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보인다 | 이병수목사 | 2016-01-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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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4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마태복음 22:15-22 제목: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보인다 (예화)한 남학생이 미팅을 갔습니다. 소개팅이라고도 하지요. 해 보셨어요? 아주 예쁜 여학생이 나왔습니다. 남자는 떨려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그 때 여학생이 말했습니다. 제가 질문하나 해도 될까요? “남자에게는 있고 여자에게는 없는 것은 뭘까요? 책상에는 있고 의자에는 없는 것은요?” 뭐지요? (그럼 다른 힌트? 조인!에게는 있고, 조하나에게는 없는 것은?”) 네! (글자)받침입니다. 이 문제 하나에 얼었던 분위기가 풀렸습니다. 그래서 서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하지요? 헌데 대화 방법 중에 하나는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지요. 헌데 질문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에는 대략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정말 몰라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거예요’ ②자기를 과시하려고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거 알아!’하면서 자신은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질문입니다. ③떠 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꼬투리를 잡으로 하는 질문입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 정말 궁금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 시험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1.오늘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오늘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15절을 보세요.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빠지게 할까 상의하고” 예수님의 생각이 정말 궁금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곤란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참 사람들이 꼬였지요.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17절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이 질문이 왜 곤란한 질문인가? 당시는 로마 황제의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당연히 로마 황제는 세금을 거둬 들여겠지요? 헌데 로마에 세금을 내는 문제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두 패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인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는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 세금을 내는 것은 로마 황제를 왕으로 섬기는 것과 같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또 한편에 현실주의자들인 헤롯당원들은 ‘내야 한다. 로마에게 미움을 받기보다 좋은 관계를 가져야 된다’는 사람들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야 한다고 하면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고, 내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로마당국에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 질문을 하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을 보면 마음이 참으로 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화)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놓고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는 여인을 잡아 왔습니다. 잡아오려면 남자도 잡아와야 하지 않습니까? 헌데 약한 여인만 잡아 왔습니다. 세상이 이렇지 않습니까? 결국은 아무 힘이 없는 약자들만 당합니다. 현실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이리 저리 법망을 다 빠져 나옵니다. 율법에는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 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치지마라! 하면 율법을 무시하는 자라고 돌을 예수에게 던질 것입니다. 치라!고 하면 당신은 위선자라고 사랑을 외치더니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맹 비난을 퍼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화)기독교를 공격하려는 사람들이 하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선악과를 왜 만들었습니까? 술 담배 피우면 지옥 가나요? 조선시대 사람들은 구원 받나요? 예! 정말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라면 친절하게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말의 올무를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비꼬고, 비난하려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예화)무재칠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자 석가모니를 찾아 갔다고 합니다. 석가모니는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아서 그런거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자기는 빈털털이라서 베풀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때 석가모니는 돈이 없어도 줄 수 있는 7가지가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무재칠시> 첫째는, 화안시(和顔施) 얼굴에 화색을 띠고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울을 보세요. 믿는 성도들은 얼굴표정도 밝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환한 얼굴로 받아들이는 것이 선물입니다. 둘째, 언시(言施) 사랑의 말, 칭찬의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 양보의 말, 부드러운 말을 얼마든지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심시(心施)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따뜻한 마음을 베푸는 것입니다. 넷째, 안시(眼施) 사랑을 담은 눈빛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째려 보지 마세요. 다섯째, 신시(身施) 남의 짐을 들어 주는 것. 일을 도와주는 것처럼 몸으로 베풀수 있습니다. 여섯째, 좌시(座施) 때와 장소에 맞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입니다. 일곱째, 찰시(察施) 찰시란 잘 살피는 것입니다. 즉 굳이 묻지 않고도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려 도와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이 있는 것은 일곱 번째입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질문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굳이 질문을 해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묻지 않는 것이 줄 수 있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질문을 할 때 깊히 생각을 하시면서 해야 합니다. 명절 때 어른들은 생각도 없이 “너 왜 취직 안하니? 언제까지 놀거야!” 놀고 싶어서 노는 젊은이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너 언제 시집가니? 애인 없니?’ 소개시켜주면서 말을 하든지... 툭 던지고 마음의 상처를 줍니다. 결혼을 해서 몇 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는 사람들에게 “애를 안 낳니? 너 나이들기 전에 애 낳아야 하는데” 이것이 질문입니까? 애 낳기 싫어서 안 낳겠습니까? 무슨 사정이 있겠지요? “왜 학교 그만 뒀니? 왜 그러니?” 이런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묻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이 줄 수 있는 선물입니다. 질문에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질문에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질문에도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질문에도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고 넘어가세요. 주님이 곤란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뭐라고 말씀하세요. 18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주님은 악하다고 하십니다. 질문을 할 때에 “내가 질문 받으면 기분 나쁠 말은 남에게도 하지 마십시오.” 역지사지해야 합니다. 질문 하나에도 마음이 보입니다. 제가 받기 가장 싫은 질문은 “목사님! 교회 언제 지으세요? 교인들 많이 늘었지요? 빨리 위임목사 되셔야지요?” 무책임한 질문들을 합니다. 이렇게 묻는 분들 중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헌데 어떤 분들은 아무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식사 한번 하자! 묻지 않아도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질문 하나에도 믿음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요즘 행복하세요? 힘들지는 않으세요? 기도할 제목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진심을 담은 질문을 하는 성도들이 되세요.
2.둘째로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가이사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의 밑 바닥에는 “언제까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당신은 가이사에게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당신이 메시야라고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하면서 언제까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나요?“ 주님은 뭐라고 대답 하십니까? 21절입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씀을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1)가이사가 다스리는 세상에 사는 것을 너무 힘들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이사를 무너지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적용)우리들의 기도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이사로부터 건져 달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가이사 밑에서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거냐”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에 가이사를 무너지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가이사를 제거해 달라는 것입니다. 질병이라는 가이사! 경제적인 힘겨움의 가이사! 실패의 가이사! 아픔의 가이사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허나 주님은 가이사가 다스리는 세상에 사는 것을 힘들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이사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이중 국적을 갖고 삽니다. 육신은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을 갖고 삽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영적으로는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란 가이사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2)우리는 가이사로부터 자유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가이사의 지배 아래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예1)왜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십니까? 애굽에서 보디발 아래에, 바로왕 아래에 있게 하십니까? 처음에는 무슨 뜻이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힘들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깨달았습니다. 애굽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2)왜 남왕국 유다나라를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까? 회개하게 하십니다. 예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찾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3)문제 속에 그냥 두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통 속에 그냥 두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을 증명해 보이라는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1-32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선물로)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은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헌데 우리는 이 사랑을 잘 몰라요. 그래서 다른 것을 달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주시는 분이시니 나머지도 달라는 겄입니다.” 헌데 이것은 너무 염치 없는 일입니다. (예화)만약에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 수련회를 갔습니다. 물에 빠져서 죽어 가는데 친구 하나가 뛰어 들어 내 아이를 살리고 그 아이가 대신 죽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아들을 잃은 아버지에게 갑니다. 가서 한다는 말이 ‘아들이 죽었으니 아들이 쓰던 물건은 더 이상 쓸모 없지 않습니까? 그 물건들은 우리 아이 쓰게 주시지요. 이럴 수 있습니까?’ 이럴 수 없지요. 너무 염치 없는 짓이지요. 헌데 우리가 이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주셨건만 우리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 하나님에게 찾아가서 다른 것도 다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너희들 해도 너무한다. 아들을 주었건만 뭘 더 달라고 하느냐?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로마서 8장 35-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날 위해 환난을 받은들 어떠냐?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을 당한들 어떠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뭐는 못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3)사랑하는 여러분! 가이사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난 가이사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보여주며 살라는 것입니다. (예화)예수님의 공생애 시간에 우리들에게 던진 질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헌데 이 질문을 어디에서 했는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와 디베랴 바닷가입니다. 두 장소는 모두 로마 황제의 이름이 붙은 장소입니다. 황제의 이름을 붙이려면 자격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①거주하는 인구수가 대도시 규모여야 합니다. 도시정비도 황제의 이름을 붙일 만큼 되어야 합니다. ②또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야 합니다. ③제일 중요한 것은 황제숭배를 할 수 있는 거대한 신전이 우뚝 솟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곳에 나가 “가이사 황제가 우리들의 주인이십니다. 가이사 황제의 은혜로 삽니다.”라고 고백을 해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헌데 바로 그 장소에서 제자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로마 황제가 주인이라고 하는 그 장소 한 가운데서, “너희들의 주인은 누구냐? 너희들에게 왕은 누구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나를 믿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돈을 사랑합니다. 자기를 끔찍이 사랑합니다. 이기적입니다.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황제물결이 넘실대는 바로 그곳에서 주님은 물으십니까? 누가 너희 주인이냐? 가이사냐? 하나님이냐? / 가이사냐? 나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만약에 가이사가 주인이라면 가이사에게 네 인생을 바쳐라!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이라면 하나님께 네 인생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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