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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위로가 되는 이유 이병수목사 20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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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9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마태복음 14:1-12

제목:세례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위로가 되는 이유

고통총량 불변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궐 같은 곳에 살든, 지하 단칸방에 살든 삶의 내용이 다르고 질이 달라서 그렇지 느끼는 인생의 무게를 달아보면 누구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힘든 사람과 힘들지 않은 사람, 고통이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누구나 사는 것이 힘듭니다. 누구나 고통은 있습니다. 나만 힘들다고 소리치는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목회만 힘듭니까? 직장생활은 힘들지 않던가요? 공부하는 학생은 힘들지 않을까요? 사업하는 분이나 가족들을 뒷바라지 하는 것은 힘들지 않던가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인생은 똑같이 힘듭니다.

어짜피 힘든 것이 인생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힘드니 주저 앉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힘들수록 일어나야 합니다. 힘들다고 도망가지 말아야 합니다. 힘들수록 덤벼들어야 합니다. 운동선수들 보세요. 힘들다고 누워 쉽니까? 아닙니다. 무거운 모래 주머니 차고 달립니다. 산에 오릅니다. 짐을 더 지고 달리다 보면, 힘이 생겨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힘들다고 위로 받으려고만 하면 안됩니다. 교회는 쉼도 필요하고 치유도 필요합니다. 교회는 종합병원과 같습니다. 죄 많고, 허물 많고, 아픈 사람들이 모여서 용서받고, 치유 받고, 살아나는 종합병원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종합병원만 같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군사 훈련소와 같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었으면 재활을 받아야 합니다. 재활이 끝나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훈련받는 것이 힘들지만, 훈련을 받다보면 더 강해져서 웬만한 시험은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은 권력자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헤롯왕은 세례 요한을 미워했습니다. 이유는 헤롯이 제수씨인 헤로디아오 결혼한 것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선지자로 알아 죽일 수 없었습니다. 헤롯의 생일날 자신의 제수씨이면서 부인인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주어 왕의 기분을 좋게 했습니다. 왕은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세례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세례요한은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치고는 너무나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합니다. 이 때 세례요한의 나이는 33세입니다.

어떠세요? 세례요한처럼 살라면 사시겠습니까? 세례요한의 인생이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이라면 선뜻 가실 수 있습니까? (예화)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욥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헌데 한 성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고난 받고 난 후에 갑절의 복을 주셨다고 하지만, 안 주셔도 좋으니 고난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분만의 마음이겠습니까?

 

헌데 성경은 왜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어떻게 설교하나? 세례요한처럼 삽시다! 한다고 설득이 될까? 예수를 믿는 것이 세례요한처럼 사는 것이라고 하면 몇 분이나 따라 나설까요?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짜 신앙이라면 세례 요한의 죽음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세례 요한의 삶과 죽음이 신앙생활이 이런 것이라면 난 못 믿어! 난 못해! 절망하라고 주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살다 죽는 것도 가치 있고, 멋진 일이야!라고 위로하시기 위해서 주신 말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이유는 뭘까요?

1.첫째로 누구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가?입니다.

사람들이 갖는 욕구 중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명예에 대한 욕구이기도 합니다. 칭찬에 목말라 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당연한 것입니다. 허나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은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직장인들은 상사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합니다.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자녀들에게 인정받는 것만큼 큰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속여도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지 않습니까? 자신은 압니다.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내 사랑하는 주님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뭐예요? 주님께 인정받고, 주님께 기쁨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예화)저는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성도들이 자랑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또한 저의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인정받기 전에, 가족들에게 인정받기 전에 정말 인정 받고 싶은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세례요한을 생각해 보세요. 가족들이 세례요한을 다 이해했을까요?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다 이해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왜 저렇게 하나?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례요한이 정말 인정받고 싶은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후에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가리켜 뭐라고 하십니까? “여인에게서 난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인생이 목적인 사람은 세례요한처럼 사는 것이 실패한 삶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세례요한의 길을 가고 싶어 할 것입니다.

(1)마태복음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5-6절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도의 두 가지 자세가 나옵니다. 기도하는 모습은 똑 같습니다. 헌데 한 종류의 사람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합니다. 다른 한 종류의 사람들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께”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도 자칫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와 저분은 기도 생활 참 많이 하시는 분이야! 기도 참 잘해! 참 열심이야!”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 것 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열심히 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에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을 살피십니다. 중심을 보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18절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주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칭찬해 주시는 사람입니다.”

(2)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이 뭐예요? 사울은 늘 사람들의 평가에 목말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나?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누구를 놓칩니까? 하나님을 놓칩니다. / 헌데 다윗은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평가를 더 두려워 합니다. 사람들에게 조롱 받는 것은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버림 받는 것은 두려워 합니다. 성령이 떠나실까?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합니다. 보세요.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사람을 따랐던 사울은 사람들로부터도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원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다윗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주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살면 결국 사람들도 알아 줄 것입니다. 안 알아주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갈 사람인데요? 그분이 인정해 주시면 됩니다. 사람들은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에게 인정받는 삶을 위해서 세례요한의 길을 가는 용기와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2.둘째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내려진 가장 확실한 심판이 뭐예요? 히브리서 9장 27절이예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뭘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안 죽는 사람 있던가요? 다 죽습니다. 어찌피 죽는 것이라면 잘 죽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짜피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면 의롭게 살다가 죽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례 요한과 헤롯 왕을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이 전부라면 당연히 헤롯왕의 삶이 잘 사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는다면 헤롯처럼 살면 안됩니다. 헤롯은 성공한 듯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세레요한은 실패한 것 같지만, 성공했습니다. 헤롯은 이 세상에서 왕처럼 살았지만, 지옥행이었습니다. 요한은 힘들게 살았지만, 그는 천국행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선과 악, 의와 죄를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헌데 우리들은 사랑의 하나님만을 강조합니다. 용서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만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천박한 신앙이 되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한다. 교인들은 하나님을 은근히 무시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해도 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예화)늘 다투는 당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회를 했다하면 막말을 하고, 서로의 감정을 건들고, 큰 소리가 나오고, 다툼이 끊이지 않는 당회였다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싶을만큼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헌데 한 순간에 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당회를 녹화 했습니다. 녹화한다고 생각하니 함부로 말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코람데오 신앙이 뭐예요? 카메라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카메라 앞에서도 조심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 ①말을 할 때도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습니다. 거짓말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②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내 행동이 모두 녹화가 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고 아무리 이익이 되는 일이라도 부끄러운 일이라면 쳐다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손해를 봐도 아파도 억울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우리는 견딜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그렇게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억울해서 불행한 분들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처럼 억울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헌데 세례요한이 억울해 하면서 죽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요한은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기에 미워할 것도 없습니다. 용서 못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니까 억울해 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기에 세례요한의 삶도 멋진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하나님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입니다.

 

3.셋째로 성공이냐? 사명이냐?의 문제입니다.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사람이 볼 때 세례 요한은 실패자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사람에게는 세례요한은 승리자입니다.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세례요한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명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그는 성공자입니다.

(1)역사가 평가할 때 정말 잘 산 인생은 무엇입니까? 성공한 사람을 높이 평가합니까? 그 성공으로 자기 잇속을 챙기고 자신만을 위해 산 사람을 높이 평가합니까? 자신의 성공을 깔고 앉아서 먹고 즐긴 사람을 존경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을 갖고 자기 잇속을 챙긴 사람들을 보세요. 다 심판을 받습니다. 역사는 그런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 역사는 사명을 다한 사람을 높이 평가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사명을 다한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를 남겼느냐?가 아닙니다. 사명에 충성했느냐?를 보십니다.

(예화)공부하는 학생이라면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공부해야지요. 큰 교회 직분은 소중하고, 작은 교회 직분은 소홀히 여긴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사명이 전도의 사명입니다. 있는 자리에서 선한 일을 행함으로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2)정말 행복한 것이 뭘까요? 성공하면 잠시는 기쁠 수 있습니다. 내 집을 마련하는 일, 상여금을 받는 일, 승진하는 일,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일, 나름대로 성공입니다. 허나 그 행복이 얼마나 갑니까? 잠간이지요. 정말 행복한 것은 사명을 감당할 때 얻는 것입니다. 성공해서 누리는 기쁨도 있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서 내가 기꺼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희생해서 내가 수고해서 다른 사람들이 기쁠 수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공을 넘어 사명으로 가야 합니다. 편안함을 넘어 불편함으로 가야 합니다. 알콩 달콩 사랑받으면서 맛보는 신앙생활도 귀하지만, 섬기는 부담을 떠 안는 것이 높은 신앙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면, 성공만을 위해서 살지 말고, 사명을 위해서 사는 거룩한 종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 세사이 전부가 아니라면,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음을 믿는다면, 세례요한처럼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이 얼마든지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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