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족 | 이병수목사 | 2015-03-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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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마태복음 12:46-50 제목:예수님의 가족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밖에 모친과 형제들이 와 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8-49절입니다.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충분히 호해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뜻이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혈연관계를 부인하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족들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섬기고 책임을 다 하셨습니다. 십자가 달려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도 십자가 밑에서 울고 있는 모친을 보시고 요한에게 부탁을 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그 때부터 요한은 평생 주님의 모친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섬깁니다. 왜요? 예수님이 모친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셨는가를 요한은 몸소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에 평생을 자신의 어머니로 섬겼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친과 동생들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로 이렇게 말씀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혈연관계보다 더 중요한 가족이 있음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두 공동체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혈연관계로 맺어진 육신의 가족입니다. 가정입니다. ②또 하나는 예수의 피로 맺어진 영적인 가족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피로 맺어진 육신의 가족과 믿음으로 하나된 영적인 가족을 균형 있게 사랑할 것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적용)우리들을 돌아 보십시오. 육신의 가족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사랑합니까? 헌데 육신의 가족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듯이, 예수님의 가족들인 성도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적습니다. (예화)20년 전만해도 목사님들이 당부를 하곤 했습니다. 너무 교회일만 하지 마라. 가정도 돌봐야 한다. 교회에만 있지 마시고, 가정으로 돌아가라. 예배드린다고 밥도 안해 놓고 오면 되겠는가? 교회를 사랑하듯 가정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헌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정반대의 말을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족 밖에 모르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육신의 가족에 매여 영적인 가족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돌보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항존직분자들까지도 가족에게 매여 교회를 돌보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균형감이 중요한데...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정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하나님의 일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인 교회를 세우는 일도 중요합니다. 가정을 세우는 것만큼 교회를 세우는 일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예화)한국의 프란시스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보영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명문대 의대를 나오고 의사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30억원되는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단체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무일푼에서 주님만 의지하고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단칸방에서 가출 청소년들, 고아 아이들을 함께 먹고 마시면서 그들을 키웁니다. 고생하는 오빠를 위해서 좋은 코트를 동생이 사주면, 한 번 입고 나갔다가 거리에서 떨고 있는 노숙자에게 벗어주는 분입니다. 이 분에게 아들이 있습니다. 180cm가 넘는 훤칠한 아들입니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아이입니다. 예의도 바른 아들입니다. 종종 이 아들이 가출 청소년들, 고아 아이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옵니다. 친 아들이 오면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질적이고, 화를 내고, 지적을 합니다. 한 아이는 목사님은 아들만 오면 왜 우리들에게 화를 더 내세요?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내 친아들처럼 사랑하지 않았구나! 난 거짓말쟁이였구나! 어느 순간 친 아들과 이 아이들을 차별하고 있었구나!’ 주님의 책망으로 들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친 아들을 보지 않기로 합니다. 너무나 보고 싶지만, 찾아 오지도 못하게 하고, 찾아가지도 않습니다. 버려진 아이들, 하나님이 주신 예수님의 가족들을 정말 사랑하기 위해서 친 자식을 멀리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박 목사님이 잘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주는 도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서 친 자식과 버려진 아이들을 똑같이 사랑할 수 없다면 내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예수님이 붙여주신 버려진 이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사사로운 감정을 내려 놓는 마음을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날마다 눈물로 자식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난 죄인이라서 두 가정의 아이들을 다 사랑할 수 없어요. 우리 아들은 하나님께 맡길게요. 주님이 맡아 주시는 것이 내가 키우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아요. 보고 싶고, 만나고 싶지만, 주님께 맡길게요.” 육신의 자녀도 귀하지만, 영적인 가족도 너무나 귀하기에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다만 육신의 가족들을 사랑하는 만큼 예수님 안에서 만난 믿음의 가족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의 근본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누구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5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오직 한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느냐?입니다. 어느 교회를 다녔느냐? 얼마나 큰 교회를 다녔느냐?가 아닙니다. 어느 교단의 교회를 다녔느냐? 어떤 직분을 맡았느냐?도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는 무엇을 갖고 주님 앞에 가려고 합니까? 나는 무엇 무엇을 했다. 내가 선지자 노릇을 했다. 귀신을 쫓아 냈다. 많은 권능을 행했다. 교회를 다녔다. 봉사를 많이 했다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헌데 주님이 보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뭘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족은 무슨 일을 했다는 것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족으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들도 결국은 제자로 살다가 갔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십자가 밑에까지 함께 했습니다. 성령님이 오신 마가의 다락방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도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신약성경 야고보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는 앉은 뱅이를 고친 일로 인해서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이런 일을 한 것처럼 그들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얼마나 담대하면서도 확신 있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들은 자신들이 누구인가? 자신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누굴 높여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헌데 이 고백을 누구에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당시 힘 있는 사람들 앞입니다. 세상 앞에서 당당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앞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를 전한다는 이유로 고난을 받습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5장 40-42절에서는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나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가족들입니다. 제자입니다. 위협을 당하고, 채찍에 맞으면서도 기뻐하지 않습니까? 사명을 계속해서 감당하지 않습니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가족들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1)거룩하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우리들이 흔히 믿음 좋다. 능력 있다. 성령 받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것입니까? 놀라운 일들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①헌금 봉투를 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헌금 봉투 보고 축복하게 하실까요? ②능력 있다는 사람들을 보면 무례합니다. 반말을 하고요. 정죄를 합니다. ‘아켈라 쌀라 미켈라세’하고 자식 문제 있지! 자식 문제 없는 사람 어디 있나요? 가정에 문제가 있네. 지금 힘들지... 다 힘들지요. 이런식으로 넘겨 짚어서 사람들을 현혹해요. ③검지 손가락을 세우고 지금 성령의 음성을 수신한다고 해요. ④막 웃고, 울고, 쓰러지고, 금이빨이 되었다고 자랑을 해요. 이런 것은 귀신들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절대로 성령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속으시면 안됩니다. 성령이 정말 역사하시면 회개하게 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 그리고 행실의 변화를 통해서 거룩해 집니다. 이것이 진짜입니다. / 그리고 뜨겁게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되게 합니다. (2)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헌데 왜 순종하지 않습니까?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 주간에 미즈노 겐조의 ‘감사는 밥이다’라는 시집을 읽었습니다. 미즈노 겐조는 우리 나라 송명희 시인입니다. 어릴 적에 뇌성 소아마비로 인해서 코와 눈과 귀와 뇌만 정상입니다. 말도 못합니다. 몸도 움직이지르 못합니다. 이 시집은 어머니가 스펠링을 지적하면 눈을 깜빡여서 단어를 만들고, 그래서 시를 쓴 것입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 가겠습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깜빡임으로 지은 시 - 입도 손발도 잃은 나를 28년 동안 돌봐 주신 어머니, 좋은 시를 지을 수 있도록 사계절 꽃을 피워 주신 어머니, 깜빡임으로 지은 시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노트에 써 두신 어머니 놀랍지 않아요? 책 제목이 감사는 밥이다입니다. 감사 - 햇살을 받으며 조카딸이 손톱을 깍아 주었다. 벚꽃을 바라보며 제수씨가 머리카락을 잘라 주었다. 눈 녹는 소리를 들으며 동생이 목욕시켜 주었다. 이른 봄의 달을 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렸다 예수님의 가족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아버지의 기대대로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니,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시니,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하루 하루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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