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교회를 사랑해야 하나? | 이병수목사 | 2015-04-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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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2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마태복음 13:47-50 제목:교회를 왜 사랑해야 하나? 오늘 본문은 천국에 대한 마지막 비유의 말씀입니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잡는 그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바다는 - 이 세상입니다. 그물은 - 전통적으로 교회를 말합니다. 고기들은 -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구원하는 곳입니다. 당시 사용하던 그물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투망입니다. 큰 우산 모양의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는 방식입니다. 또 하나는 예인망 그물입니다. 두 배가 그물 양쪽 끝을 서로 묶고 바다를 쓸면서 물고기를 몰아서 잡는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그물은 후자입니다. 그물로 고기를 몰아서 잡는 것입니다. 바닷 속을 쓸어 담기 때문에 그물 안에는 좋은 고기만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물고기 작은 물고기, 어패류 등 종류를 망라해서 다 잡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이 지상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좋은 사람들만 있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도 있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교회는 불완전하고 연약합니다. (예화)어느 날 한 젊은이가 스펄전 목사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고민을 꺼내며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 생활하는게 힘이 듭니다. 늘 시험을 받습니다. 목사님은 많은 교회를 다니시니 좋은 교회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말씀도 좋고, 찬양도 좋은 교회, 서로 사랑하는 교회, 따뜻하고 편안한 교회를 알려 주십시오.” 이 때 스펄전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젊은이에게 말했습니다. “그런 교회는 없네. 혹시 자네가 그런 교회를 찾으면 나에게 꼭 알려주게. 나도 그 교회 교인이 되고 싶네.” 그리고 한 마디 덧 붙였습니다. “그러나 자네는 그런 교회를 찾거든 절대로 그 교회에 등록하지 말게” “왜요?” / “왜냐하면 자네가 출석하는 그 날부터 그 교회는 문제가 있는 교회가 될테니까” 지상에 완전한 교회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교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세상보다 더 저질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추태는 더 악취가 납니다. 포장된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은 쉬운데,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교회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상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알아야 합니다. 지상교회는 죄 많고, 허물 많고 아픈 사람들이 모여서 용서받고, 고침 받고, 거듭나는 종합병원과 같은 곳입니다. 상처 주고 상처 받은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 씨름하면서 해법을 찾아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 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산고 끝에 명품으로 만들어져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천상의 교회는 영원하고 완전합니다. 그러나 지상 교회는 한시적이고 불완전합니다. 지상교회는 크든 작든 다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지상의 가정과 같습니다. 완전한 가정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도 가족이니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뭐예요? 기쁨만 있는 것이 행복입니까? 아닙니다. 행복은 삶입니다.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는 아파하고 괴로워 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웃을 수 있는 것이 행복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울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사랑하기에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걱정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교회에 실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상 교회는 원래 불완전한 곳입니다. 지상교회에서는 시험들 일이 많이 있습니다. 힘든 일도 많습니다.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첫째는 예수님이 세우신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교회는 한 신앙고백을 갖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우리들이 분명하게 고백해야 할 신앙의 내용은 사도신경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난 뒤에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카톨릭에서는 “베드로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말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초대 교황으로 삼고 그 뒤를 잇는 교황의 권위를 높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불완전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실 때 베드로는 ‘페트로스’이고, 반석은 ‘페트라스’입니다. ‘페트로스’는 굴러 다니는 작은 돌맹이이고, 반석이라는 ‘페트라스’는 크고 단단한 바위를 말합니다. 주님은 분명한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이지, 베드로라는 사람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베드로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님이 친히 세우신 것입니다. (2)둘째는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정의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는 만민이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3)셋째로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정의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교회는 머리되시는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주님의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4)넷째로 교회는 복의 통로입니다. 우리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누구를 위해서 내가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잘 섬기면 여러분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목사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충성하기 보다 내 자신이 복을 받기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 새벽기도를 하는 것, 헌금을 하는 것,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 심방대원으로 참석하는 것, 봉사하는 것이 복 받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것이 감사해서,,, 주님이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수고하는 내가 복을 받습니다. 결국 충성하면 여러분에게 이익입니다. 충성하는 성도들을 보면 늘 미안한 마음을 갖은 것입니다. 안쓰러운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힘들텐데...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십일조를 가르치는 것도 그래요. 목사로서 가르쳐야만 하는 부담이 있어요. 시험드는 것은 아닐까 염려도 되요. 돈 이야기 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요. 그런데 성도들을 정말 사랑하는 길이 뭘까?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는다는 것을 내가 정말 믿는다면 가르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성도들을 정말 사랑하면 기도하게 해야 하고, 예배드리게 해야 합니다. 헌신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고,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직분자 되시는 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새벽기도를 꼭 드리십시오. 특히 항존직분자들은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십시오. 금요성령집회시간에는 에스더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헌데 에스더 4장의 말씀을 보면 모르드개가 딸 같은 사촌 여동생 에스더에게 절망적인 자기 민족을 위해 왕 앞에 직접 나아가 간청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헌데 처음에는 에스더가 부탁을 거절합니다. 자기 입장에서는 불가능하기에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자 모르드개가 딸처럼 키웠던 에스더를 엄하게 꾸지람을 합니다. 에스더 4장 13-14절입니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모르드개가 꾸지람한 핵심이 뭐예요? “왕후인 네가 안 나서면 우린 다 죽는다. 제발 우리 좀 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네가 안나서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네가 비겁하게 이 일에 나서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께 쓰임받을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면 결국 망하고 마는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깨달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네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⓵첫째는 확신 있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사정하지 않습니다. 상처 받을까봐 염려하지 않습니다. 확신있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 줍니다. 그것이 에스더가 복을 받는 길이기에 확신있게 말을 해 줍니다. 에스더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서 해 주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상처 받지 않습니다. ⓶둘째는 써 주시는 것이 복이구나! 지금 헌신하는 일에 대해서 감사하기 바랍니다. 나는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 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믿는 이렇게 써 주시는구나! 쓰임 받는 것이 복이지... (예화)일주일에 9번 설교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이라도 많이 참석하면 힘이 날텐데... 그래도 기쁘게 합니다. 힘들때마다 스스로 위로를 하는 말은 “써 주실 때 감사해!”하는 것입니다. 무임으로 있을 때에 오직 소원은 하나였습니다. 설교할 수 있는 강단만 있다면... 기도할 수 있는 제단만 있다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강단이요 제단이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요. ⓷셋째로 하나님은 거지가 아닙니다. 모르드개는 부탁하지 않습니다. 사정하지 않습니다. 명령합니다. 확신있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때로는 예배에 오십시오. 기도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심방을 함께 갑시다. 저도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함께 하지 않을 때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헌데 어느 날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내가 거지냐! 왜 사정하니? 왜 부탁하고 다니니! 충성하고 순종하면 자기들이 복을 받는 일인데... 여러분이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충성하고 누릴 복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못하겠다고 하는 에스더에게 “네가 만일 잠잠하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들어서 반드시 구원해 내실 것이다. 너는 복을 받을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십시오. 주님에게 헌신하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이 거지입니까? 하나님은 인색함으로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주님을 거지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쁘게 순종하면 결국 내가 잘되는 것입니다. ⓸또 하나의 깨달음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을 왜 미래교회를 불러 주셨을까요? 이 때를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기도할 때를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전도할 때를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힘을 보태야 할 때를 위하여 저와 여러분을 불러 세우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지 마세요. 충성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용서할 때가 있습니다. 전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을 만나게 하신 것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 중에 하나는 복의 통로로 삼기 위함입니다. (5)다섯번째로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는 ‘남은 자’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믿는 자들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였습니다. 이제는 바벨론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70년간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가고, 흔들리고, 거룩한 삶에는 무관심한 시대를 바라보며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 주변에 스랍 천사들이 여섯 날개를 갖고 두 날개로 눈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날면서 찬송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좌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누가 가서 죄악가운데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의 말을 전할까? 그 때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자원합니다. 결단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전할 말을 주십니다. 이사야 6장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 까지니라” 70년 간 이 땅은 주인 없는 땅이 되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멀리 끌려갈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허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절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밤나무가 잘리고, 상수리 나무가 잘리는 것처럼 고난을 당하겠지만, 그러나 내가 그루터기는 남겨 놓을 것이다. 거룩한 씨를 남겨 놓아서 그들을 통해서 다시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소수, 거룩한 씨를 남겨 놓으셔서 불씨로 삼으셨습니다. 이들은 믿음이 있는 자들이요. 기도하는 자들이요. 꿈을 꾸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미래교회도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남은 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그루터기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바벨론 포로기와 같은 어려운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1990년대부터 한국교회는 정체기에 접어 들었습니다. 2000년대에는 정체기에서 침체기가 되고, 지금은 쇠퇴기로 돌아섰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와 만여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습니다. 앞으로 더 혹독한 겨울을 보낼 것입니다. 교회가 위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기회임에도 틀림없습니다. 비로 지금 거룩한 씨앗을 찾고 계십니다. 아무리 시대가 막막하고, 현실이 어려워도 하나님을 믿고, 소망의 끈을 놓치 않을 남은 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 미래교회에도 믿음 있는 자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7장 11절의 말씀대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선지 엘리야가 먼저 와서 이 땅을 회복케 하리라”는 말씀을 믿고, 거룩한 자로 바로 서 있는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다 좋은 고기가 아닌 것처럼 바로 지금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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