. 우리 시간으로 낮 12시입니다. 낮 12시면 이스라엘은 한 낮의 폭염으로 인해서 움직이지 않는 시간입니다. 헌데 이 여인이 그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한 낮의 폭염보다, 자신을 벌레 보듯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힘들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이 시간에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헌데 이 여인이 변화되었습니다. 새로워졌습니다. 물 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 갑니다. 자신을 벌레 보듯 하는 사람들에게로 가서 예수를 전합니다. 39절을 보겠습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으니라”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하기 원하는 것은 이 여인이 어떻게 해서 변화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도 오늘 사마리아 여인처럼 상처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는 와 앉아 있지만, 마음을 굳게 닫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생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현실 앞에서 힘들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를 상처를 받고, 아픔 가운데 살아가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1.첫째로 다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시’라는 말을 주목해 주십시오.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신 분들은 예수님을 꼭 만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이전에 예수님을 만났으나, 지금 식어진 분들이 계시다면 다시금 첫 사랑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설레고, 신나고, 순수하고, 꿈꾸었던 때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과 4장에는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모습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유대인 관원인 니고데모입니다. 이 사람은 남자입니다. 유대인 중에 유대인입니다. 지체 높은 사람입니다. 명망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밤에 찾아왔습니다. 간절함을 갖고 찾아온 니고데모를 예수님은 만나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 사람은 여자입니다. 이름도 없는 미천한 여자입니다. 성공과는 거리가 먼 여자입니다. 존경받지 못하는 밑바닥 인생입니다. 아픔과 상처가 많은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전혀 예수님을 만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말씀을 듣는 중에 마음이 열렸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찾아와 만나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4절을 보면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Had to는 의도적으로 하셨다는 말입니다. 또 킹 제임스 버전에는 “He Must go through Samaria.”로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가야만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려고 일부러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첫째는 니고데모의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찾아 왔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거듭나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 찾아 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오늘 교회에 왔습니다. 주님을 만나려고 왔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은 사모함을 갖고 예배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소명이라고 합니다. 헌데 우리는 두 번의 소명을 받습니다. 하나는 교회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교회를 와야 말씀을 들을 것 아닙니까? 일단 와야 합니다. 내 발로 교회를 찾아 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영혼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로 오셔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왜 와야 합니다. (2)그리고 둘째로 오셨으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아무런 기대감이 없었습니다. 헌데 주님과 대화를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으면서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렸습니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➀그러므로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이해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해되면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믿으면 알게 됩니다. 믿으면 이해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여세요. ➁이곳에 계시면서 마음을 열지 않고, 다른데 관심을 갖으면 안됩니다. 다른 데 마음과 생각을 뺏기지 마세요. ➂말씀을 잘 들으세요. 지금 주님은 설교를 통해서 찾아오십니다. 찬양을 통해서 찾아 오십니다. 우리는 매 순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기도 중에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느껴야 합니다.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야합니다. 직장속에서도 예수님을 느끼고, 만나야 합니다. 주님이 여인에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네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구하였을 것이다” 그러자 그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으면 나에게 주십시오.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게요?” 완전히 동문서답입니다. 보세요. 거듭나지 않으면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가 열리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이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허나 마음을 열고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면 깨닫게 하십니다. 믿음을 주십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적용)‘다시 예수를 만나셔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2014년을 위해서... 오늘 성도들의 사역지원을 위해서... 금식하며 한 주간동안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철저하게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래교회 문제는 100% 담임목사인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묻고 또 물었습니다. “담임목사인 내가 예수님과 처음 사랑에 빠져 있는가? 주님이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했는가? 한 영혼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가? 매너리즘에 빠져서 하루 하루를 보내지는 않았는가?” “주님이 지금 나에게 맡겨 주신 일을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충성을 다하고 있는가?” 제가 주님 무서운 줄 모르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 잃어 버리고 목회했구나! 깨닫고 회개합니다. 주님 다시 만나야 합니다. 식어진 가슴을 그대로 두지 마세요. 그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2.둘째로 예수님은 마음을 치유해 주십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말을 하자 마자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무나 생뚱맞은 말씀을 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왜 예수님은 갑작스럽게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십니까? (유머)여러분들도 가서 남편을 불러 오세요. 남편 없이 예배하면 안 받으신다는 겁니까? 남편을 불러오라는 것은 “거듭나려면 무엇보다 가장 먼저 너의 죄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죄인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마음속에 꼭꼭 숨겨 놓았던 자신의 죄악들을 쏟아 놓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예수 앞에 나갈 때 이 고백과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라는 진실한 고백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 우리 성도들 가운데 교회는 다니시지만, 회심의 경험이 없으시다면, 정말 회개해야 합니다. 반드시 죄인됨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남편을 데려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망신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새 길을 열어주시려는 것입니다. 죄를 인정해야 주님이 용서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정직한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은 “남편이 없다고 한 네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라” (한 주석에 보니까요? 아주 재미있게 이 말씀을 해석했습니다. 사람들마다 남편을 두고 산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두는 이유가 뭐예요? 보호받고, 의지하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여섯이나 두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이 여섯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남편은 돈이었고, 쾌락이었고, 인기였고, 성공, 자식, 성적 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의지하는 남편을 두고 삽니다. 헌데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세요?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인생의 진정한 남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결코 우리를 영원히 지켜주거나,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인사 - 당신은 남편이 몇 명 있습니까? 물어 보세요?) (이 여인은 일곱 번째는 예수님을 남편으로 만났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사는 남편(내가 의지하고 사랑했던 것)을 버리세요. 그리고 진정한 남편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세요. (2)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말씀은 상하고 지친 네 마음을 쏟아 놓아야 내가 치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가장 큰 유익이며 기쁨이 뭔지 아십니까? 솔직한 내 마음을 쏟아 놓는 것입니다. 속이 상한 마음이면 상한대로... 화가 나면 화난대로... 아프면 아픈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쏟아 놓으면 주님이 만져 주세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 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사함을 너 받으라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쏟아 놓으세요.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신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리고 이제는 주님만을 진정한 남편으로 삼고 주와 동행하는 거룩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3.셋째로 예배를 회복하셔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꿰뚫어 보시는 주님 앞에 이 여인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예배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예수님을 구원자로는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왔습니까? 19절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러면서 질문하는 것은 어디에서 예배를 해야 하는 것이냐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이 중요한 것이라고 일러주십니다. 그러시면서 23-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예배의 대상은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잊지 마세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영으로만 가능합니다. 영은 오직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헌데 죄로 인해서 영이 타락한 영이 되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헌데 예수의 보혈이 죄를 씻어 주시고, 새 영 곧 성령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도 예배를 통해서 날마다 자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자리를 지키셔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계속해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배만이 내 영이 살 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으시고, 순종하시고, 찬송하시는 거룩한 종들이 되셔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거듭난 자로서 예배의 삶을 통해서 내영이 날마다 자라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해다가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에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오해했습니다. 누가 우리 몰래 먹을 것을 갖다 드렸나?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서 참된 양식으로 삼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한 영혼을 섬기고, 구원하는 일입니다.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배부름을 얻고자 하십니까? 여러분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잠시 잠간 누리다가 떠나보내야 하는 이 세상의 것들입니까? 그것이 채워져야 배부르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오늘은 성찬예식과 2014년 미래교회 사역 봉사 지원서를 작성하는 주일입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세례 받으신 분들은 미래교회를 위해서 내가 무엇으로 섬길까? 고민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에 있다’며 헌신하길 축복합니다. 교회 봉사는 준비되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을 주시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면 힘을 주십니다. 헌신하면 감당할 힘과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진정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었던 거듭남의 은혜, 변화되는 은혜가 임하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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