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받아야 100배의 복은 무엇일까? | 이병수목사 | 2015-03-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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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8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마태복음 13:16-23 제목:우리가 받아야 할 100배의 복은? (예화)교회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이 천국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천국 설교를 마치고 난 뒤에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다 일어나 보라!고 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천국엘 가고 싶다고 일어났습니다. 헌데 한 아이만 일어나질 않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넌 천국 가고 싶지 않니?”그 아이는 울상을 지으면 말했습니다. “전 예배 마치면 학원엘 가야 해서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이것이 오늘 날 그리스도인의 현주소는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천국이 좋은 줄 압니다. 천국이 있다고 합니다. 천국에 가기 싫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학원이 더 급합니다. 학원을 가야 해서 천국을 생각할 시간도 천국을 누릴 시간도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학원이 뭐예요? 무얼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너무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학원입니다. 당장 학원가고 먹고 살아야 해서 정말 준비해야 할 것을 준비하지 못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분주하고 바빠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와 예배 드리고, 내 영혼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시간을 갖아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 앞에 내가 잘 살고 있나? 내 영혼과 인생을 주님께 기도하고 맡기는 시간조차 없이 학원에 가기만 바쁘다면 우리는 잘 못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큰 무리와 소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 알아듣지는 못했습니다. 듣기는 큰 무리가 들었지만, 소수의 제자들만 깨달았습니다. 왜냐면 비유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을 통털어 보면 약 40여개의 비유의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3장에만 7개의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다 알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자만 알기를 원하십니다. 소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허나 제자들은 주님께 물었습니다. 알고자 햇습니다. 주님을 찾아와 비유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묻습니다. 가르쳐 달라고 구합니다. 보세요. 수 많은 사람들이 듣지만 구하는 자만 알게 되는 것이 비유입니다. 사모하는 자만 알게 됩니다. 관심 없고, 게을러서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중요한 것들을 가르쳐 주실 때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화)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다 은혜 받는 것은 아닙니다. 다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을 맞아 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다 맛을 보지는 못합니다. 다윗은 “주의 말씀이 어찌 그리 내게 단지요 꿀송이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맛을 본 사람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도 소수의 제자들과 같이 맛을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맛을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맛을 보고, 찬양의 맛을 보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감격과 감사,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큰 무리에 속으면 안됩니다. 큰 무리가 모였다고 부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좋아하시지 않았습니다.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단단한 마음의 벽을 뚥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고집, 의심, 게으름, 무관심, 정욕, 욕심, 분주함과 같은 단단한 껍데기를 부수고, 들어와 속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부흥입니다. 소수의 사람이라도 속사람이 깨어지는 사람이 있을 때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큰 무리가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말씀 앞에 깨어지는 부흥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이 하시고자 싶어 하시는 말씀이 뭘까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첫째는 우리 각자의 마음의 상태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1)길가와 같은 마음 밭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해석을 먼저 보겠습니다. 19절입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여기에는 초신자들이 많습니다. 들어도 잘 모릅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방해가 많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깨달으려고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반드시 악한 마귀의 공격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을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초신자들은 그럴수 있지만, 신앙의 연수가 오래 되었는데도 들리지 않는다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도무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회개하지를 않습니다. 주님이 몇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헌데 돌이키지 않습니다. 이미 사탄이 그의 생각과 마음을 장악해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깨닫지 못합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은 세상일이 너무 좋아서 말씀을 받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날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하는 일에 너무 빠져서 세상이 끝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7-39절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세상이 너무 좋아서 세상 일에 너무 빠져서 너무 바빠서 죽음도, 영생도, 영원 나라도, 심판도 있음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길가와 같은 마음 밭입니다. (2)돌짝 밭과 같은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의 해석입니다. 20-21절입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은혜 받아요. 결심도 해요. 헌데 얼마 못가요? 결심이 짧아요. 울음 끝 만 짧아야 하는데, 기도의 삶도 짧아요. 기도하는 것 같은데 얼마 못가서 기도의 자리를 떠나요. 믿음의 끝도 짧아요. 예수를 믿으면 고난이 있어요. 헌데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실족해요. 이럴려고 예수를 믿었나? 예수를 믿는데 왜 어려운 일이 오나? 그래서 실족해요. 조금만 부담이 되면 힘들어해요. 낙심해요. (3)가시떨기가 가득한 마음이 있어요. 22절이예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열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말씀을 들을 여유가 없어요. 말씀을 듣기는 듣는데 염려가 너무 많아요. 걱정이 너무 많아요. 말씀보다 걱정과 염려가 더 많아서 순종을 못해요. 물질에 욕심이 많아요. 십일조 이야기하면 넘어져요. 말씀에 순종하려다 보면 아깝고, 손해보는 것 같고, 생각이 많아져서 순종하지 못하는 마음의 밭이예요. (4)그리고 마지막으로 옥토와 같은 마음이예요. 23절이예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내 마음이 옥토와 같은가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어떻게 듣는가를 보면 압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은 감격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깨닫고, 순종합니다. 기도하자! 하면 옥토와 같은 마음은 예! 기도해야지요합니다. 헌데 옥토가 아닌 마음은 또 기도 얘기하네! 누가 기도해야 하는 거 모르나. 너무 바빠서 그렇지... 기도할 시간이 없는데... 이러면 돌짝밭입니다. 사랑하자! 해도 열심을 내자!해도, 도무지 반응하지 않는다면 돌짝밭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순종하려는 마음이 앞서십니까? 그래서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자신을 보며 죄송한 마음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옥토입니다. 헌데 오히려 저항하는 마음이 먼저 생기고, 판단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옥토는 아닙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이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옥토와 같은 마음일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감사와 감격으로 예배하던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밤을 새워 기도하던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기도하는 것이 좋고, 찬송하는 것이 좋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좋았을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고난 중에도 기뻐하신적이 있지 않습니까? 원수도 용서가 된 적이 있지 않습니까? 헌데 지금 그 마음을 잃어버렸다면 다시 회복하셔야 합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이 되셔야 합니다. 2.그러면 어떻게 옥토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할 때 오해가 있었습니다. ⓵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준비해서 30배, 60배, 100배의 복을 받자는 식이었습니다. 헌데 생각해 보세요. 밭은 스스로 좋은 밭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와서 씨를 뿌리려고 하는데, 밭이 준비가 안 되었어요. 그러면 밭에게 지금은 씨를 받을 준비가 안 되었으니 옥토와 같은 밭이 되거든 그 때 와서 다시 씨를 뿌려 줄께! 좋은 밭이 되도록 준비하거라! 이러는 농부는 없습니다. 밭 스스로 좋은 땅이 될 수 없습니다. 누가 해 주어야 합니까? 농부가 해 주어야 합니다. 원래 우리들의 마음 밭은 길가와 같았습니다. 돌짝 밭과 같습니다. 가시떨기가 가득한 밭이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원래 우리 인간이 어떤 상태였는가?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감사하지 않습니다. 늘 원망과 불평이 가득합니다. 생각과 마음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갑니다. 부정적이 됩니다. 28절 이하에서서는 “또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우리들의 원래 마음 밭이 이러했습니다. 헌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밭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이것이 원래 우리 마음 밭이었습니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하나님이 해 주신 것입니다. 농부되신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옥토가 되게 해 주시니 우리는 아무 할 일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옥토와 같은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옥토가 되는 길? ⓵겨울 내내 묵혀 있던 땅을 갈아 엎듯이 회개하셔야 합니다. 깊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구해야 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두드려야 합니다. ⓶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갈아 놓은 땅에 단비를 주시듯이 농부 되시는 하나님께서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다윗처럼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밀려오면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이 됩니다. 3.그러면 셋째로 옥토가 되어 우리들이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큰 무리들이 예수를 따르며 구한 열매는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보상입니다. 육신의 배부름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복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복을 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는 일 잘되고, 물질의 복 받고, 세상적으로 30배, 60배, 100배로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달콤한 말씀입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하시겠다는 것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감격의 상태, 감사의 상태, 죄사함 받은 기쁨의 상태, 고난 중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상태, 인내의 상태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화)최근에 일류대를 나오고, IT업계 상무까지 지내던 사람이 실직하게 되었습니다. 실직한 것을 가족들에게 이야기 하지 못하고 3년이나 숨겼습니다. 이 사람은 강남에 10억이 되는 집이 있었습니다. 은행에서 가족들 몰래 5억을 대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이자를 내고, 매달 400만원 씩 집에 월급으로 갖다 주면서 실직한 것을 삼년이나 숨겼습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던 이 사람이 선택한 길이 무엇입니까? 다 죽자!는 것입니다. 먼저 아내와 가족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죽으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죽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될 당시 그 사람의 수중에는 1억 3천만원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집도 처분하면 5억에서 6억은 되었습니다. 부인 명의로 된 통장에는 3억 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10억원의 돈이 있었는데도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보세요. 진정한 복이 물질이 30배, 60배, 100배로 많아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주시고 싶어 하시는 복은 주님을 갖은 자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씨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자!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자가 복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복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 따라가는 것이 복입니다. 주님으로 인해서 기쁘고, 감사하고, 져주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과 같이 사랑은 내 주시는 것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Long Suffering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긴 고통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웃는 자입니다. 예수를 믿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견딜 수 있고, 자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서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 100배 나아진 것이 복이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더 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받아야 할 복은 구원의 감격이 100배가 되고, 기쁨이, 감사가, 사랑이, 믿음이, 소망이, 미소가, 찬송이 30배, 60배, 100배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신 자로서 옥토와 같은 마음이 되셔서 이런 열매 많이 맺는 거룩한 종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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