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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분석(3)-어떻게 살 것인가? 답을 준 야고보 사도 | 이병수목사 | 2014-08-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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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4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마태복음 10장 2-4절 제목:제자분석(3) - 어떻게 살 것인가? 답을 준 야고보 신앙생활이 어렵고 힘들다는 사람들에게... 왜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살아야 합니까?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힘들게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상관이 없는데, 하나님을 믿기에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금요집회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①성부 하나님을 믿기에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악한 마귀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 결국은 승리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섬기는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내야 합니다. (예)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신앙생활을 가장 잘 하는 것은 끝까지 견뎌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면 처음에는 가혹하게 들리겠지만, 결국은 큰 위로가 된다고 했습니다. ②성자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더 이상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몸소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 분이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길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③또한 성령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상관없습니다. 믿지 않으면 맘 대로 살면 됩니 다. 육신이 하자는 대로 하면 됩니다. 걸릴 것이 없습니다. 부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필시 멸망의 길로 끝날 것입니다. / 허나 지금 하나님을 믿는 삶이 힘들지만 그래도 기꺼이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하나님이 펼치실 미래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제자 분석 세 번째 시간으로 요한의 형인 야고보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신약에 야고보는 세 명이 등장한다. 오늘 설교의 주인공인 사도 요한의 형 야고보이다.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흔히 잘 알고 있는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이다. 요한의 형인 사도 야고보의 기록은 성경에 거의 없습니다. A.D 44년에 헤롯 아그립바 왕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가장 주목받는 제자 한 사람이 야고보였습니다. 헤롯 왕은 야고보를 제 1 타겟으로 삼고 그를 죽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일찍 순교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믿었기에 순교의 삶을 기꺼이 살았습니다. 사도 야고보를 생각하면서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것인가? 답을 주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시간 사도 야고보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1.첫째로 분노로 살 것인가? 사랑으로 살 것인가?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헌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에 한 발짝도 들여 놓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 때 야고보와 요한이 열을 받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성격이 불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성격이 급하고 과격한지 예수님이 별명을 보아너게라고 지어주었습니다. 보아너게는 우레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천둥 같은 성격의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번갯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이 때 예수님은 그들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야고보와 요한은 분노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나, 주님의 뜻은 상관없이 자기 성질과 자기들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을 포함해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헌데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기분이 나쁘다고,,, 우리를 환영해 주지 않는다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판단하고 저주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적용)우리들도 이런 죄를 짓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을 부르신 주님의 목적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들은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험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도 정죄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들은 매일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우리 사회를 볼 때마다 아픔이 있습니다. 세월호와 같이 불행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큰 아픔이지만, 더 큰 문제는 필시 분노를 조장하는 세력들이 있는 것 같아 더 아픕니다.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펴놓는 세력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랑과 화해와 양보로 문제를 풀지 않고, 분노로 싸우게 하는 세력들이 독버섯처럼 도사리고 있습니다. 의심하게 만들고,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 거짓말을 만들어 내고, 서로 싸우게 만드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분별해야 합니다. 사회든 교회된 가정이든 분노를 조장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피스 메이커가 되시길 바랍니다. 트러블 메이커가 되시면 안됩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제목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동력이 두 가지입니다. (1)하나는 분노로 표현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입니다. ①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살아 갑니다. 시부모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동서 간에 경쟁 때문에 시댁에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직장생활도 늘 경쟁구도입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남들을 깍아 내리고 끌어 내리려고 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는 것도 보면 경쟁심 때문입니다. 다른 부모들과의 경쟁 때문입니다. 정말 자녀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 아이들이 정말 행복한 길이 무엇인지는 별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앞서가야 하니까?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열심히 사는데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사다리 구조로 살기 때문입니다. 늘 경쟁하고, 비교하며 살기에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②미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너는 이긴다. 너에게 무시 받고는 살지 않는다. ‘날 무시해. 두고 봐라. 내가 보란 듯이 본떼를 보여주마’ ③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우리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면 많은 성도들이 분노합니다. 하나님께 실망합니다. 무신론자들은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리차드 도킨스 같은 진론자들은 “우주의 이것저것을 들여다 볼 때 우주에는 본질적으로 계획도 목적도, 선도 악도 없고, 오로지 비정하고 차가운 무관심만 있을 뿐이라고 비웃었습니다.” 헌데 필립 얀시라고 하는 기독교 저술가가 고통의 현장에 찾아가 극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끔찍한 현장에 어둠만 가득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연민과 지비와 도움이 가득했지, 비정하고 차가운 무관심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고통받는 그곳에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이타적인 희생이 있었고, 위로와 사랑과 관심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총기 사고로 자녀를 잃은 부모에게 물었습니다. 자녀와 함께 한 6, 7년 세월의 기쁨이, 지금의 이 고통보다 더 크다고 생각합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은 주저없이 “그렇습니다.” 사랑해 본적이 전혀 없는 것보다 사랑했다가 그 사랑의 대상을 잃는게 훨씬 낫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상실의 고통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었구나! 그 선물은 내가 노력해서, 내가 자격이 있어서, 권리가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었구나! 선물을 도로 가져 갔다 할지라도 누린 만큼 감사하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갖고 누리는 것에 대해서 바른 태도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필립얀시의 유명한 책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라는 책에서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내 고통속에 함께 하시는 분이구나! 하나님은 몸소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오셨구나! 우리들이 고통을 견뎌내는 힘은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사랑이구나! 이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분노하지 마시고, 함부로 입을 벌려 원망하지 마세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다.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은사를 구하라. 사랑으로 뛰는 성도들이 되라. 야고보와 요한은 우레의 아들들이었다. 불같은 성격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헌데 이들은 사랑의 사도들이 됩니다. 주님 안에서 깍였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형 야고보는 순교자로 영광, 동생 요한은 평생 순교의 삶으로 영광 돌렸다. 형 야고보는 무명에 가깝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순교를 당했다. 동생 요한은 제자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다. 다른 사도들은 다 순교했는데, 요한만은 90세가 넘도록 살다가 자연사한 사람이다. 평생 순교의 삶을 산 사람이었다. 형제는 너무나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나 영광은 똑같았다. 이 두 사람은 모두가 예수님을 위해서 죽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다. 형은 죽음으로 영광을 돌리고, 동생은 거룩한 삶으로 영광을 돌렸다. 2.둘째로 남을 낮출 것인가? 나를 낮출 것인가?에 답을 줍니다. 제자들 간에는 누가 크냐는 싸움이 종종 있었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이니 서로 누가 크냐?는 경쟁심이 왜 없었겠습니까? 누가 더 사랑을 받느냐? 누구를 더 인정해 주느냐? 주님이 가장 믿음직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얼마 전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의 어머니를 모시고 예수님께 찾아와 구했습니다. 훗날에 저희들을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도록 해 주십시오.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우리도 함께 영광을 받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구하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높아지는 삶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상은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내가 높아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①하나는 남을 낮추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내가 높이지려면 남을 낮춰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남을 낮춰요? 남을 끌어 내리는 것이다. 남을 공격한다. 비판한다. 남의 약점을 잡거나, 모함을 하거나, 곤경에 빠뜨려서 끌어 내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집니다. 직장에서도 이런 일들을 많이 경험하시지 않으십니까? ②또 하나는 내가 남들보다 더 높아져야 합니다. 그럴려면 자신을 포장해야 합니다. 과장해야 합니다. 위선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랑한다. 그럴듯한 사람으로 포장해야 합니다. 헌데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을 보여 주신 것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신 것입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낮아져 다른 사람들의 발을 닥아 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큰 자입니까? 섬기는 자입니다. 세상에서 강해지고 높아지는 방법이 뭐예요? 일류대학에 들어가고, 박사학위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아무나 못합니다. 어려운입니다. 그러나 섬기는 일은 쉽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큰 은사는 받는 것, 위대한 설교자가되는 것이 쉬운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낮아져서 발을 닦아주는 것은 쉽습니다. 내 마음만 내려 놓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낮아지면 됩니다. 남을 낮추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낮아지는 것은 쉽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들의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 아닙니까? 주님이 품으셨던 꿈을 우리도 품어야 합니다. 남들을 낮추는 삶이 아니라, 나를 낮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처럼 살기 원합니다. 우리들이 신자로서 마땅히 품어야 할 꿈은 나를 낮춤으로 남을 높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오직 하나님만 높이는 삶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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