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두라! | 이병수목사 | 2015-03-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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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5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마태복음 13:24-30 제목:가만 두라! (서론)만남이 다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아픔을 주는 만남도 있습니다. 나를 정말 힘들게 하는 사람! 미운 사람도 있습니다. 저에게도 가시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너무 힘들 때는 나쁜 마음도 품었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심을 나타내 주십시오. 하나님 가만히 계시지 마시고 심판을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십시요” 예전에 어르신들은 ‘저 산의 호랑이는 뭐 먹고 사나!’했습니다. 무슨 말이예요? 저런 사람 안 잡아 먹고 뭐 하나?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악인이 형통하도록 내버려 두시나? 왜 의인들이 고난 받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계시나? 단번에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면 안되나? 합니다. 헌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29절을 보겠습니다.“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선과 악, 의인과 악인의 기준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들을 멸하실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의롭고 많이 배우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은 악인인 것입니다. 가라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약점이 많고 부족함이 많다 해도 주님을 의지하는 자라면 그는 의인입니다.
오늘 말씀은 가라지 비유입니다. (본문설명)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씨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헌데 원수가 밤에 몰래 와서 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가라지는 원수의 아들들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는 천국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헌데 마귀가 가라지를 뿌려 놓았습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살게 하십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 보니 가라지도 보였습니다.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헌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습니까? 주인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다시 묻습니다. “지금 가서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 주인은 “가만 두라 가라지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가라지는 독보리입니다. 보리나 밀과 아주 비슷한 모양입니다. 가라지는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현기증이나 설사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싹이 날 때는 전혀 구분이 안 됩니다. 이삭이 피어날 때가 되야 알게 됩니다. 헌데 이 때는 가라지의 뿌리가 알곡 뿌리와 뒤엉켜 있어서 제거할 수 없습니다. 가라지를 제거한다고 뽑으면 틀림없이 알곡들도 함께 뽑혀 나옵니다.) 지금은 그냥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가라지는 먼저 뽑아 불사르게 하고, 알곡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리라”(가라지는 추수 때가 되면 알곡과 구분이 됩니다. 열매는 없고 알곡보다 키가 더 커서 쉽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가라지를 가만 두라고 하십니까? 왜 알곡과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하십니까? 가라지 같은 사람들 때문에 너무 힘든데... 너무 아픈데... 왜 주님은 가라지를 가만 두라고 하십니까? 가라지 같은 사람들 때문에 알곡들이 고난 받고, 상처 받고, 피해를 보는데 왜 당장 심판하지 않으십니까? 1.첫째로 알곡을 염려하시기 때문입니다. 29절에서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주님의 관심은 오직 알곡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이 다칠까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뽑아 버리는데 왜 알곡이 다칠까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관계를 맺고 살기 때문입니다. (1)이 땅에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도 알곡이 많지만 가라지도 있습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자녀들만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무리에 가룟 유다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룟 유다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주님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라지를 대해야 합니다. 가라지와 같은 자를 대할 때 진리의 말씀으로 엄격해야 하지만, 사랑과 긍휼의 마음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누구를 대할 때든지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대해 주십시오. (2)내 가족들 중에도 가라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에게 형들이 가라지였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노예로 그를 팔았습니다. 헌데 나중에 요셉이 형들에게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들이 나를 애굽에 판 것으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 날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애굽으로 오지 못했습니다. 형들이 한 행동이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가라지와 같은 형들의 행동을 통해서도 일하셨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원하는 대로 가라지 같은 형들에게 복수했다면 요셉 마음은 좋았을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요? 용서했기에 형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알곡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라지를 미워만 하지 마시고, 그 가라지로 인해서 더 성숙해 지시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다 필요해서 가라지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단련하시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유 없이 가라지를 허락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3)내 안에도 가라지가 있습니다. 내 마음 밭에도 어느 순간 악한 자가 가라지를 심어 놓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내 안에도 가라지가 있어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즉시 가라지를 심판하시면 나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늘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라지가 많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알곡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알곡 안에는 예수의 생명이 있어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알곡인 그리스도인은 어둠속에서 빛을 추수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기쁨을 추수해 내야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알곡은 소망을 추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미움 속에서도 알곡이기에 용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밀알 신앙을 갖으셔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별 것 아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알곡이라면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가라지를 제거하지 안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달아 알기 원합니다. 그들로 인해서 더 성숙해 지시고, 열매를 맺는 거룩한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둘째로 가라지를 그대로 두시는 것은 가라지도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학적으로는 가라지가 알곡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바뀔 수 있습니다. 가라지 같은 사람도 알곡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라면 가능합니다. 그래서 기다려 봐야 합니다. 절대로 속단할 수 없습니다. (예화)바클레이는 주님 안에서 누구든지 변화될 수 있기에 지금 당장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 기억해야 합니다. 가라지 였던 사람이 알곡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알곡이었던 사람이 가라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가 봐야 압니다. 당장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2장 1-1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판단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죄는 믿는 자들이 빠지기 쉬운 죄입니다.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 중에 짓는 죄가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죄입니다. 허랑방탕하며 사는 불신자와 은근히 마음에 판단하고 정죄하는 신자 중에 누가 더 죄인입니까? 대부분 죄 짓고 방탕하는 사람이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남을 은근히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의 죄도 똑같이 나쁘다고 하십니다. (예화)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새벽기도에 오래도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크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말투에는 작고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넘쳐납니다. 성도수가 제법 되는 교회 목사님들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무게가 엄청난 압박으로 성도들을 짓누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나는 이렇게 하는데 당신은 왜 그래! 판단하는 죄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건생활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남을 판단하는 죄였습니다. 나는 의로운데 너는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 땅에 어떤 사람도 남을 판단할 만큼 의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하였다고 하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인을 바라보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간음하는 것과 똑같이 마음과 생각으로 행한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아닌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가 죄인인데 마음과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은 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가만 두라고 하십니다. 알곡과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가라지 처럼 나쁘지만 나중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가라지가 알곡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우리들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나중엔 나빠질 수 있습니다. 알곡이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생명을 결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긴 고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전 여러분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스럽고 판단이 되는 것을 인간적으로는 얼마든지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정말 밉습니다. 너무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날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을 생각하지 마시고, 눈을 들어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참아 주셨습니까? 사실 주님이 단번에 심판하셨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살리시려고 죽기까지 사랑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에게 고통을 주고, 주님을 찌르고, 주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을 생각해서 우리들도 기다려주고, 참아주면 안되겠습니까? 미움에 사로잡혀 어느 순간 내가 가라지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내 마음이 어느 순간 돌짝 밭이 되지 않도록 주님의 마음을 품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적용)용서는 정말 힘든 일이지만, 용서만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용서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신 것처럼 나도 그를 사랑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주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십시다. (예화)빅토르 위고가 왜 레미제라블을 썼습니까? 프랑스가 폭동이 일어나고, 피의 혁명을 행할 때 진정한 혁명은 용서와 사랑임을 말하고 싶어 레미제라블을 쓴 것입니다. 장발장이 변화된 것은 용서와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백성이란? 힘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사는 자들임을 보여 준 것입니다. 3.셋째로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 30절이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추수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게 되면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가 연결됩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그리 했습니까? /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알곡과 가라지를 반드시 구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알곡인 자들에게 하나님은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이 오른편에 서는 거룩한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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