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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병수목사 201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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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5일 주일 낮 예배 설교(맥추감사주일)

성경:마태복음 16:21-24

제목: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헌데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면 두 종류입니다.

(1)16절의 고백을 갖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이 고백을 믿고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것으로 힘을 삼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힘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만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요 부활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2)또 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22절의 태도를 갖고 주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배경설명)주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말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야단을 쳤다. 그런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마시라고...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여전히 베드로는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큰 소리 치길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려는 길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종의 길, 죽음의 길, 용서의 길, 사랑의 길을 가기보다는 성공하고, 힘을 갖고, 큰 소리를 치고 싶은 것입니다.

(3)놀라운 것은 이 고백이 한 사람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16절의 고백을 갖고 있으면서도 22절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믿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을 돌아보니 내 욕심대로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주를 위한다고 열심히 충성하는데 실상은 자기 만족, 자기 명예, 자기 뜻을 위해서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22절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헛된 허영심을 내려놓고, 겸손히 16절의 고백을 갖고 24절을 살아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려면 반드시 두 가지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른다는 말은 자주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의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1.먼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 말의 뜻을 알려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왜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24절에서 “이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라는 말은 앞을 받는 말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고 난 후부터 예수님은 솔직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고, 결국은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헌데 제자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대든 것입니다. ‘그런 말씀하지도 마시라고,,,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되고, 있지도 않을 거라고... 우리들이 어떻게든 주님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예수님에게 대들면서 따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불같이 화를 내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뒤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말은 나를 따라오려면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품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끊임없이 내 생각을 합니다. 헌데 내 생각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칠 때가 많아요. 지금 베드로도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왜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지?는 생각하지를 않아요.

 

(예1)아무리 우리가 주님을 위한다고 열심히 해도 내 생각대로 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에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뽑힌 사울 왕에게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십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가축도 모든 아말렉 족속도 다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헌데 사울은 그 중에 좋은 가축들은 남겨서 가져 옵니다.

마중을 나간 사무엘에게 사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보세요. 사울은 자신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내 생각에 좋은 가축들은 죽이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사무엘이 뭐라고 합니까?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울의 명분은 그럴 듯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보다 이전에 순종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헌데 사울은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자기 생각을 첨가합니다. 사울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왕위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내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나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화)지난 주간에 신학대학원 친구를 오랜 만에 만났습니다. 한국에 유학이나 일하기 위해서 온 몽골인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3년 전에 사역지를 놓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존 교회에 부임하기로 거의 이야기가 되고 있었습니다. 헌데 그 때 한 목사님으로부터 한국에 온 몽골인 젊은이들을 섬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습니다. 현재 몽골청년들은 4명이고, 사례비도 없습니다. 자비량선교를 해야 합니다. 건물도 없습니다. 한국교회 건물을 빌려서 목회를 해야 합니다. 자신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선교비를 대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한 곳은 사택을 주고, 사례비도 보장되고, 기존 교인들을 제법 있는 교회입니다. 다른 한 곳은 아무 것도 없는 불모지입니다. 당연히 사람의 생각은 기존 교회로 가는 것이지요. 헌데 주님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지요? 한 달은 씨름했다고 합니다. 결국은 자기 생각을 꺽고 주님의 생각을 따라서 몽골인들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습닌다. 지금도 주 5일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친구지만 멋있어요.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실 때, 내 생각, 내가 좋은 것, 내게 이익이 되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의 생각, 주님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2.둘째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주님이 베드로에게 너무 심하다 싶을 만큼 화를 내시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이 사탄의 전략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1)예수님이 받으신 시험 두 번째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그리하면 천사들이 너를 받아 줄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이 가장 놀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명이 있는데 죽으시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라. 만약에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이 뛰어내렸습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받아 줄 것입니다.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으면 일약 스타가 되는 것입니다. 유명해 질 것입니다. 수퍼스타가 되는 것이다. 신기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명 스타가 되면 십자가는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을까? 베드로가 미워서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지지 않고, 영광만을 누리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기에 안타까워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신 차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는 지지 않고 영광만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사탄의 유혹입니다.

(예화)한국교회를 생각해 보라.

60, 70, 80년대 초반까지는 교회를 섬기려면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습니다. 목사가 되려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신학교는 항상 미달이었습니다. 고생길이 훤하기에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장로로 선출되면 도망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목사요 장로가 되면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누구를 존경하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예화)왜 어머니는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흘러도 늘 고귀한가? 십자가를 지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어령 교수님의 글 가운데 “입덧의 의미”라는 글이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임신을 하자 마자 입덧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입덧으로 인해서 음식 냄새도 제대로 맡지 못하고, 완전히 중병환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뜩이나 갑상선 이상으로 마른 체형인데 간디처럼 말랐다고 합니다. 입덧으로 인해서 부부간에 평화가 다 깨졌습니다. 얼마나 신경이 예민해 지는지 이것 먹고 싶다 저것 먹고 싶다해서 음식을 구해 주면 쳐다보기도 싫다며 치우라고 합니다. 점점 남편도 지쳐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라고 하셨으면서 자녀는 낳는 것은 축복인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왜 구역질의 괴로움을 주십니까?’

그 뒤로 입덧을 왜 하는가? 아무 필요도 없는 입덧을 왜 해야 하는가?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헌데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십년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입덧은 인간의 지혜나 이성으로는 풀수 없는 신비한 생명의 암호라고... 입덧은 어머니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켜주려는 것이라는 것을...” 배가 불러 오기 전에 입덧을 하지 않으면 누가 임신한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주위 사람들이 누가 임신한 것을 알아줄까요? 임산부가 구역질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그 순간부터 대우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귀하신 몸이 되어 시어머니 앞에서도 누울 수 있고, 남들 일할 때 당당히 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구역질이야말로 아름다운 음악소리보다 성스럽고 장엄한 것이며, 생명을 잉태하므로 마땅히 져야 하는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입덧과 산고를 겪기에 어머니는 고귀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헌데 지금은 어떤가?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 큰 교회를 선호합니까? 혹시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아서는 아닐까요? 부담 갖고 싶지 않은 마음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부담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부담 없이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헌데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받는 영광은 가짜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삶의 확실한 기준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쪽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각자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3.네가 복있는 자라고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이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우리들도 이처럼 갈팡질팡 할 때가 있습니다. 업,다운이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3단계를 통과해야 합니다.

(1)첫단계는 마태복음 16장의 베드로처럼 왔다 갔다 하는 상태입니다.

(2)여기에서 요한복음 21장으로 가야 합니니다. 주님은 물으십니다. 네 마음안에 겨자씨 만한 사랑이 있느냐? 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로 가야 합니다.

(3)삼단계 사도행전 2장으로 가야 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임하셔야 우리들이 능력있는 삶을 삽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따라가는 삶을 삽니다.

지금 마태복음 16장에 와 있습니까? 요한복음 21장으로 가십시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진심으로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사모하며 구하면 만나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합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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