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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 이병수목사 | 2016-11-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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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6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사도행전 6장 1-7절 제목:주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이라고 다 같은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이해하려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유대인들이 고국 땅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일명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일명 해외파였습니다. 언어는 당시 만국어인 헬라어를 썼습니다. 반면에 혼란한 정국속에서도 고국 땅 이스라엘을 조상대대로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일명 국내파입니다. 언어는 모국어인 히브리어인 아람어를 썼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의 관계가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대부분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인 사도들도 모두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헌데 교회가 부흥하면서 고국으로 돌아와 있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교회에는 다수의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이 모였습니다. 교회는 계속 부흥했습니다. 제자의 수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갈등도 생겼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제외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모든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제외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서 불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교회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결단을 했습니다. 2절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열두 사도들은 먼저 자신들을 돌아 보았습니다. 자신들을 반성하였습니다. 공격을 방어하기에 극급하지 않았습니다.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성숙함이란 무엇일까요? 성숙은 판단의 눈을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하고 친하다고 무조건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하기가 쉽지 않아요. (예화)어제 저녁에 아내가 주일 점심준비를 위해서 집에 있는 갓김치를 교회로 옮기기에 제가 들어준다고 들었습니다. 김치통 위에 갓김치 통을 올리고 들고 가다가 길 위에서 갓김치통이 미끄러지면서 땅에 떨어졌습니다. 갓 김치 통이 깨지면서 갓김치 반이 쏟아졌습니다. 헌데 제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뭔지 아십니까? “미끄러우면 미끄럽다고 조심하라고 이야기를 해 줘야지” 지가 사고치고 아내를 원망합니다. “시장가방에 넣어주면 잘 들고 갈 수 있는데 이게 뭐냐고”합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남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아직 멀었구나! 사도들은 원망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결단을 이야기 합니다. 3-4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성도들이 사도들의 결정에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의 결정에 즐겁게 따라주었습니다. 헌데 놀라운 것은 7집사를 세우는데 7명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7명의 집사들의 이름은 모두 헬라식 이름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을 교회 지도자로 뽑아 준 것입니다. 무엇이 부흥일까요? 서로의 보이지 않는 장벽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 안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다른 것이고,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 사랑한 것입니다. 12명의 사도들과 대다수의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소수의 헬라파 유대인들을 주 안에서 형제 자매로 받아준 것입니다. 좀 더 깊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근본 이유가 뭘까요? 1.주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들도 위함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이 구원하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믿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만난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고 인정해 주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이나 헬라파 유대인들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인 사도들과 성도들은 주님께서 뭘 원하시는가를 깨달았습니다. 자신들보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구제하는 일을 더 잘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글로벌 마인드를 갖고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대인관계가 좁았습니다. 국내에서만 생활했기에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헌데 타국 생활을 오랫 동안 했던 헬라파 유대인들은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인관계의 폭이 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차별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을 즐거이 7집사로 세운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결정하고 헬라파 유대인들을 7집사로 세우자 교회는 더 부흥하게 되엇습니다.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제사장들이라면 정통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헌데 이들이 헬라파 유대인 집사들로 인해서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1)이 부흥과 안정은 헬라파 유대인들을 믿어주고 밀어주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들의 섬김과 희생이 없었다면 큰 부흥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화)국내성지순례로 금산교회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조선말기 남녀부동석이란 유교문화가 가득했을 때 세워진 기억자 교회인 금산교회입니다. 이곳 김제에는 부농 조덕삼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덕삼의 집에는 머슴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이자익이란 젊은 머슴이 있었습니다. 조덕삼은 이자익을 전도해서 자신이 다니는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금산교회에서 장로선거가 있었습니다. 선거 결과 조덕삼이 떨어지고 이자익이 되었습니다. 금산교회 교인들은 큰 일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조덕삼은 교인들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결과에 감사하고, 이자익장로를 잘 섬기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조덕삼은 장로가 됩니다. 조덕삼장로는 이자익의 명철함을 보고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보냅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자 다시 자신이 섬기는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모셔옵니다. 평생을 담임목사로 잘 받듭니다. 조덕삼 장로가 바로 히브리파 유대인들인 교인들과 같습니다. (2)또한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주도권을 갖고 일했지만,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동역입니까? 주님의 마음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품어 준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자익목사는 평생 조덕삼 장로님의 은혜와 사랑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늘 겸손하게 섬겼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은 살다보면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서운함이 밀려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화)하나님의 뜻과 내 뜻 사이에서 갈등이 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민현정 권사의 죽음으로 온 성도들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살려주시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기도해도 소용없네! 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가족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를 다윗에게서 찾았습니다. 사무엘하 12장입니다.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18.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19.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저는 이것이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마음을 끌어 안고, 이해되지 않는 마음을 끌어 안고 주님 앞에 나가서 예배한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인정한 것입니다. 주님의 결정 앞에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2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다윗은 주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2.둘째로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을 집사로 세워준 것은 내게 붙어주신 사람들이라고 믿었기에 사랑한 것입니다. 사랑하기로 한 것입니다. 사랑할 만해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 없지만, 사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끌어 안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화)오늘 주일 아침 교회에 왔습니다. 제 방 책상에 초코렛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 초콜렛 위에는 메모지가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아빠 제 선물이예요. 맛있게 드세요. 먹고 웃으면서 힘내세요” 큰 아이가 놓고 간 것입니다. 저는 메모지의 글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요즘 아빠가 권사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구나! 여러 가지 교회 일로 아빠가 힘들어 하는 것을 알고 있었구나! 웃으시라고... 힘내시라고...”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하나님의 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빠이시니까 “아빠의 선물이다. 맛있게 먹고 오늘 주일도 웃으면서 힘내거라”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려면 주님께서 내게 붙어주신 사람들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왜 자식들을 사랑하지요? 내 자식이기때문이지요. 그 자식이 아무리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고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은 내 자식이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만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에 주님께서 내게 붙여주신 사람들이라고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을 주님이 붙여주신 사람들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예화1)십자가 밑에 있던 사도 요한에게 주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니라” 주님 한 말씀에 붙들렸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섬깁니다. 사도 요한은 마리아는 주님이 자신에게 붙여주신 사람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①원래 사도 요한은 불같은 성질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 아니다 싶으면 저주하는 사람입니다. ②그리고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공이 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③그래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이 붙여주신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주님이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이 당부하신 말씀대로 요한은 그 즉시부터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하루 이틀 만 모신 것이 아니라, 한 달 두 달도 아닙니다. 마리아가 늙어 돌아가실 때까지 마리아를 모셨습니다. 자신의 친 어머니를 한 평생 모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의 어머니를 평생 모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마리아를 평생 모실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붙여주신 사람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리아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마리아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예화)사모가 신장을 기증할 수 있었던 이유도 오직 하나였습니다. 주님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대가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건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위험부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넉넉히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주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예화)조카들과 지지고 볶고 하면서 사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붙여주신 아이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사랑했던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1절에 보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는 사랑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붙여주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랑해야 히브리파 유대인들처럼 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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