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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 충만하여 | 이병수목사 | 2016-12-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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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4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사도행전 7:54-60 제목:성령 충만하여 한 주간 기도원에 가 있는 동안 장로회신학대학교에 며칠 머물렀습니다. 학생식당에 가서 밥도 먹고, 공부하던 강의실도 가 보았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기념탑에 가서 20년 전을 생각하면서 기념탑의 글도 읽어 보았습니다. 16년 전 대학원을 다닐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학교 내에 있는 서점에 들려 책도 구입했습니다. 그 책 가운데 <이슬람, 기독교와 뿌리가 같은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뿌리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야훼와 이슬람의 알라는 창조자라는 것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과 알라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알라신은 아라비아 지역에서 숭배되었던 달의 신, 즉 초승달의 신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의 모든 상징이 초승달인 것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여호와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신의 교리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점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곳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①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창세기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②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③창세기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④제일 두드러진 삼위일체 하나님이 등장하는 곳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이다. ⑤매 주일 축복기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있습니다. ⑥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우리들은 매 주일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지요. 사도신경을 보세요. 세 번에 걸쳐서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①전능하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②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③성령을 믿사오며 기독교는 분명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헌데 이슬람은 오직 하나의 신 알라신만을 믿습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도 성령 하나님도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장 다른 점입니다. 허나 우리들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세 분이시며 하나라는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성령하나님 시대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하나님에 대해서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길은 성령이 충만한 길 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십니다. 그것을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내 안에 오신 성령님은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헌데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의 불이 꺼졌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불같은 분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불이 붙습니다. 가슴이 뜨거워 집니다. 생기가 살아납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기쁨이 솟아납니다. 비전을 봅니다. 죄를 이깁니다. 헌데 이 성령님이 내 안에서 계속 불타오르도록 기도와 말씀의 땔감을 넣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55절을 보세요.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성령 충만을 사모하길 원합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펜싱에서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성령충만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1.첫째로 마음이 찔립니다. 54절을 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스데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성령이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다 마음이 찔렸습니다. (적용)목사는 설교준비만 열심히 하면 안됩니다. 기도준비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유는 설교를 아무리 잘 준비해도 성령님이 마음에 찔림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도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예배를 듣다가 마음이 찔리잖아요? 그거 좋은 것입니다.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찔리다는 말은 “조각 조각 톱질하다. 도려내지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합니다. 설교를 들어도 아무런 마음에 찔림이 없다면 안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감정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기쁘다든지... 아니면 찔리다든지...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부흥은 찔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헌데 유대인들은 마음이 찔리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똑같은 마음에 찔려라는 말씀이 한 곳에 더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에서 사도 베드로가 설교하자 사람들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보세요.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을 찔러 쪼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성도들의 마음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바라기는 마음이 불편하고 찔리길 바랍니다. 왜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마음이 찔릴 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1)하나는 이를 가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입니다. 기분 나빠 하는 것입니다. (2)또 하나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찔리면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면 삽니다. (예화)하나님은 다윗을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이유가 뭘까?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인가? 남보다 더 많은 헌신을 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마음에 들어 하신 이유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인 반응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을 먼저 본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나?를 생각한다. 하나님은 염두에 없다. 그래서 잡아 뗀다. 헌데 다윗은 정 반대였다. 사람에게 버림받고 손가락질을 받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께 버림 받는 것을 두려워 했다. 이 믿음이 있는가? 말씀을 듣는 태도를 가만히 보세요. 무엇보다 먼저 마음이 찔리길 바랍니다. 그리고 회개하길 바랍니다. 2.둘째로 성령이 충만하면 시선이 달라집니다. 믿음은 시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전혀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기도생활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뭐죠?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훈련이 안되면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55절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이려고 이를 갈면서 달려드는 상황입니다. 성 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치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헌데 스데반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 까요? 사람이 다급한 일을 만나면 주님을 보기 보다 사람을 보고, 상황을 보게 되는데 스데반은 다급한 순간에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들이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은 하루 아침에 된 것은 아닙니다. 평소 경건훈련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1)다니엘 6장 10절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둘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 돌아가는 현실을 보고 몸 조심하는 것입니다. 헌데 다니엘은 하나님을 바라보기로 합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 말씀에서 정말 감동되는 것은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입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입니다. 무슨 말이예요? 다니엘이 지금 나이 60세가 넘었습니다. 그렇다면 10대에 포로로 끌려와서 50여년을 살았습니다. 헌데 다니엘은 50년의 인생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 수 많은 위기가운데서 지켜주신 하나님, 만나주신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전에 하던 대로”입니다. 경건훈련이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전에 하던 대로”한 것입니다. 훈련이 된 것입니다. 연습이 된 것입니다. (2)우리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내공을 쌓으려면 ①자족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사도 바울은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무리해서 욕심을 낼 것도 없고, 최선을 다했다면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들과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을 주셨을 것을 믿고 자족하는 것입니다. ②기도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가 많아지면 기도가 적어집니다. 반대로 기도가 많아지면 염려가 적어집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섭섭한 생각이 자꾸 들면 괜히 마음이 벌렁거려 집니다.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잠도 오지 않습니다. 헌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예화)지난 주간 기도원에서 오후 3시 예배가 끝났을 때 주차장에서 두 분이 시비가 붙었습니다. 이유는 여자 권사님으로 보이는 분의 차가 긁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옆에 차가 긁었다고 확신을 했습니다. 옆에 차 주인은 자신이 긁지 않았다고 억울해 합니다. 20여 분을 주차장 한 가운데서 서로 싸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사실 월요일 기도원까지 올라오는 분들이니 믿음이 없는 분들은 아닐 것입니다. 2시간 동안 아멘 아멘 하면서 예배드리고 나왔습니다. 집에 가려고 하는 순간에 자신의 차가 긁힌 것을 알면 속상하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헌데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주차장에서 당신이 긁었다. 안 긁었다고 싸우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그냥 손해를 보며 안되나? 속상하더라도 자신이 돈을 내어 고치면 된다. 아니 그냥 타고 다녀도 된다. 헌데 소리를 지르면서 싸워야 했을까? 속상하고 화가 날 때 한 번이라도 주님을 바라보았다면 어땠을까요? 우리의 민낯을 보는 것 같습니다. 두 손들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난 뒤에 자동차에 기스난 것을 견디지 못해 하며 싸우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의 현주소는 아닌가? 생각하면 씁쓸합니다. 화가 날 때 주님을 볼 수 있었다면 관대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용서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가 읽는 유일한 성경책일 수 있다.” 따라 하겟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읽는 유일한 성경책일 수 있다.” ③믿음은 선택입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엘리야는 무엇을 바라 보았나? 하나님인가? 이세벨인가? 사람이 얼마나 강한가? 갈멜산에서의 엘리야를 보세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는 능력자였습니다. 헌데 사람이 얼마나 약한가? 열왕기상 18장이 엘리야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나오는 엘리야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입니다. 상황을 보던 엘리야는 깊은 우울증에 빠집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강할 때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는 사람이, 약해지면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죽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열왕기상 18장에 머물려면 시선을 놏치지 말아야 합니다. 3.셋째로 성령 충만하면 말씀대로 실제로 삽니다. 스데반에게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였습니다. (1)스데반은 죽음 앞에서도 평안했습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스데반은 실제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우리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따라서 해 보세요. “우리들의 얼굴은 전도지입니다.” (2)또 스데반은 용서합니다. 60절입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아직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은혜가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용서할 힘이 생깁니다. 용서가 안 될 때는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스데반은 주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까? 오른 뺨을 치는 사람들에게 왼 뺨도 돌려댑니다. 말씀대로 사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화)대구에 서현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에 김영숙 권사님이 계십니다. 이 권사님은 실제로 살아내신 분입니다. 이 권사님은 시장에 가면 물건 값을 깍지 않았다고 합니다. 달라는 대로 다 주면 바가지를 쓸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물건 값을 깍으라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분은 대구에서 큰 약방을 운영했는데 많은 걸인들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손수 시장을 봐서 대접했다고 합니다. “좋은 재료로 손님을 대접해야지 않겠나?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시장 사람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물건 값을 깎겠나? 인색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겠나?”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30세된 큰 아들이 미국에서 병들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타국에 있는 아들이 병들었으니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권사님은 아들을 위해서 열흘간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헌데 큰 아들은 일어나지 못하고 주일 아침에 아들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날은 주일 날이었습니다. 다른 가족들이 오늘은 교회에 가지 말고 집에서 보내라고 만류하였습니다. 그 때 권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니야! 아들이 천국간 날인데 교회 가서 예배 드려야지. 내가 전도한 사람들이 많은데 아들 죽었다고 예배 안드리면서 어떻게 천국소망을 전하겠는가?” 그러면서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집으로 돌아와 주님 앞에서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보세요. 이 권사님은 말씀대로 실제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자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삶으로 하나님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우리들도 성령충만을 사모하십시다. 성령 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 날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이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령이라면 이런 삶을 살고도 남습니다. 저와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자들이 되어 주님의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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