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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거역하지 마십시요 이병수목사 201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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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5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마태복음 12:22-32

제목:성령님을 거역하는 죄를 짓지 맙시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을 듣습니다. 31-3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 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 사람들이 성령을 훼방한 것이 무엇입니까?

(1)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들이 기대하는 메시야가 아니기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자로 주신 예수를 거부하는 한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2)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3)예수님을 향해서 눈과 귀와 입을 막고 사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귀신들려 눈 멀고 듣지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귀신은 신앙의 입구를 모두 막았다. 헌데 예수님이 신앙의 입구인 눈과 귀와 입을 모두 열어 주셨다.”신앙의 입구가 ①눈입니다. 내가 무엇을 바라보느냐?를 보면 내 믿음을 알 수 있지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②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귀를 열어 주셔야 합니다. ③입입니다. 우리 입술의 고백이 찬양과 감사와 기도여야 합니다. 입술의 고백이 믿음의 통로입니다.

헌데 마귀는 다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의 입구도 모두 막혀서 도무지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도 눈도 귀도 입도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날 우리들이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뭘까요?

우리들이 연약하여 성령을 거역하며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회개하여 돌아서야 합니다. 끝까지 성령을 거역하고 내 마음대로 살다가 돌아서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란 말 그대로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뭔가를 알아야 합니다.

1.첫째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알고 변화되셔야 합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구분하고,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성령님의 바램입니다.

(1)성령세례는 예수를 믿는 자들만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원자로 영접할 때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성령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2)성령세례는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흔히 거듭났다고 합니다. 헌데 성령충만은 날마다 자라가는 것입니다. 태어나기만 하면 안됩니다. 날마다 자라가야 합니다.

(3)성령세례는 신분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성령충만은 성품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①갈라디아서 4장 4-6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사람들의 죄를 사하시려고 그래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성령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영원토록 함께 계시면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세례를 받으면 신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죄인이 의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지옥 갈 자가 천국에 갑니다.

②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으면 성품이 변화됩니다. 사람이 달라집니다. (예화)영국 웨일즈 부흥운동에서 가장 수지 맞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나귀였다고 합니다. 평소에 사람들은 화가 나면 당나귀에게 화풀이를 했습니다. 당나귀를 걷어 차고, 당나귀에게 욕을 퍼부었습니다. 헌데 사람들이 은혜 받고 당나귀에게 회개를 했습니다. 당나귀를 위해서 축복 기도를 해주고, 당나귀를 잘 대해 주었습니다. /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서 누가 제일 수지 맞았습니까? 덕을 본 사람이 있기는 합니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예수는 내가 믿었는데, 가족이 덕을 봐야 합니다. 왜요?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품이 달라집니다. 사람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인격적이시기에 우리들도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화)말이 달라집니다. 폭언과 불평과 원망을 일삼던 입술이 찬양과 감사의 입술이 됩니다.

/얼굴 표정도 달라집니다. 일그러진 얼굴이 아니라, 평안과 기쁨의 얼굴을 합니다. 깊은 병이 들어도 표정은 밝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시면서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으신다면 죄송하지만, 성령을 거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서 덕을 본 사람들이 성령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완벽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나아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났으면 이제는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예화)솔직하게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어서 건강해지고, 일 잘 풀리고, 자녀들 잘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예수를 믿는 이유라면 우리는 너무나 얕은 기독교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 복 받고, 예수 믿어서 좋은 대학가고, 예수 믿어서 잘 되었다가 전부 아닙니다. 솔직히 건강한 사람들은 교회 밖에 더 많습니다. 부자들, 공부 잘하는 사람들도 교회 보다 교회 밖에 훨씬 더 많습니다. 이게 예수를 믿는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진짜 예수를 믿는 이유는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예화)10년을 중증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한 권사님이 계십니다. 매주 1부 예배를 온 가족과 함께 나옵니다. 한 분이 장애를 앓고 있으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헌데 이 가족들을 보면 늘 얼굴이 밝습니다. 활기차고, 기쁨이 넘칩니다. 서로가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보는 사람들이 다 은혜가 됩니다. 부자도 아닙니다. 그래도 당당하며, 중증장애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극진히 모십니다. 온 가족들이 이렇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뭘까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온 가족들이 정말 예수님을 믿기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예수 믿는 능력입니다.

-미움으로 가득했던 집안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어느 날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돈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편에서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감사하고, 서로 기뻐할 수 있다면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의 능력입니다.

누가 이렇게 하십니까? 성령님이 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힘들까봐 걱정을 해 주십니다. 헌데 솔직히 마음은 아프지만 힘들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상황은 안타깝지만, 그래도 낙심하지는 않습니다. 이유는 내 안에 성령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예화)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얕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표피만을 자극하는 얕은 인생을 살지 말고, 깊이 있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얕은 물 가에서 서성이지 말고, 내 말을 믿고 깊은 데로 가라는 것입니다. 늘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지 마시고, 성령충만함으로 변화되시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는 것을 목적삼기 바랍니다.

(예화)미래교회를 섬기시는 것도 깊이를 더 하시기 바랍니다.

에스겔이 한 환상을 봅니다. - 예루살렘 성전 동쪽 문지방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①물이 점점 차서 발목을 적십니다. ②더 물이 쌓여서 무릎까지 차올랐습니다. ③물은 허리를 채웠습니다. ④결국 물이 바다처럼 넘쳐서 자신을 완전히 덮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환상입니까? 문지방에서 나오는 물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해 지는 사람은 변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⓵처음에는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발목신자입니다. 출석신자입니다.

⓶허나 더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무릎 꿇고 기도하는 무릎 신자가 됩니다.

⓷그 다음은 허리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허리신자는 봉사하는 성도입니다. 허리를 써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⓸여기에서 머물면 안되고 수영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바닷물에 온 몸을 던져야 합니다. 성령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성령 충만한 삶을 누리셔야 합니다. (저는 수영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물에서 누리는 기쁨을 전혀 누리지 못합니다. 마음껏 수영을 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몸을 던집니다. 물속에서 신나게 수영을 즐깁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성령충만해 지는 길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기도와 말씀생활을 절대로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인격이 변화됩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를 받습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삽니다. 전 여러분들이 성령을 거역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 알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를 믿어서 주변 사람들이 덕을 봐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충만한 성도입니다.

 

2..둘째로 성령이 왜 오셨는지를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가셔야 했습니다. 남겨진 제자들을 홀로 두실 수 없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보혜사로 오셨습니다. 성령님의 이름이 보혜사입니다. 보 - 보호할 보, 혜 - 은혜 혜, 사 - 가르칠 사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①우리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②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③우리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1)먼저 성령님은 우리들의 보호자이십니다. (예화)보호자가 있다는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미성년자는 반드시 보호자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우리들의 보호자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셔서 인생길을 동행해 주십니다. 동행이 주는 힘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예화)2007년 5월에 시각 장애인 송경태 씨(47세, 시각 장애인 도서관장)가 아들(21세)과 함께 해발 3~4천m의 고지에 위치한 칠레 아타카마 사막 250km 코스를 6박 7일간 완주한 기사가 소개되었습니다. 이로서 송 관장은 사하라 사막, 고비 사막에 이어 세계 3대 사막 마라톤을 완주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송 관장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산소가 희박한 그 곳, 평지가 거의 없는 험한 코스를 달리며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없었느냐’고... 그는 담담하게 “왜 없었겠어요, 너무 여러 번 있었지요.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는 - 아들 때문이지요. 제가 포기하면 아들도 포기하게 될 까봐 이를 악물고 달렸습니다”

처음 이 마라톤에 참여한 아들의 고백도 유사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눈인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대회 4일째 무릎에 이상이 생겼지만, 아버지가 저렇게 달리시는데, 아버지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동행의 힘입니다. 동행의 기쁨입니다. 동행의 영광입니다. 위 이야기는 이들 부자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들도 사막을 달리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 없이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모님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녀들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 자녀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포기하고 싶을 때, 다 그만두고 싶을 때에도 다시 달릴 수 있는 힘은 사랑하는 가족들, 사랑하는 부모님들때문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목회의 길이 어찌 쉽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들이 떠나갈 때 만큼은 목회를 더 못할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는 이유는 주님 때문입니다. 나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우리들의 보호자 되시는 성령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고, 그분을 거역하는 것은 주님과의 동행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보호자 되시는 성령님이 계신데도 고아처럼 혼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엘리야가 자기 혼자 남았다고 절규할 때에 그곳에 성령님은 와 계셨습니다. 성령님은 까마귀를 통해서도 그를 먹이셨습니다.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2)또한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구하는 것은 늘 현실적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까? 자신들의 기대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정치적인 메시야, 구원자를 원했습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자를 원했습니다. 헌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니 약하고 무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니 예수님이 주시는 복도 다 거부한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을 거역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상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 에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얻는 것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까? 그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것입니까? 아니지요? 아니지요?

(예화)왜 예수님이 빵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도스트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은 주장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빵문제이다. 가족들이 서로 다투는 이유도 빵문제 때문이다. 나라마다 서로 총칼을 겨누는 것도 빵 때문이다. 빵만 충분하면 싸울 일도 없다. 모든 사람들이 배부르면 행복할 수 있다. 헌데 왜 예수는 빵을 만들지 않았나? 빵문제를 해결하면 전 세계를 다스릴 수 있었을 텐데... 빵 문제를 해결해주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텐데...”

정말 그렇습니까? 빵이 충분하면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까요? 전혀 다툼이 없을까요? 사람들은 빵을 얼마나 갖아야 만족해 할까요? 빵이 충분하면 더 이상 싸우지 않을까요? 인간의 욕심이 그렇지 않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게 뭘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주님과 교회가 전혀 다르게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빵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헌데 교회는 빵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과 우리들의 뜻이 전혀 다르게 가고 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 불행은 환경에 따라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힘든데,, 서로 사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믿기에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구보다 이 사실을 주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빵을 만들기를 거절하셨습니다. 대신 신명기에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답을 주십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니라”

이것을 아는 것이 성령을 거역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을 새롭게 빗어 가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헌데 우리들은 빵만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을 거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줄 수 없는 것을 주십니다.

①죄사함의 복을 주십니다.

②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주십니다.

③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④천국을 주십니다.

⑤세상에서는 뺏어 갈 수 없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십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데도 도무지 움직이지 않으시면 안됩니다. 성령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시간까지도 기도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성령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내 뜻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설교시간에도 깨닫게 하시고, 도전하십니다.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일어서라고 하십니다. 헌데 도무지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이 하시려는 일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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