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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 이병수목사 | 2016-12-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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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1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로마서 7장 15-25 제목: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믿음 좋은 사람은 절대 신앙이 흔들리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했던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흔들립니다. 믿음이 좋아도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믿음생활에 정점에 있을 때가 있지요.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생활, 헌신생활, 기도생활에 정점을 찍었을 때가 있으셨지요? 내려오지 않을 것 같던 때가 있으셨지요? 주님이 너무 좋아서 흥얼거리며 찬송하고, 예배하던 때가 있으셨지요? 지금이라면 더 감사하지요. 교회가 좋아서 성도들이 좋아서 교회에 가고 싶어 할 때가 있었지요. 믿음이 그렇게 좋았던 분들인데 어느 순간 믿음이 무너진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될까? 안 되나봐? 하나님이 나에게는 관심이 없나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믿음의 정점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좋은데 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성서의 예)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고,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지자 하면 누구를 생각합니까? 엘리야입니다. 엘리야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장면이 열왕기상 18장과 19장입니다. 열왕기상 18장과 19장의 엘리야를 보면 같은 사람인가? 싶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전혀 다른 두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워 승리합니다. 보세요. 850대 1이예요. 헌데 전혀 기죽지 않아요. 당당합니다. 마치 포효하는 사자 같아요. 헌데 열왕기상 19장에 엘리야를 보세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이를 갈면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살수단을 보낸 것도 아니예요. 엄포만 한 거예요. 평소 엘리야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하나님의 선지자 나 엘리야 앞에서 감히 네가 무엇이기에 큰 소리냐?“며 호령하고 나갔어야 합니다. 헌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갑자기 마음이 무너지면서 도망을 갑니다. 몸에 힘이 확 빠지면서 무서워 도망을 갑니다.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하나님께 어서 죽여 달라고 절규를 합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게 정말 엘리야가 맞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적용)멀리 엘리야를 보지 않아도 우리 자신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분명 주님을 사랑합니다. 날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날 위해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믿고, 그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이 내 인생의 결정권자임을 믿습니다.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헌데 이런 내가 무너질 때가 많습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낙심될 때도 많습니다. 과연 부흥할 수 있을까? 성도들이 변화될 수 있을까? 난 왜 이렇게 부족한 게 많을까? 설교도 성도들을 상담하는 것도, 교회를 이끄는 지혜로 왜 이렇게 부족할까? 힘들 때가 많습니다. 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는 나를 봅니다. 주님처럼 사랑하고 싶은데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너무나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업 다운이 늘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의 모습으로 살고 싶은데... 현실에서는 열왕기상 19장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인데... 하나님이 최종 승리를 주실 것인데...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닌데...왜 이렇게 다운될까?”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로마서 7장과 8장을 읽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뭘까요? 1.믿음의 사람도 갈등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갈등을 했습니다. 보세요. 이것이 정말 사도 바울의 고백일까? 싶습니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고백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고백 아닙니까? 아니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예수님 다음으로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초신자가 이런 말을 했다면 이해가 되지만, 평생을 주님 위해서 전도의 삶을 사셨던 바울이 이런 말을 했을까 믿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논쟁이 뜨겁습니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사도 바울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설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으니까 ①사도 바울의 고백이라도 예수를 믿기 전에 죄에 빠졌을 때 한 고백이라고 합니다. ②두 번째 학설은 아니다. 바울의 고백이 맞다. 바울이 구원받았음에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힘들어 한 것이다.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았지만, 생각으로 마음으로 죄를 짓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한 것이다. 평생을 주님위해서 산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도 이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①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②둘째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동사의 시제가 다 현재형입니다. 무슨 뜻이지요? 지금 로마서를 쓰고 있는 바울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③셋째로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지만, 계속해서 마귀의 공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마다 우리를 공격하는 악한 마귀가 있기 때문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민한 내용이 뭐죠? 19절이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않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자신이 지금 뭔가 행하고 있는데 내가 무엇을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자기를 볼 때 갈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몰라서가 아니예요. 알아요. 헌데 안되요. 내 안에 왜 이렇게 고집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헌데 계속 그렇게 하고 있어요. 어떤 아내가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 불만이 많습니다.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하기에 밉습니다. 헌데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면서 말씀대로 살아보기로 합니다. “믿는 사람이 먼저 주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는 통로가 되어야 겠구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자. 사랑하자. 오늘 잘 해주자.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다.” 이 마음으로 집에 옵니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와 남편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확 닫힙니다. 좋은 마음과 선한 생각은 다 사라지고 나오는 말은 전혀 다른 말이 나옵니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말은 다르게 나옵니다. 왜 그렇지요? 왜 마음에 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를까요? 내 안에 두 종류의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21절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23절이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노라” 원하는 내가 있습니다. 원하는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구원받은 나입니다. 헌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가 나를 원하는대로 살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령님만 내 안에 계시면 좋은데,,, 동시에 악한 마귀가 계속 틈을 보고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다. 착하고 의롭게 살고 싶습니다. 주님과 24시간 동행하고 싶습니다. 헌데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악한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넘어지게 하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예화)베드로 - 몇 시간 전에는 내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헌데 그렇게 못했습니다. 몇 시간 후에 작은 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습니까? 헌데 이것이 우리입니다. 이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힘들어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갈등을 해야 합니다. 내 삶에 대해서 아파해야 합니다. (예화) - 동주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쓰여진 시라는 시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읽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시인은 친구들은 독립운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데 자신은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너무 쉽게 쓰여지는 것이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그 때 친구 몽규는 동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제목으로 가져왔습니다. “부끄러운 것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어니네.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라고 말합니다. 넘어지지 않는 성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갈등하지 않는 성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갈등한다는 것이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부끄러워 할 줄 안다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2.둘째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고민하지 않습니다. 오직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살기에 갈등하지 않습니다. 불신자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불신자가 용서해야 하는데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힘들어 하지 않습니다. 헌데 일단 예수를 믿고 나면 믿음이 크건 작건 두 개의 법이 내 안에서 싸우기에 힘들어 합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었더니 너무 힘들어 졌다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죄가 지배하던 내 마음에 성령님이 오셨기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할 때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고 출근을 하거나, 결혼식에 가거나 할 때 찝찝한 마음, 불안한 마음이 든다면 그것도 믿음입니다. 헌데 문제는 갈등이 없다면 문제입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바울도 똑같습니다. 바울이 끔찍한 죄를 지어서 힘들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살았습니다. 헌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자꾸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괴로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간음죄를 짓고, 사기를 치고, 죄를 많이 지어서가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5절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고 싶어서 7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예화)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노력과 열심으로 안됩니다. 심리서적을 많이 읽는다고 평안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용서하시고, 날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화) 지난 달 30일 폴란드 작은 마을에서 25살 카밀이란 청년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이 청년이 술집에서 보드카를 너무 많이 마셔서 졸도를 했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을 했습니다. 사망했으니 냉동고에 안치를 합니다. 헌데 냉동고 안에서 막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아직 술이 덜 깨어서 “왜 이렇게 춥냐고 소리치더라”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퇴원을 했습니다. 헌데 더 놀라운 것은 기적처럼 살아났으면 집으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병원 문을 나와서 다시 술집으로 갔다고 합니다. 술을 먹고 심장마비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또 술집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 이야기는 아닙니까?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새 생명 얻었습니다. 기적처럼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로 돌아 가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헌데 다시 세상으로 갑니다. 세상에서 즐기던 것을 즐깁니다. 세상에서 얻고자 했던 것을 좇아갑니다.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 또 죽어라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이 왜 구원받아야 합니까? 주님께로 돌아가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났다면 이제는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서 생긴 갈등을 두려워 하지 마세요. 갈등이 없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날마다 자라가는 것입니다. 성화라고 합니다. 날마다 거룩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화의 최종목적은 예수님을 닮는 것ㅇ십니다. 그러나 너무 멉니다. 그래서 한 단계씩 올라가면 됩니다. 5살 짜리 아이에게 대학문제를 풀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5살짜리는 5살 짜리의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각자의 수준에 맞게 자라가면 됩니다. 초등학교 수준이라고 판단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대학교수준이라고 자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날마다 자라가면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은 도와 주실 것입니다. 말라기 4장 2절을 보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여기에서 “공의로운 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내 죄를 대신 지고 한 번 용서해 주신 것으로 끝내지 않고, 계속해서 건져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치료하는 광선을 계속 비추어 주셔서 주님을 닮은 자가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리에 머물면 안됩니다. 날마다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말씀과 멀어진 자신을 생각하면서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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