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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를 불면 춤을 추십시요 이병수목사 201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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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성경:마태복음 11:15-19

제목:피리를 불면 춤을 추십시요

(도입)여러분은 어릴 적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습니까? 잘 안 듣는 사람이었습니까? / 젊은이들은 지금 부모님의 말을 잘 듣는 사람입니까? 지지리도 안 듣는 사람입니까? / 결혼하신 분들은 남편과 아내의 말을 잘 듣는 사람입니까? 안 듣는 사람입니까? / 성도로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목회자의 말을 잘 듣는 사람입니까? 안 듣는 사람입니까?

아마도 우리 대 부분은 잘 안 듣는 쪽일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것입니다. 나 위해서 해 주는 말들입니다. 나 잘되라고 하는 말들입니다. 헌데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을 안 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원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고 자기 마음대로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우리 모두는 원죄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 원죄는 불순종의 뿌리이기에 정말 안 듣습니다.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정말 들어야 할 말은 안 듣고요, 듣지 말아야 할 말은 참 잘 듣습니다.

 

오늘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귀 없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서 귀 있는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귀를 기울여 듣고 깨달아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잘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헌데 정말 안되는 것이 또 순종하는 것입니다. 듣고 순종하면 복을 받는데, 본성상 말씀을 듣는 것이 잘 안됩니다. 이 불순종을 극복해야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본성을 꺽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약속한 복을 받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2-25절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적용)왜 교회를 오래 다녀도 변화가 되지 않습니까? 바로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이 들은 것이 믿음이라고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이 듣고 많이 아는 것이 믿음 아닙니다. 실천하는 자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16절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여기에서 ‘이 세대’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날마다 읽는 사람들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철저한 경건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헌데 예수님은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오신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헌데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기는커녕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요?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적용)오늘 날에 “ 이 세대”는 현대교인들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다닙니다. 성경도 읽습니다. 헌금도 합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헌데 정작 예수님에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항복하지 않는 교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십시오.

당시 장터에서 아이들이 놀이를 했습니다. 놀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제일 재미있는 놀이는 흉내 내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식과 장례식을 흉내 내면서 노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우리 나라와 비슷했습니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추는 것입니다. (예)어릴 적에는 상여행렬을 자주 보았습니다. 상여꾼이 노래를 하면 상여를 맨 사람들이 추임새를 놓곤 했습니다. 흔히 저승가라고 하는데...흉내 내면서 놀곤 했습니다.

여보시오 사자님네 노자돈도 갖고 가오 / 어- - 야 - - 어 - - 야

만단개유(만가지로 설득하고 깨우친다는 말) 애걸한들 어느 사자들을손가 / 어 - - 야 - - 어 - - 야

불쌍하다 이내신세 인간하직 망극하다 / 어 - - 야 - - 어 - - 야

헌데 아무 반응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빗대어 주님께서 오늘 날 많은 교인들이 이와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날 우리 성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리를 불면 춤을 추십시오.” 이것을 현실에 적용하면,

1.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십시오.

원죄가 있어서 순종하는 것이 처음부터 잘 안됩니다. 그래도 극복해야 합니다. 처음은 어렵지만 한 번 두 번 순종하다보면 됩니다. 잘 순종하려면 맛을 알아야 합니다.

①예수 믿는 맛을 아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쉽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맛을 알아야 합니다. 맛을 모르면 예배 만큼 힘든 것도 없습니다. 헌데 맛을 알면 예배처럼 기쁘고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맛을 알려면 의도적으로 순종을 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회를 잘 못먹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안 먹을 수 없었습니다. 시도를 했습니다. 도전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던 회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순종을 해야 맛을 알게 됩니다.

②찬송의 맛을 알면 찬송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헌데 찬송의 맛을 모르면 입이 안 열립니다. 5절 찬송가가 나오면 짜증이 납니다. 찬송하는 사람들 판단만 합니다. 가사가 틀렸네... 오타가 났네... 목사님 또 틀렸네... 맛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③기도도 그렇습니다. 기도의 맛을 맛보신 분들은 기도가 즐겁습니다. 기도가 힘들지 않습니다. 기도하기까지 영적인 갈등이 있지만, 막상 기도를 시작하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④신앙생활을 하면서 순종하는 맛을 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용서하는 기쁨, 섬기는 기쁨, 나누는 기쁨을 아는 사람들은 힘들지 않습니다.

⑤특별히 말씀의 맛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119편 103절에서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맛을 알면 순종하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맛을 모르니까 힘든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 가지씩 한 번 도전해 보세요. 그래서 맛을 알고 신앙생활 하는 거룩한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또한 하나님이 사랑하라면 사랑하십시오.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오늘 날을 3무의 시대라고 한다. 여러 가지입니다. 본문에 근거해서 우리들에게서 떠나 보내야 할 무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첫째로 무관심입니다.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관심이라고 했습니다.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궁금한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갖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날은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습니다. 노아 때는 먹고 마시고 놀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하는 일에 정신없이 살다가 심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영원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헌금해 주시는 겨자씨 헌금으로 올 해부터는 세 사람을 돕습니다. 홀로 사시는 할머니 한 분과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가는 두 형제입니다. 작은 것이지만, 서로를 돌아보는 출발이기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바라기는 겨자씨 선교가 계속해서 확산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30명까지 섬기면 좋겠습니다.)

(또한 올해부터는 미자립 교회인 한 시골교회를 돕습니다. 우리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눌 수 있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교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돌아볼 수 있다면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더 많은 교회들을 섬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관심이 회복되길 바랍니다.

 

(2)둘째로 떠나 보내야 할 것은 무감동입니다.

어느 시인은 “내가 왜 이것을 몰랐을까!”하는 지성에 대한 콤플렉스는 갖으면서, “내가 왜 이것을 느끼지 못했을까”하는 감성에 대한 콤플렉스는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함께 느끼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하는 감성이 이렇게도 메말라가고 있는 것을 왜 부끄러워 하지 않을까?라고 했습니다. 오늘 날의 시대를 감동이 없는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면 감동을 잘 하는 사람들이 되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웃음과 눈물입니다.

①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서로 웃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가장 좋은 전도선물은 미소입니다. (옆에 분들을 보시고, 한 번 환하게 웃어 주세요)

'어린 왕자'라는 아름다운 책을 쓴 생떽쥐베리가 나치 독일에 대항해서 싸운 전투기 조종사였으며,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어서 감방에 갇혔다. 다음 날이면 처형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죽게 된 것이 확실하자 극도로 신경이 곤두서고, 두려움에 고통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순간 담배를 찾아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다행히 한 개피를 발견했습니다. 헌데 성냥이 없었습니다.

간수를 불렀습니다. '혹시 불이 있으면 좀 빌려주십시요?" 간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담배에 불을 붙여 주기 위해 걸어왔습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성냥을 켜는 사이에 무심결에 서로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바로 그 순간 생떽쥐베리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신경이 곤두서서 그랬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니까 미소를 안 지을 수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미소를 지었습니다. 미소를 짓는 순간 두 사람의 가슴 속에, 하나의 불꽃이 점화되었습니다. 마치 나의 미소는 창살을 넘어가 그의 입가에도 엿게 미소를 짓게 했습니다. 서로 미소를 보내면서 단순히 한 사람의 간수와 죄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서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간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생떽쥐베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자식이 있소?' '그럼요. 있구 말구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얼른 지갑을 꺼내 가족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아이들 사진을 꺼내 보여주면서 앞으로의 계획과 자식들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을 얘기했습니다.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떽쥐베리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습니다. 자신은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못할 것이기에 두렵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내 자식들이 성장해 가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고. 내 가족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너무 무섭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어른거렸습니다.

 

얼마 뒤 갑자기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일어나서 감옥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더니 나를 조용히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옥을 빠져나가 뒷길로 해서 마을 밖까지 나를 안내해 주었습니다. 마을 끝에 이르자 풀어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뒤돌아 서서 마을로 걸어 돌아갔습니다. 이 때의 경험을 생각하며 생떽쥐베리는 한 번의 미소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한다해도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이야기해도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우리의 미소 하나, 눈물 한 방울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지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많이 서툴다고 하는데요? 힘들어도 감정을 나누는 것을 자꾸 하셔야 합니다. 서로에게 따뜻한 미소 한 번이 얼마나 상대에게는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설교를 하면서 웃길 때 웃고, 마음이 찔릴 때는 우는 성도들을 봅니다. 그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피리를 불어도 춤 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오늘 날의 교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주님이 피리를 불면 춤을 춥시다. 누군가가 슬피 울면 가슴을 치며 함께 아파하는 반응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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