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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의 삶(2) - 끝까지 견디라 | 이병수목사 | 2014-12-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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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7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마태복음 10:16-31 제목:제자의 삶(2) -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되라 현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보면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하나는 세례요한 형입니다. 물론 세례 요한은 사명을 받고 나실인으로 구별된 삶을 사신 분입니다. 다만 비유를 하자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생활한 것처럼 현실도피적인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이지요. 현실에 맞서 싸우기 보다 문제가 있으면 피하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싫어하고, 현실에 맞서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잊기 위해서 기도원에 자주 올라가고,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②둘째로 롯과 같은 유형이 있습니다. 롯은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헌데 불신자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지 못하고, 세상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고 살았습니다. 때로는 갈등이 되면서도 적당히 타협하며 살았습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입니다. 일요일에는 교회를 다니지만, 세상에서는 일반인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지 못하고, 세상의 흐름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③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유형은 제자형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만, 세상에 섞이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 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리 가운데 살지만, 목자 되신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예수의 제자로 살아 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유형이십니까? ①번입니까? ②2번입니까? ③번입니까? 어느 유형이 제일 많을까요? 예! ②번 아니면 ③번일 것입니다.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양으로 살려면 힘들지요. 이리 가운데 양은 금방 드러납니다. 양으로 살기가 너무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월요일이면 출근할 때, 이리의 탈을 쓰고 나갑니다. 여러분의 집에 이리 탈 하나씩은 다 있지 않습니까? ㅎㅎ (반대로 교회 안으로는 양의 탈을 쓴 이리가 들어오기도 하지요.) 롯과 같이 양심에 가책을 받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리의 탈을 쓰고 살아갑니다. 나만 그러냐? 남들도 다 그래!라고 생각하며 적당히 어울려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삶은 당연히 ③번 예수님의 제자로 세상 속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뭘까요? 민낯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리의 탈을 쓰지 않고, 그냥 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리들 속에서 양으로 살려니 부담스럽고, 위험하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양으로 사는 용기가 믿음입니다. (예화)연예할 때는 얼마나 예쁩니까? 헌데 신혼 첫날 민낯을 보았을 때, 큰 충격에 빠지는 것입니다. 내가 속았다고 생각을 하지요. 신앙생활에서도 변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에서도 양, 집에서도 양, 직장에서도 양, 학교에서도 양으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양으로 살아가는 것을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이란?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당당히 보여주고 사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두 번째로 제자의 삶이란 “끝까지 견디라는 것입니다” 22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님은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보에 기록된 메시지 성경을 보겠습니다. 21-23절입니다. “너희가 전하려는 분이, 자기들 기분이나 맞춰주는 어떤 우상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임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너희를 대적할 것이다. 심지어 너희 가족들도 그럴 것이다. 큰 사랑을 선포했는데 그처럼 큰 미움을 맛보게 되니,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냐! 그러나 포기하지 마라. 굴복하지 마라. 마지막에 가면 그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너희가 구할 것은, 성공이 아니라 생존이다. 살아남는 자가 되어라.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다.” 하나님 믿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가 뭐예요? 자기들 기분이나 맞춰주고, 복을 준다고 하는 우상을 전하면 좋아할 텐데, 하나님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회개하라고 하니까 싫어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하지만 환영받지를 못합니다. 저들을 구원하려고 복음을 전하는데 미워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라는 것입니다. 제자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성공이 아니라, 생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든지 세상 속에서 양으로 살아남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끝까지 견딜 수 있을까요? 견딜 수 있는 비결은 뭘까요? 1.첫째로 믿으십시오. 28-31절을 보십시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으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이것만 믿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다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믿지 않는다고 살아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견뎌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1)하나님이 절대 주권자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은 영혼이 진짜입니다. 하나님은 몸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던지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고 하셨습니다. (2)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도 귀히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먹거리가 참새구이였습니다. 참새 두 마리에 한 앗사리온이었습니다. 앗사리온은 1000원, 2000원의 작은 단위의 돈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값싼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무멸 참새보다 귀한 우리들을 지켜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녀인 우리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3)하나님은 우리를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합니다. 노랑머리는 평균 14만 개, 검은 머리털은 12만개, 빨강머리는 약 9만개라고합니다. 헌데 하나님은 우리들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실만큼 속속들이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은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는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환난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나 때문에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넘어지기도 하고, 어려움도 겪고, 힘든 일도 있겠지만, 믿으세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만한 일로 너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화)우리들이 가스 불을 붙일 때 불꽃이 필요합니다. 가스통에 아무리 많은 가스가 들어 있어도 불꽃이 없으면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에 우리의 믿음이라는 불꽃을 갖다 댈 때 놀라운 기적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2.둘째로 끝까지 견뎌낼 수 있는 비결은 한 걸음씩 가라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믿음의 삶이란 날개를 펼쳐 저 높은 곳에 단숨에 날아오르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의 삶이란 계속 걸으며 나아가지만 지치지 않고 중단하지 않고 계속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아주 정확히 정의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뭐예요? 이 환난으로부터 단숨에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기적 같은 방법으로 날아오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삶의 현장에서 주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고난의 길을 가면서 그 때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아가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종종 식당에 가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성경 말씀을 걸어 놓은 것을 봅니다. 사실 이 말씀의 참된 의미를 아는 사람은 이 말씀을 걸어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걸어 놓은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정말 믿음이 좋든지...아니면 바보든지...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어떤 결과를 주시든지 나는 자족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최선을 다하지만, 가게가 불황으로 망해도 나는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헌데 이 말씀을 걸어 놓은 이유는 “다른 가게는 다 문을 닫는 한이 있어도 우리 가게만큼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대박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의 능력은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지치지 않는 삶, 환경에 함몰되지 않는 삶, 넘어졌다가도 다시 벌떡 일어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참된 능력입니다. (예화)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2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말하면서 세 가지 이미지를 사용했어요. ①너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인이다. ②너는 운동선수이다. ③너는 수고하는 농부이다라고 했습니다. 보세요. 그리스도인들은 군인, 운동선수, 농부예요.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어요. -기다림의 싸움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열매를 거둘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기다림의 싸움에서 패하면 안됩니다. 단숨에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수고를 해야 합니다. 매일 매일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많은 저항이 있지만 극복해 내야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적용)끝까지 견뎌내기 위해서는 예배 생활의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장담하건대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예배의 자리만 지켜도 한결같은 믿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려야 매일 매일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3.셋째로 끝까지 견뎌낼 수 있는 비결은 날마다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현재의 고난을 넉넉히 이겨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맞이하게 될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학생들이나 성도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삶 가운데 소망을 거둬버리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수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늘 고백하기를 로마서 8장 18절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늘 바울은 뭘 바라보는 것입니까? 현재의 고난이 아닙니다. 장차 받을 영광입니다. (예화)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문이 있습니다. 모든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져줍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내가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는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가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합니까?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십자가가 우리를 져줍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믿음은 선배들은 어떻게 고난의 무게를 이겨 냈을까요? 이들에게는 고난이 짓누르는 무게보다 더 강한 믿음과 소망의 버팀목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하중도 견뎌낼 수 있는 주님의 사랑과 살아계심을 경험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아무리 힘들도 어렵다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끝까지 견뎌봐야 압니다. 주바라기 이지선씨가 전신 화상을 입고 괴물처럼 자신의 몸이 망가졌을 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시간들이었습니다. 헌데 그 고통의 터널을 견뎌내고 지금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나의 가는 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여 정금같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할만큼 치유되고, 회복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끝까지 가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만 보지 마세요.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약하디 약한 양을 왜 하나님은 이리가운데로 보내십니까? 그 속에서 주와 함께 견디라는 것입니다. 소망 중에 견디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오늘은 주님의 살과 피를 기억하는 성찬식이 있습니다. 지금 환난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양으로 살기 너무 힘드신 분들이 있습니까? 그래도 주님이 십자가를 참으사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살과 피를 받으면서 견뎌 내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게 하심 같이 우리들도 다시 살 것을, 영원히 살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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