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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한 갈대같은 우리를 꺽지 않으시는 하나님 | 이병수목사 | 2015-02-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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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8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마태복음 12:9-21 제목:상한 갈대 같은 우리를 꺽지 않으시는 하나님! 안식일 문제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손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적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1.첫째로 양보다 사람이 훨씬 더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손마른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예수를 믿으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이것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지금도 철저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눌러 줄때까지 기다립니다. 유대인들만 사는 아파트는 안식일에는 자동으로 각 층마다 다 서게 되어 있습니다. 또 가스 불이나 전기 불도 켜지 않습니다. 정 필요하면 이웃 사람에게 부탁해서 켜달라고 합니다. 지금도 이렇게 철저히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인데, 예수님 당시에는 얼마나 더 철저 했을까요? 헌데 그런 유대인들도 자기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재산의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이유는 자기 재산에 손해를 볼까봐 구덩이에 빠진 양은 구해내면서, 죄와 질병으로 깊은 구덩이에 빠진 손 마른 사람을 구하는 것을 비난하는 유대들에게 사람이 양(재산, 명예)보다 얼마나 더 귀한가?를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사람과 양이 어떻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헌데 사람들이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남보다 내 양을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남보다는 내 돈이 더 귀합니다. 내 볼 일이 더 중요합니다. 남의 자녀보다 내 자식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만약에 손 마른 사람이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전혀 다를 것입니다. 헌데 남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아픔보다 내 양 한 마리가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양 한 마리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예화)천하가 다 귀해 보여도 한 생명을 잉태하셨을 때 얼마나 기쁘고 귀하셨습니까? 내 손주나 내 자녀나 내 가족의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내 양이 귀하고, 내 자녀가 귀하고, 내 돈이 귀한 만큼 그리스도인들은 남들을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화)오래 전 어느 신문에 나면서부터 정박아가 된 장애 아이들에게 직업 훈련을 시키는 사설 단체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돈이 없어서 집세도 내지 못하고 추운 겨울에 난로도 피우지 못한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그 다음 다음 날 40대 주부 하나가 수표 다섯 장에 190만원을 들고 밀린 집세도 물어주고 난로도 피워주라며 신문사를 찾아왔습니다. 자기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그 부인은 쪽지에 다음과 같은 사연을 남겼습니다. 제가 평생 잊지 못하고 있는 그 쪽지의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중학교에 다니는 둘째 아이가 신문을 들고 들어오면서 '어머니 우리가 도와 주어야 할 사람이 생겼어요'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가 있는데 둘 다 다 전교에서 일등과 이등을 다투는 수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아들을 둘씩이나 주신 것은 자랑하거나 뽐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큰 아이의 대학 입학 준비금을 제외한 모든 돈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이 지금은 이만한 심부름 밖에는 안 시키시지만 나중에 더 큰 심부름을 시키실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랑하는 데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도우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2.둘째는 기적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헌데 주님의 당부가 있습니다. 나타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기적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들이 기대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병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 받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주님으로 인해서 내 힘든 문제들이 해결받기 원하는 기적을 원합니다. 물리적인 해결을 기대합니다.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왜 기적을 행하신 것을 나타내지 말라고 당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16절에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으니” 왜 이런 경고를 하셨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병고침을 받습니다. 예수님께로 오면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내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라는 소문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은 당장 눈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만 알고, 따르지 않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냐?”를 일깨워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이다.) 갈대를 사람으로 많이 비유합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니골레또에서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파파로티의 노래로 들어 보았습니다. 파스칼은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팡세에서 그는 “신은 한가닥의 수증기, 한방울의 물로도 사람을 충분히 죽일 수 있다. 사람의 육체는 너무나 약하디 약한 존재이다. 그러면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은 무엇인가? 사고할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이것이 인간의 최고의 가치이다. 사람의 의무는 올바로 생각하는데 있다. 생각의 순서는 ①우선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들이 있다. 다른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들이 있다.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약하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②그 다음에 자신의 창조자를 생각해야 한다. ③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헌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춤을 추고, 악기를 켜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쓰거나, 사고 팔고 일을 하거나, 취미생활은 생각을 한다. 또 경쟁에서 이기거나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생각은 하면서 인간이 누구인가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상한 갈대”라고 하셨습니다. 갈대 자체도 너무나 약한데 상한 갈대입니다. ①상처 입은 갈대입니다. ②이미 꺽인 갈대입니다. 상한 갈대는 그대로 두면 금방 죽고 맙니다. 사람은 이미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꺽인 연약한 존재입니다. 헌데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부러진 갈대로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려고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예언했습니다. 700년 후에 바로 예수님이 자신을 향해서 예언해 놓으신 이사야 42장의 말씀을 인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주님이 재림하셔서 이 땅을 심판하시까지 당신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들을 꺽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정말 알아야 할 것은 기적을 경험하는 것보다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래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서 주님의 도우심을 받으려고 나올 수 있습니다. 질병을 치유 받고 건강해져서 주님께 충성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올 수 있습니다. 죄책감과 외로움을 모두 주님께 내려 놓고 죄사함 받고, 참된 위로를 받고 싶어서 올 수 있습니다. 자녀들 문제로, 경제 문제로, 기타 여러 가지 문제로 도움을 받으려고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 그러나 여기에 머물면 안됩니다. 이것은 미래교회가 아니어도 어느 교회를 가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래교회를 다니는 정말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백이면 백가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이라는 이유 하나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 하나로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라고 모인 것입니다. 어떤 분은 빨강색입니다. 어떤 분은 노란색입니다. 각각의 색깔들을 갖고 있습니다. 다양한 색깔을 갖은 분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될 수 있을까요? 예수 안에서 무지개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색깔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색깔이 예수님 안에서 조화를 이루면 됩니다. (교회의 존재이유) 지난 주간에 서울에서 세미나가 있어서 잠시 다녀왔습니다. 그 세미나에서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이라는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에 가나안 성도들이 대략 100만 명이라고 합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심정적으로는 예수를 믿으나, 제도권 내의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또는 출석은 하지만 교회 일에 전혀 참여를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 쇼핑족들이 아닙니다. 이상주의자들도 아닙니다. 제도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훨씬 더 진지한 참 교회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설문조사했습니다. ①교회내 분쟁과 싸움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②만족스럽지 못한 설교입니다. ③목회자와의 개인적인 갈등입니다. ④교회 봉사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⑤교회 내의 인간관계 갈등에서 오는 문제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교회라면 돌아가겠는가? 소망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물었습니다. ①올바른 목회자가 있는 교회 ②공동체성이 있는 교회 ③부정부패 없는 건강한 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①번과 ③번은 약속드리겠습니다. 올바른 목회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만족스럽지 않은 설교를 하지 않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부정부패가 없는 교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교회 재정이나 행정에 대해서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하겠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②번은 해 주셔야 합니다. 공동체성이 있는 교회! 성도간에 서로 마음을 나누고, 관심을 갖고, 하나되어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여러분이 해 주셔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가 잘하면 성도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만족할 줄 알았습니다. 헌데 목회자가 채월 줄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도들 간에 채워야 할 사람의 공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가나안 성도들에게 바라는 것은 “문제를 보았으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뛰쳐 나가기 보다 자신이 먼저 밀알이 되면 안되나? 그러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나? 세상이 어둡다고만 하지 말고, 자기부터 성냥불이라도 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부터 촛불이라도 밝히면 세상은 점점 밝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무슨 감동적인 예화보다 우리들의 순종의 근거는 주님의 말씀 아닌가? (1)마태복음 5장 43-45절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①원수를 사랑하라. 누가 원수인가? 원수는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까이에서 사는사람 중에서 원수가 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②그를 위해서 기도하라 ③이렇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헌데 예수님은 이렇게 하셨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예수님은 싸우러 오시지 않았다.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다. 사랑하러 오셨다. 죽으러 오셨다.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셨다. (2)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많은 기적을 베풀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랑하지 마세요. 그것을 나타내지 마세요. 주님은 기적을 행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사람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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